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논란을 불러왔던 교학사에서 나온 한국사 고등학교 교과서를 읽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선사시대에서 부터 노무현정부와 이명박 정부까지 다루고 있다.
우선 내용이 방대하였다. 그리고 내가 역사전공이 아니다 보니 한시간에 20쪽 이상 읽기는 불가능했다.
여러날에 걸쳐서 자세히 읽었다. 우선 많은 공부가 되었다.
특히 기억할만한 내용은 실학자 유득공이 지은 발해고(1784)에서 통일신라시대를 한반도를 완전히 통일한 것이 아니고 고구려의 영토 대부분을 잃었고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합하여 세운 발해가 엄연히 존재하였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라고 부르지 않고 남북국시대라고 불렀다.
또 역사학자 신채호는 독사신론(1908)에서 다른 종족을 끌여들여 같은 종족을 멸망시키는 것은 도적을 불러들여 형제를 죽이는 것가 다를 바가 없다고 신라의 김춘추를 욕하고 있다.
발해는 698년 건국하여 926년 망할 때까지 228년이라는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가진 왕조였다.
발해는 건국이후 정복활동을 벌여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였고 남쪽의 신라와 함께 공존하는 남북국 시대를 열었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자신들의 나라이름을 고려라 하고 왕을 고려국왕이라 하는 등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명백히 하였다.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가 망한 후 만주지역을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로 유지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 책에서는 발해의 역사를 여러지면을 할애하여 자세히 다루고 있고 본문에서 남북국시대라는 표현으로 자주적 역사관을 보이고 있다.
고려의 광종도 자주적인 왕이였다.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준풍 등 독자연호를 썼다.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는 공신과 호족세력은 숙청하였다.
고려말에 논농사의 경우 노동력을 절감시켜주는 이앙법(모내기법)이 보급되었다. 이앙법은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많고 제초작업도 수월하여 농민들이 선호하였다.
그러나 이앙법은 벼가 뿌리를 완전히 내리기 전에 가뭄이 발생하면 농사를 망칠 수도 있었다. 이앙법은 제초작업의 노력을 줄일수 있는 당시 최고의 농사법이었다.
모내기를 할 때 줄을 맞추어서 심기 때문에 벼와 잡초가 구별되어 김매기를 쉽게 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농부가 한여름 내내 하는 일은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직파법의 경우에는 벼가 무질서하게 자라 김매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앙법은 물이 부족하게 되면 한해 농사를 망치게 되는 위험이 있었다.
고려 때는 무반에 비하여 문반이 우월한 위치에 있었으며 무반은 실제로 3품까지 밖에 승진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 주식으로는 쌀보다 보리 조의 비중이 컸고 백성들은 하루 식사를 조석으로 두끼니를 먹었다. 나도 정년퇴직하면 하루에 두끼만 먹으려 한다. ㅎㅎㅎ~
고려 때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는 3심제로 재판한 후 마지막으로 국왕의 재가를 얻어 사형을 집행하였다.
고려는 918년 건국하여 1392년까지 474년이나 존속한 왕조였다. 조선은 518년의 단일왕조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왕조다.
훈고학이 한에서 당까지 성행하였던 유학인것도 알게되었다. 훈고학-성리학-양명학–고증학으로 변해왓다.
오늘날 삼국사기는 보물이고 삼국유사는 국보인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는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써졌지만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단군을 시조로 인식하는 민족의식과 자주성이 드러나 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스님이었기 때문에 집필에 자유스러웠겠지만 읽어보면 일연의 자주적 생각이 넘치는 책이다.
그가 없었으면 단군신화는 없었을 것이다. 중국도 그러하고 어느 민족이든 신화로 시작하며 신화가 없는 민족은 없다고 말하며 우리의 단군신화도 그래서 의미가 있기에 서술한다고 말하고 있다.
광종의 연호사용도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김부식은 작은 나라가 연호를 쓰는 것은 부당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1145년에 쓰였고 보물 722호다. 삼국유사는 1285년에 쓰였고 국보 306호다. 제왕운기는 1287년에 쓰였고 보물895호다.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새로운 형식의 시로써 현대시의 출발점이 된 시이다. 고정된 정형시의 운율에서 탈피하였다.
신체시가 무언지도 모르고 외우기만 했다. 新體詩! 한문을 알았다면 단숨에 이해했을텐데…..
우리 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주장하는 일제 식민사관의 역사 왜곡에 맞서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역사발전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역사연구가 이루어졌다.
박은식의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샌채호의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정인보와 문일평 등의 민족주의 사학의 계승과 발전
이병도와 손진태 등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한다는 실증사학 등의 학풍이 있었다. 이들의 역사 연구는 모두 일제식민 사학을 비판하고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려했다.
최남선과 이광수의 문학은 개화기 문학을 이어받아 계몽적 성격을 탈피하지 못하였는데 김동인 염상섭 현진건 등은 인간 본능과 사회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문예활동을 전개하였다.
문학이 드디어 목적성을 띤 계몽수단을 넘어 순수예술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노천명은 일제말 일본군에 입대하라는 친일시를 썼고,
1919년 2.8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이광수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로 활동했지만 1939년 친일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을 맡는 등의 친일행동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암울한 시기에 살기위해 지조를 꺽고 일제에 협조하는 글을 쓴 문인들이 누구인가 교과서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 목숨이 하나인 까닭에 평생 지조를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편적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고 인생 전체를 놓고 진중한 판정을 해야하는 것 아닌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인촌 김성수에 대하여도 다루고 있다. 1940년 동아일보를 일제가 폐간시키자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광복 때까지 숨어지낸다.
