장모님의 81th 생신을 맞아 처가 근처에 있는 한정식집에서 점심을 사드렸다.
오래된 한정식집이었는데 그런대로 음식이 괜찮았다.
숫불에 등심을 굽는 한정식코스요리였다.
쇠고기는 부드러웠고 고기를 굽은 종업원의 솜씨가 좋았다.
도미회 무침이 좋았다. 나는 회를 잘 먹지 않는데 도미를 썰어 초장을 넣고 야채와 버무렸는데 맛이 좋았다.
장모님께 금년을 넘기지 말고 건강검진을 받으시라고 말씀드렸다.
아직껏 큰 병은 없으신데 그 점도 감사한 일이다.
장모님께 용돈을 드렸다.
처제는 아들이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하였다. 감사한 일이다.
대전에 조문갈 일이있어서 처가에 들리지 못하고 음식점에서 나와 헤어졌다.
대전행 KTX 열차를 타고 나장규선생님 부친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조문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밤 10:30분이다.
피곤하여 금방 잠들었다. ^-^
팔만대장경을 조판했다고 알려진 강화도 선원사에 들렸더니 박정희 대통령 사진을 상설 전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주지가 박정희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18년이나 집권하여 내가 어린시절부터 대통령이었으니 그를 매체를 통해서 많이 보았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지나고
여러 대통령을 거치는 동안 그의 모습은 나에게 잊혀졌다. 오늘 사진으로 다시 보니 박정희 대통령이 새롭다.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니 더욱 새롭다.
박정희……
4.19 이후 거리는 매일 데모대로 넘쳐났고 사회는 혼란했으며 장면정부는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했다.
그 틈을 타고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를 스스로 작곡하고 어떻게 하면 국민을 잘 먹일 수 있을까하는 걱정에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나라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1970년대 연평균 경제성장률 7% 이상으로 20여 년간 세계 최고였다.
3선 개헌,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규정을 철폐한 유신헌법,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자기가 계속해서 대통령을 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한국적민주주의라는 명분이 당시 나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국가법질서 체계가 무너지고 모든 것을 데모로 해결하려하며 공권력이 무너지는 작금의 현실을 보니
한국적민주주의라는 것이 실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 한국적 민주주의도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했다. 모든 것이 내가 아니면 안된다라는 생각이
나라와 자신을 망쳤다. 그가 다른 이들 처럼 뒷돈을 챙기지 않은 것을 보면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하여 효율적 자원배분곽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 대기업위주의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수출산업 성장을 위해 노동자 농민들의 이익은 제한되었고 고통을 감내해야했으며 그결과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하였다. 동아링보 광고탄압 등의 언론탄압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 중에서 OECD에 가입하고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바뀌고
세계 수출 7위의 위업을 달성한 나라는 코리아 뿐이다. 그런 기초를 제공한 사람이 박정희인것은 맞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과실도 있다. 박정희가 죽었다는 뉴스를 듣던 아침이 생각난다.
아! 그날 영원히 갈것처럼 공고했던 박정희 정권이 끝나던 날, 역사는 흐르며 영원한 권력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김일성 권력보다 더 짧게 끝날 줄이야. 김일성은 세계사에도 없는 3대세습불법독재정권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으니……
박정희의 사적인 사진을 보니 그는 권위적인 지도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에서의 미소도 권위가 잔뜩 들어가있고 모내기 사진에서도 옆사람과 너무 비교되는 이른바 썩소다(썩은 미소)
그가 격의 없는 활짝 웃음을 내보이는 것을 본적이 없다. 두딸의 어깨를 잡고 있는 사진은 더하다. 저런 아버지와 사진찍고 싶을까? 옛날 사람이라 그런가?
모내기 사진에서도 권위가 들어가 있다. 옆사람과 너무 비교되는 이른바 썩소다(썩은 미소)
두딸의 어깨를 잡고 있는 사진은 더하다. 저런 아버지와 사진찍고 싶을까?
비질을 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서민적이다. 빗자루도 평범하고 값싼 대비다.
박정희대통령이 국민의 배고품을 걱정하고 나라 경제를 일으키려 애쓴 대통령은 맞다.
그는 전대미문의 세계사적 기념비에 해당하는 20여년간 연평균경제성장률 7%를 이룩한 대통령이며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과실도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 점이 안타깝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3번만 하고 유신헌법 직전에서 사퇴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로 나는 집에 이승만대통령 사진을 마루에 걸고 있다.
붕우 남기완으로 부터 내
雅號를 몇개 지었으니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쓰라는 연락이 왔다.
참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내게 보내온 편지글 전문을 실어본다.
아내와 의논하여 수일내로 결정할 것이다
전부 다 맛좋은 것이어서 어떤 것을 먹어야할지 그저 행복한 고민이다.
