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맹석재는 1924년 지금으로부터 80년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셨다. 식량수탈로 조선에서 나는 쌀은 모두 일본으로 가져가서 우리 민족이 역사상 가장 못 먹고 못살던 시절이었다. 1924년 6월 4일(음력 5월1일)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면 휴대리 329번지 초가집에서 아버지 맹순섭 어머니 하동정씨 사이에서 8남매의 넷째로 출생하였는데, 동네 30여가구 중 거의 모두가 식량을 걱정하는 집이었고, 두세집 정도만 식량 걱정 없이 살아가는 동네였다.
일제치하에서 식량을 수탈당하고 조선인은 대부분 초근목피로 목숨을 이어가는 생활이었다. 당시 생활은 비가오지 않으면 모를 내지도 못하고 하늘만 쳐다보며 정미기도 없어 모든 것을 손으로 해야만 하는 원시적인 생활이었다. 땔감도 산에 가서 나무를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나에게 조부되는 맹순섭은 어려서 홍역을 앓다가 바람이 들어 해소기침으로 몸이 약하신분 이었고 평생 병객이셨다.
아버지는 열 살 때 외숙인 정운씨의 권유로 아산군 온양읍 모종리로 이사하였고, 1934년 음력2월19일 일 손자들을 먹이기 위해 밥을 굶다시피한 할머니 남평 문씨 사망으로 슬픔이 컸다. 어린나이에 할머니가 묻히시는 것을 보기위해 30리 길을 걸어서 따라갔다. 11세 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의 권유로 온양온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녔다. 13세 때 집안이 살기가 어려워 외숙이 사는 함경남도 원산으로 이사를 가는데 당시 보통학교를 마치고 가라는 외숙의 말에 따라 공부를 할 욕심으로 모종리 남아서 고생을 하던 중 14세 때 아버지와 함께 원산으로 가게 되어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8개월치 수업료를 담임선생님이 대납해주셨는데 값지않고 가서 선생님께 혼날까봐 학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원산으로 갔다.
원산의 어머니는 한복바느질을 하셨고,. 원산에서 이모님댁에서 자전거를 배운 후 이모님댁에서 정종, 음료수, 간장 등을 배달하였다. 그러다가 15세 되는 가을에 외숙모님이 강원도 양양으로 이사를 가서 다른 일을 찾다가, 원산의 원산제제소에서 나이를 속이고 일을 했고 처음으로 제대로 봉급을 받는 직장생활을 하였다. 어머니에게 매달 봉급을 드렸으며, 일은 매우 힘들었어도 공부를 할 욕심으로 밤에 야간학교에 다녔는데 몸이 너무 지쳐 밤에 학교에서 잠을 자는 일이 계속되어 그만두었다.
이 때 집을 나간지 4년 만에 형이 병이 들어 돌아왔는데, 간신히 어머니의 병간호로 형의 병이 낳았으나 다음에 집안의 모든 식구들이 장티프스에 걸려 죽다가 살아났다. 엠병이라고 불리는 무서운 병이었다. 17세 때 삼진철공회사 주물부 견습공으로 취업하였다. 이일이 후일 주물기술자로 평생을 살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철공소는 인기 직종이었고 빽이 있어야 들어가는 곳이었다. 2년 후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의해 쇠는 모두 군수공장으로 가져가고 공장에는 쇠가 없어서 공장이 폐쇄되어 실업자가 됨. 그 후 철광석 광산으로 유명한 함경북도 이원과 철산으로 취직을 위해 찾아갔으나 공장은 컷는데 선철은 모두 일본으로 가져가고 쇠가 없어 공장이 문을 닫고 있어 19세 때 다시 함경남도로 내려와 함흥삼공주물회사에서 2년 동안 매달 12원을 어머니에게 붙여드렸다. 어머니가 너무나 좋아하셨다.