그는 창씨개명도 거절하였고, 일제가 주는 작위도 거절하였다.
보성전문학교 교장이었던 김성수는 학생들이 창씨개병 거부와 학도병 징집거부가 이어지자 학생들에게 자신이 믿는 바 대로 행동하라며 학생들의 창씨개명 거부와 징집거부를 방관하였다.
1943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김성수 명의로 징병에 찬성하는 글이 실렸는데
이 글은 매일신보 김병규기자가 김성수의 명의를 도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라고 김성수의 친일관련 내용을 중립에서 벗어난 약간 김성수 옹호 쪽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부분을 문제삼은 사람들이 많고 친일교과서라고 배척하는 것이다. 아! 지금의 논리로 일제강점기를 흑백논리로 재는 것이 과연 맞는가?
이 역시 그 사람이 평생에 걸쳐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가를 봐야하는것 아닌가? 저자는 5000년 역사를 서술하면서 김성수를 책에 넣어 왜 이런지엽적인 문제로 분란의 소지를 주었는지 모르겠다.
광복직후 미군정은 일본인 관료들을 대체할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여 치안공백이 우려되자 총독부에 근무하던 관료와 경찰을 그대로 재고용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8년 9월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제정하고 실행하려 했지만 경찰은 치안유지와 공산세력 저지의 공을 주장하며 반발하였다.
저자는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세력 소탕에 경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반민족행위자 처벌 문제를 강력히 추진하지 못했다고 이승만의 과오를 지적하고 있다.
이것이 두고두고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과오로 남은 것이다.
그러나 책에서는 이승만의 공은 누락하고 있다.
6.25북한의 남침 때 미군사고문단 500명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하면서 미군의 파병을 요구했던 배짱은 누구도 흉내낼수 없으며
반공포로를 과감하게 석방한 일도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통일을 누구보다도 바랐으며 결코 휴전협정에 도장찍지 않았다.
미군 36
000명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너무커 발을 빼기 위해 서둘러 휴전하려는 미국을 거의 협박하다시피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것도 이승만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군사적 안정의 토대가 있었기에 외국이 남한을 믿고 투자한 것이다. 그러한 군사적 안정의 바탕위에 2012년 수출5479억불로 세계 7위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인도, 브라질, 캐나다 등의 큰 나라도 모두 수출실적이 대한민국보다 아래다. 이건 기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자원이있나 나라가 크기를 한가!
백범도 훌륭한 독립의 지도자이며 투사이다. 암살당해 그의 인생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그러나 김구에 비하여 이승만은 너무 저평가 되어있다.
내 생각에 박정희의 단속도 한목했으리라 하와이 망명지에서 조국에서 죽고 싶다고 병든 몸으로 여러번 탄원했으나 끝내 박정희는 허가하지 않았다. 죽은 몸으로 입국했으며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혔다.
통일을 원하지 않는 지도자가 어디 있겠는가? 5.10총선거를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하겠다고 북으로 간 김구의 충정을 모르는바 아니며 폄하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이미 북한은 김일성에 의한 정부가 수립되어있었고 남한은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당의 활개로 나라는 혼란했다. 그 때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지 않았다면 남한은 벌써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그런 국제적인 정치감각을 갖고 있었다. 공산당과 대화해봐야 소득이 없다는 것은 오늘날 북한 핵문제를 위한 6자회담만 봐도 알수 있지 않은가?
맨날 질질끌고 알맹이 없는 회담만 하는 가운데 핵실험을 계속되고 북은 이미 핵을 완성하였다. 미국은 질질 끌려다니기만 하는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시절 차라리 클린턴 생각대로 원자탄 생산시설을 폭격했더라면 좋았지 않았을까? 답답하기만 하다.
김구의 주장대로 5.10총선거를 실시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북한은 이미 김일성 정권이 사실상 세워졌는데 남한은 정부도 수립하지 못하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면
과연 오늘날의 남한 정부가 자리를 잡았을까? 생각해본다. 이승만은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가 있었기에 민족사의 정통성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승만이 친미라고? 친일이라고? 모르는 소리다. 미국도 제거할려고 했던 상대가 이승만이고,
6.25 후에 떠나려던 미국에게 휴전회담에 서명도 안하면서 까지 미국이 발을 빼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도 체결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얻어낸 것이다.
사실 우리가 미국이 위태로울 때 도와줄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말이 상호방위조약이지 상호가 아닌 일방적 방위조약이나 다름없다.
아마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없었다면 김일성이 다시 제 2의 6.25남침전쟁을 일으켰을 것은 자명하다.
이 참에 1990년대 중반에 소련 비밀외교문서의 공개로 스탈린과 모택동의 협조로 김일성이 6.25남침전쟁을 일으킨 것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는데도
아직도 6.25는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세력이 남한에 있는것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이런 내용은 교과서에 없는지 모르겠다.
이승만이 친일이라고? 모르는 소리다.
이승만은 일본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죽는 날까지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탄적이 없다. 일본땅을 밟는 것도 스스로 허락하지 못한 것이다.
타자치기도 힘들다…..ㅠㅠ~
오늘은 그만 써야겠다. 이제 좌파성향 교과서로 이름난 금성출판사간 한국사 교과서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