내가 무슨 복이 많아 이런 호사를 누리는지
기완아! 고맙다. 기다려라 이 웬수 기필코 값겠다!! ㅎㅎㅎ~
< 적당한 사진이 없어 몇 년 전 마라톤에 출전한 사진을 실었다>
맹기호의 雅號를 지어보려 생각은 줄곧 해왔으나, 정말 어려워서 미루고 미루어 왔는데,
요즘 맹기호 시가 나오기 시작하여 더는 미룰 수
없어서 몇 개 생각해 봤어.
마음에 들면 골라 쓰고 마음에 안 들어도 좋고 :
맹기호 아호
짓기
:
1. 焉知
焉知 : 논어 ‘未知生
焉知
死’
‘어찌 알겠는가?’로
끝없이 묻고 진리를 찾아가는 정신의 표현.
*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계로문사귀신. 자왈: 미능사인, 언능사귀? 왈: 감문사. 왈: 미지생, 언지사)”
論語(논어) 先進(선진)편에 출전한다.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여쭈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도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감히 죽음에 대해 여쭙습니다.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 子曰 後生可畏
焉知
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
공자가 말했다. 뒤에 태어난 사람이 가히 두렵다. 어찌 오는
사람들이 이제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으랴.
40이 되고 50이 되어도 명성이 들리지 않으면, 이 또한 두려워할 것이 못될
뿐이다.
2. 問仁
어떻게 하면 어질고 멋지게 살 수 있을까 늘 고뇌하는 모습을 담아서
司馬牛
問仁
. 子曰 : “仁者其言也?.”
顔淵
問仁
. 子曰 克己復禮爲仁.
樊遲
問仁
.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樊遲
問仁
,
子曰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
: 번지(樊遲)가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거처함에 공손하며 일을 집행함에 공경하며 사람을 대하기를 충성스럽게 함을,
비록 이적(夷狄)의
나라에 가더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 -자로편(子路篇) 19장(章)-
3. 新雨
(막 내린 비)
늘 새롭고 상큼함을 추구하는 마음, 늘 일신우일신하는 마음을
담아서
唐詩, 王維의 오언율시 ‘山居秋暝’ :
空山
新雨
後, 天氣晩來秋. …………..
* 新月 :
초승달
4. 多情
소동파가 詞를 삼백여 수 썼는데 ‘多情’이란 말을 유난히
많이 썼으며, 이는 매우 특이한 점이다.
호방한 문인임에도 ‘多情’이란 말을 매우 좋아 했다는 것인데,
맹기호의 ‘다정함’(정이 많음)과 혹시
통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름도 그렇지만 ‘최고로 좋은’ 그런 것은 없는 것 같아.
내가 좋아해야지 좋은 것이지.
더 생각해 볼게~~
from 기완
<또 기완이가 오늘 아호를 또 보내왔다>
맹교장,
최고의 정승 고불 맹사성의 후손으로 사는 것을 늘 잊지 않으려 :
5. 騎牛, 牛夫,
牽牛
– 騎牛 : 맹사성의 ‘騎牛’를 본받는
의미에서
– 牛夫 : 맹사성의 마부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소를 끄는 것이니馬夫가 아니라 牛夫
– 牽牛 : 소를 끈다는 뜻을 직접 표현
* 두산백과 :
기우[ 騎牛 ]
소를 타고 다니는 일. 소를 타고 다니는 풍습은 교통수단으로 이용한
경우와 순전히 풍류적인 멋으로 되는 경우가 있다.
기차나 자동차 같은 교통기관이 출현하기 전에는 주로 말[馬]을 타고 다녔으나,
가까운 거리나
바쁘지 않은 용건으로 왕래할 경우에는 소를 타고 다니기도 하였다.
소의 걸음은 말보다 느리지만, 소를 타는 재미는 느릿느릿한
걸음에 있다고 한다.
소를 탈 때 안장을 얹으면 소의 등에 사람이 앉게 되지만, 안장 없이 탈 때는 소의 등줄기 엉덩이 위에 앉는 것이 가장
편안하다.
《독좌문견일기(獨坐聞見日記)》에 보면, 세종 때에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孟思誠)은 고향인 온양을 왕래할 때 늘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또, 《기문총화(記聞叢話)》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맹사성이 소를 타고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용인에서 비를 만나 어느 여관에 묵었는데, 먼저 들어온 선비가 불러서 장기를 한 판
두고,
심심풀이로 공(公)자 당(堂)자로 문답을 했는데, 먼저 맹정승이 “무슨 일로 서울에 가는공” 하니, 선비가 “녹사시험 보러 간당”
하였다.
녹사(錄事)란 의정부에 딸린 아전벼슬이므로, 맹정승은 “그러면 내가 좀 도와줄공” 했더니,
정승인 맹사성을 알아보지 못한 선비는 화가
나서 “아니꼽당” 하였다.