1944년 징병 1기생으로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1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음. 주로 육박전, 돌력전, 폭뢰라고 불리 우는 폭탄을 가지고 미군의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훈련, 총검술, 등의 강제 훈련을 받고 22살에 영장이 나와서 일본군에 강제 입대됨. 다시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2차대전에 일본군으로 참전하였다. 일본군에 입대하는 날 집 앞에 커다란 대나무를 세우고 출전군인 무운장구라는 글을 써서 세워줌. 일본육군제153부대 육군보병기관총부대에 편입되었고 나중에 목포근처의 비행장 옆 해변의 부대로 배치되었음. 동남아 전선에 배치되었던 동료들은 대부분 전사하였으나 다행히 국내에 배치되어 목숨을 건졌다. 목포부대는 미군탱크가 상륙하면 방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항복하였고 아직도 해산하지 않고 무장을한채로 한국 민간인의 습격에 대비하고 있는 일본군을 8월 18일 탈출하여 집에 왔다. 나라를 찾은 광복의 기쁨은 일생에 최고의 기쁜 일로 기억하고 있다.
고향인 휴대리에 돌아와 보니 해방을 맞이하여 동네사람들이 농악을 하고 술을 먹고 놀고 있었고 뿌리칠 수 없어 어울렸다. 이때 사고가 생겼다.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는 청년과 격투를 벌이다가 그 청년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죽은 것으로 알고 그 길로 어머님이 사는 원산으로 향했다. 원산에 가서 정착을 하고 여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장사를 하였으며 24세되는 해에 조그만 내 집을 사게됨. 함경남도 원산시 영정150번지 대지 40평, 방2개, 부엌, 판자로 된 울타리, 나뭇감을 두는 헛간도 잇는 집이었음. 함경남도 도청에서 3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집이다. 평생 처음 내집을 사서 너무나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다가 담배를 제조하는 공장을 차렸으나 담배는 지금이나 당시나 개인제조는 불법이었음. 세 사람의 권총든 형사에게 연행되어 1주일동안 감옥생활을 하다가 이모부의 보증으로 풀려났는데 이 날이 해방에 이어 두 번째로 일생에 기쁜 날이며 이 날 다시는 법을 어기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였음. 후에 벌금형을 선고받음
1950년 6월 25일 아침 동사무소에서 남이 북을 침공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원산시내를 빠져나와 시골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매일 남쪽으로 진군하던 인민군이 후퇴하고 유엔군이 북진한다는 소식이 들렸고, 어느 날 동사무소에서 나오라고 하여 가보니 인민군에 자원입대원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하였다. 조국을 위해 충성을 할 기회를 줄것이니 자원입대하라고 하면서 강제로 입대를 시키는 것이었는데 인민군에 입대하면 남쪽에 있는 동생들과 서로 죽이는 싸움을 하게 될것이어서 결국 강제 입대장을 탈출하여 빠져나옴.
산속으로 피난과 도망생활을 계속하던 중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남하하는 국군과 미군이 50년 12월 5일 원산과 흥남에서 배를 태워준다고 하여 원산항에 갔다가 배를 타지 못하고 걸어서 남으로 먼저피난을 온 것이 가족들과 영원히 헤어지는 계기가 되었음. 이렇게 강원도 양양으로 피난을 왔으나 가족들을 다시 데리려 원산을 향해 출발했다가 국군정보원들에게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간신히 풀려나 다시 양양으로 내려 옴 양양에서 국군 HID부대원에게 잡혀 북에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요원으로 근무하게 되어 결국 육군정보원으로 6.25에 참전하게 되었다. 6.25전쟁 중 정보 수집을 위해 민간인 복장으로 북한군 점령지역에 투입되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부대장에게 사정하여 제대특명을 받고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에 돌아와 농사를 지음, 동생인 문재와 범재가 제2국민병에 끌려갔기 때문에 농사일에 서툰사람으로 고생을 하였음. 동생들은 제2국민병에서 거의 죽은 몸으로 돌아옴. 회복 후 문재, 범재동생은 다시 국군에 입대하여 6.25에 참전하였다. 농사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으로 너무나 일이 힘들었다. 그리고 이때 하루걸이라는 병에 걸려 죽다가 살아났다. 신창의 누님집까지 새끼틀을 등에 지고 걸어가서 일을 하기도 하는 등 열심히 일을 했으나 점쟁이의 말대로 돈을 모두 날렸다.
