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려는 영채를 잘못이라고 비판하는 대목은 아주 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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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李光洙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한국의 소설가이자 시인·문학평론가, 언론인이었으며, 사상인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였으며 일제 강점기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기도 했었다.

일본에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로 탈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간으로 활동했다.

1921년 단신으로 상하이에서 귀국, 선천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난 뒤에는 변절자로 비난받았다.

언론인으로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안창호, 윤치호, 김성수 등의 감화를 받아 민족 개조론과 실력 양성론을 제창하였으며,

안창호를 도와 흥사단 국내 조직과 수양동우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해방 이후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주관하였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되었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이광수의 ‘사랑”에 비하여 무정의 문학적 가치는 다소 낮다.

사랑은(1938)에 출간되었으니 무정(1917년)보다 21년 후에 쓰여진 것으로  내용구성면에서 한결 낫다.

그가 후반부 인생에 친일을 한것은 정말 아쉽다. 그리고 그가 6.25때 납북된 것은 더욱 아쉽다.

 

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을 읽었다.

쉴새없이 밀려드는 일 때문에 여러날에 걸쳐 읽었다. 집수리, 어머니 심장수술 등 많은 일이 있었다.

무정은 근대소설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유명한 소설이다.

호가 春園이라면 봄의 정원이라는 뜻인데…요즈음 계절에 딱 맞는 이름이구나! 생각해보니 아름다운 호다.

 

소설을 읽으면서 특별하게 몇 군데 인상깊은 곳을 원문 그대로 옮겨본다.

 

그러면 자네는 아내될 사람이 아무것을 배우든지 자네는 상관하지 않는단 말인가?

물론이지 저 라는 것이 있으니까 누구든지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권리가 있으니까

남의 힘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저를 좌우하겠나 남더러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하고 충고하거나 알려 주는 것은 좋지많은

내가 이렇게 생각하니 너는 이렇게 해라 하는 것은 참람한 일이지

 

1917년이면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이다. 그 시절에 위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은 대단히 계몽적이고 혁명적인 발상이다.

읽으면서 춘원은 계몽적 성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연히 연결되는 사건이 많았다. 충분한 복선이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100년 전의 소설이라는 생각으로 넘어갔다. 책의 말미도 다분히 계몽적으로 끝나고 있다. 큰 소득은 없었으나 한번 꼭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할머니는 젊었을 적에 재미가 많았어요?

노파는 빙그레 웃으며 아, 젊었을 적에야 날마다 기쁘기만 했지요 이따금 울기도 했지만 젊었을 때 우는 것은 늙어서 웃는 것보다도 낙이라오!

재미있는 표현이다. 정말 그런가? ㅎㅎㅎ~

 

여성에 대한  표현도 아주 세밀하고 재미있다.

형식은 생각하기를 자기의 일생에 그렇게 미묘하고 자릿자릿한 쾌미를 깨닫기는 처음이라 하였다.

그 어린 기생의 눈으로서는 알 수 없는 광선을 발하여 사람의 정신을 황홀하게 하고

그 살에서는 알 수 없는 미묘한 분자가 뛰어나와 사람의 근육을 자릿자릿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소설에서 주인공 형석이 자살하려는 영채를 잘못이라고 비판하는 대목은 아주 명문이다.

사람의 생명의 발현은 다종다양하니,  혹 충도 되고  효도되고 정절도 되고 기타 무수 무한한 인사현상이 되는 것이다. 그 중에 물론 민족을 따라 혹은 국정을 따르고 혹은 시대를 따라 필요성이 무수 무궁한 인사 현상 중에서 특종한것 한개나 또는 수개를 취하여 만반 인사 행위의 중심을 삼으니 소위 도덕이요, 법이요,  율이다. 무릇 사회적 생활을 완성하려면 그 사회의 각원이 그 사회의 도덕 법률을 권권 복응함이 마땅하되 그러나 결코 이는 생명의 전체는 아니다. 생명은 하여한 도덕 법률보다 위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절대요 도덕 법률은 상대니 생명은 하여한 생명보다도 위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무수히 현시의 그것과 상이한 도덕과 법률을 조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절이 깨어짐에 의하여 목숨을 버리려 함은 효와 정절이라는 일도덕률을 인생인 여자의 생명 전체로 오인한 것이다. 효와 정절이 현시에 있어서는 여자의 중심되는 덕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여자인 인생의 생명의 소산이요 일부분이라 하였다. 효와 정절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부분은 전체보다 작고 생명에는 백천무수의 의무가 있다. 그의 생명에는 아직도 충도 있고 세계에 대한 의무도 있고 동물에 대한 의무도 있고 산천이나 성신에 대한 의무도 있고 하느님이나 부처님에 대한 의무도 있다. 이렇게 무수한 의무를 가진 귀중한 생명을 두가지 즉 효와 정절을 이유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것은 결코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의 생명은 우주의 생명과 같다. 우주가 만물을 포용하는 모양으로 인생도 만물을 포용한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은 결코 일의무나 일도덕률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인생의 만반 의무와 우주에 대한 만반 의무를 존재하는 것다. 그러므로 총이나 효나 정절 명예 등을 포용하는것이 마치 대우주의 생명이 북극성이나 백랑성이나 태양에 있음이 아니요 실로 대우주의 생명이 북극성과 백랑성과 태양과 기타 큰별, 잔별과 지상의 모든 미물까지도 포용함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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