그 후 선비가 시험을 치르는 차례에 따라 좌의정 앞에 나온 것을 맹정승이 알아보고 “어떠한공” 하였더니
선비는 깜짝
놀라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죽여 주사이당” 하였다.
그래서 의아해 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맹사성이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한바탕 웃었다는
것이다.
그 선비는 맹정승의 도움으로 벼슬에 올랐으며, 이 일은 ‘공당문답(公堂問答)’이라고 전한다.
《해동잡록(海東雜錄)》 《동문선(東文選)》
《양촌집(陽村集)》에도 기우설(騎牛說)이 나오는데,
평해(平海)사람 이행(李行)은 호(號)를 기우자(騎牛子)라 하며,
달밤에 소를 타고 호리병에
술을 채워가지고 산수 좋은 곳에 가서 놀며 사나이의 호탕한 기개를 길렀다고 한다.
《패관잡기(稗官雜記)》에도 진사 이별(李鼈)이 소를 타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으며,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조석간(趙碩澗)도 날마다 소를 타고 왕래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매산잡지(梅山雜識)》에는 안주 서촌에 사는
김(金)이라는 사람이 저자에 갔다가 소를 타고 밤에 집으로 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나 해치려고 덤비는 것을 소가 나서서 호랑이를 상대하여
싸웠는데,
새벽에 이르러 소도 호랑이도 다 죽고 사람만 살아나서 그 소를 의리 있는 소라고 하여 의우총(義牛塚)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 밖에도 《삼연집(三淵集)》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율곡집(栗谷集)》 등에는 기우가(騎牛歌)가 실려 있다.
소를 타는 풍습은 그림의 소재로도 다루어져서 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목동의 한가로운
모습을 묘사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기우목동(騎牛牧童)》이나,
해질녘에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그림, 너울 쓴 여인이 소를
타고 나들이하다가 나귀를 타고 가는 남자들과 마주친 광경 등은
한국의 기우 풍속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우
[騎牛] (두산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마부[ 馬夫 ]
말을 타고 갈 때에 고삐를 잡고 앞에서 끌거나 뒤에서 따르는 사람.
[네이버 지식백과] 마부
[馬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기완~~
동화작가 윤수천 선생님 댁에 다녀왔다.
수원문인협회장, 경기문인협회장을 지내신 문단의 원로이며 동화작가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분이다.
윤수천 선생님은 동화책을 80여권을 내셨다.
그 양만 대단한 것이 아니라 동화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여러번 실렸고
교보문고 아동 베스트셀러에도 여러번 그 분의 동화가 올랐다.
그 분 집 담벼락에 수원시에서 동화에 등장하는 어리이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해서
축하해주기 위해 모임을 가졌다.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길에서 시원한 음료와 수박을 먹었다.
2차로 저녁식사를 했는데 음식값은 인세를 많이 받았다고 하시며 윤수천 선생님이 모두 내셨다.
문인 40여명이 모여 축하해주었는데 윤수천 선생님은 수원의 자랑거리이기도 한 분이다.
그 분과 교우하게 되어 감사하다.
고령에도 동화를 쓰시는 윤수천 선생님은 마음이 어린아이 같으신 분이다.
금년에도 ‘담구멍친구’라는 동화책을 내셨다.
윤수천 선생님댁 문패이다. 멋지다.
방학 중에 고려사 공부를 하고 싶어서 경기도박물관에서 시행하는 교원연수를 신청하였다.
40명 정원인데 인기있는 연수여서 연수 첫 날 선착순으로 받는데 그날 놓치면 끝이다.
사이트에 들어가 기다리고 있다가 얼른 신청했는데 15번째로 신청하여 당첨되었다.
39명이 평교사였고 교감도 없었다. 교장은 나 한명이었다.
고려왕조실록이 불탄 것이 정말 아쉽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왜놈들이 나쁜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고려는 475년의 조선 다음으로 긴 왕조였다. (조선은 518년으로 세계에서 단일왕조로 역사상 가장 긴 왕조다)
중국에서도 이렇게 긴 왕조는 없는 것으로 안다.
중국 문명의 기반을 이루었다는 한나라도 전한, 후한을 합쳐야 420여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나마 중간 왕망으로 단절된 기간이 있었다.
고려왕조실록은 임진왜란 때 불탄는데
그나마 세종 때 고려사, 문종 때 고려사절요을 편찬한 것이 전해져 고려역사를 엿볼 수 있다.
그 2권은 모두 고려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고려가 제후국 즉 왕이 아닌 황제 즉, 천자의 나라였음을 확실하게 알았다.
나는 그것이 그냥 소문으로만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확실하게 알았다.
고려가 황제의 국가였던 증거는 아주 많았다.
경기도 박물관의 계단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느 천재에 의한 설계다. 그에게 감사한다.