1955년 공재성의 2녀 공정숙과 결혼 후 쌀 한가마 값을 가지고 무작정 서울로 와서 경성주물회사에 취직을 하였음. 거처할 곳이 없어 서로 따로 살음. 경성주물에서 한달 봉급을 받고 헤어져 살던 아내와 서울 이태원에 방한 칸을 세들어 살림을 차린 이날의 행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통장이 자꾸 찾아와 노무대에 가야한다고 하여 또다시 군대에 갈 수는 없어 피신을 위해 다시 고향에 내려왔다. 이때 내려오지 않을 수 있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다. 고향에 내려와 이웃 할머니가 사는 집을 같이 쓰기로 하고 천안 수도주물회사에 취직하였음. 당시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직원100명이 넘는 큰 회사였다. 공장 일을 열심히 했고, 내 땅을 사기 시작했으며 아내도 생전 해보지 않던 농사일을 열심히 했음. 밭에 김도 매고, 도리깨질, 보리를 투드리는 일 등 힘겨웠다. 그런데 동사무소에서 또 군에 가라는 소집영장을 보낸다고 하여 군대라면 신물이 나게 고생을 한터이라 집을 떠나 천안회사기숙사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1954년 4월 14일 11시 경에 아버님이 운명하셨다. 안사람과 제수씨가 임종을 지켰다. 못자리 물이 마를 텐데 왜 여기 있느냐 나는 죽지 않는다. 빨리 나가 일보라고 말씀하셨는데 돌아가셨다.
1955년 3월 17일 장남 기호를 낳았다.
회사는 부지런히 다녔다. 한달에 70일을 일 한적도 있다. 수도주물회사를 10년 이상 다니고 기술을 인정받아 공장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던 중 1967년 회사가 무리한 투자로 망하게 되어 퇴사하였음. 3년 동안, 해보지 않은 농사 일을 하느라 너무 고생을 많이 하였음.
그러던 중 1970년 1월 18일 당시 45세의 나이로 경기도 수원으로 이사를 와서 동신지업사를 창업하였다.. 모든 식구가 열심히 살았고 장남 맹기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을 포기하였으며, 집에서 부모와 함께 장사를 하였다. 주호는 천안의 천안여중을 다니기 위해 천안에 남겨놓고 왔고, 막내 수호는 세류초등학교 5학년으로 전학시키고 자식들 중에 처음으로 우유를 먹이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자식 중에 수호가 제일 키가 큰 것은 아마도 그때 먹인 서울우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평생의 병력을 잠깐 소개하면
5살 때 홍역을 앓고 옴에 걸림
15살에 장티프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김
46살에 충수염의 치료시기를 놓쳐 복막염으로 발전하여 시민외과에서 수술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김
55세에 이화대학교 병원에서 전립선 비대로 수술을 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함
1993년 건물계단에서 낙상하여 갈비3대 부러지고 척추가 골절되어 성빈센트 병원에서 수술하였음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다옴
1993년 사고 후유증으로 비장에 염증이 생겨 성빈센트 병원 전정수 교수의 집도로 비장을제거하는 수술을 받음 .현재 물론 비장이 없음.
1996년 오토바이사고로 코뼈 골절되고 하반부에 찰과상으로 입원함
2002년 오토바이를 타고가던 중 전방에서 나오는 차량과 충돌하여 손을 다쳐 2개월동안 치료함.
우여곡절 끝에 장남 기호는 1971년에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고, 주호는 수원여고에 입학하였음.
50세 때부터 60까지밖에 살 수 없는 몸이라고 생각했으나, 현재 80세로 고향 마을에 생존한 남자로서는 최고령이며 집안전체에서도 작년에 작고한 종형 맹철재씨의 83세에 이어 수명 2위를 기록하고 있으나, 요즈음 들어 건강이 많이 약해 지셨고 스스로도 몸을 돌보지 않는 등 건강에 태만하고 있으며 특히 잦은 음주로 매우 걱정된다. 그런 연유로 나는 나의 아버지 맹석재에게 술을 따라주는 사람을 싫어한다.
아버지는 평생을 나를 위해 살아오셨다.
오늘 아침 안방문을 열고 출근하겠다고 인사를 드렸더니
자식이 출근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던지 ” 너 참 예쁘구나” 라고 말씀하셨다……
너무 고생을 많이 한 분이라 부디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한다. 한 90세까지만 사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요즈음 아버지께서 스스로 당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셔서 걱정이 된다. 거의 강권하다시피하여 서호노인복지회관의 수영강습에 등록시켜드렸는데 의외로 4개월째 잘 나가신다.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