답사여행도 있었는데 강화의 선원사지다.
팔만대장경을 조판했다고 알려진 절이다.
역시 선원사지
강화시내의 고려궁이 있었던 곳이다.
이 건물은 그 유명한 외규장각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문서를 약탈해간 그 곳이다.
45년 만에 열리는 천안중학교 19회 졸업생 동창회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학교에서 큰 사고가 나서 수습하느라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오랜만에 동창회가 열리는데 참석하지 못하여 아쉬웠다.
그런데 최용섭이가 내게 전화를 하여 만나자고 하였다.
자신이 수원사는데 동창회가서 맹기호가 수원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며
반갑다고 전하를 해서 만나게 되었다.
놀랍게도 수원부근에 사는 친구 네명이 나왔다
한정식집에서 모였는데
중소기업하는 최용섭이가 밥값을 냈다.
다음에 또 만날것을 기약하면서 아쉬움을 남긴채 헤어졌다.
최용섭은 주물회사 대표였고, 박한순이는 수원주택은행지점장에서 퇴직하였으며
남상철은 중견기업 전무이사였고, 유제석은 유통회사 상무로 재직하고 있었다.
모두 사회 각 분야에서 맡은 소임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SV301535[1].jpg](https://anbindr.com/wp-content/uploads/xe_files/60/256/058/SV301535%5B1%5D.jpg)
삼전도(낭송용)
맹기호
정축년 2월 24일
예판 김상헌의 수염에 눈물 어름이 창끝처럼 빛났다.
전하! 오랑캐가 산성을 포위했지만 충성스런 조선군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이며
조선 팔도에서 의병이 너나할것 없이 일어나 전하를 구하러 올것입니다.
일천만 백성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면 능히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부디 성심을 굳건히 하소서!
이판 최명길이 말했다.
전하! 종사와 백성을 살리기 위해 굴욕을 견디셔야하옵니다.
강도가 목에 칼을 대면 돈을 줘야합니다. 목숨을 주면 세상도 없는 것입니다.
군왕은 종사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백성의 목숨을 살리는 일에 군왕이 못할 일은 없습니다.
오늘 출성 항복하여 청의 연호를 택하고 훗날을 기약하소서!
한양에서 심양까지 2천리길 60만 포로가 끌려간 정축년 2월
도망가다 붙잡히면 귀를 뚫고 엮었으며 아이들은 손바닥을 뚫어 철사로 엮었다
파아란 하늘은 팽팽했다. 2월의 칼바람은 쇠처럼 울며 능선으로 싸락눈을 퍼올렸다
울면 채찍이 날아와 살점을 뜯었고 행군 대열의 아무 골짜기나 조선 여인의 정조가 울었다
포로는 물건이었다 돈이 필요하면 시장에 팔고 주인이 죽으면 산채로 함께 묻었다.
오늘 다시 바람 불어 하늘을 우러르니
고려와 조선을 쳤던 몽골은 게르 안에서 700년 동안 잠자고
신해혁명으로 청과 만주족 떼놈은 세상에 흔적도 없다
산자에게 묻겠다
남은자에게 묻겠다
누가 더 강한가
자신을 더 사랑한 자 누구인가
시작노트 :
병자호란 6년 후인 1642년(인조20년) 조선의 인구는 1076만이었습니다.
청에 끌려간 포로가 60만이었고 이는 전체 인구의 6%에 해당되는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거기에 3만명이나 참전한 몽고군에게 붙잡혀간 포로는 몇명인지 알지 못해 포함되지도 않았으니 정확한 전체 포로의 숫자는 더 많았을 것입니다. 정말로 참혹한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1911년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지구상에서 영원이 소멸하고 오늘날 만주족도 한족에 동화되어 그 흔적도 없으니 누가 진정한 승자입니까?
얼마전 신문에 보니 서울에 있는 몽골대사관이 7년 동안 집세를 내지 못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게 나라입니까?
고려 때 39년이나 쳐들어와 우리를 괴롭혔던 몽고, 병자호란 때도 3만명이나 쳐들어왔던 몽고군!
지금은 초원의 천막 게르에서 염소 젖이나 먹으면서 마치 700년 전에 문명이 스톱한 원시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2014년 수출실적 세계 7위 코리아!, 외환보유고 세계 7위! 누가 더 강한 것입니까? 진정으로 살아남은 자가 누구입니까?
8.15광복70주년 기념행사로
수원문인협회에서 나라사랑 시낭송 시간을 갖는다.
여기서 창작시를 낭송하기로 하였다.
오늘 그날 낭송할 시를 썼다.
병자호란을 주제로 썼다.
![병자호란[1].jpg](https://anbindr.com/wp-content/uploads/xe_files/60/256/058/%EB%B3%91%EC%9E%90%ED%98%B8%EB%9E%80%5B1%5D.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