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보려고 해도 왠일인지 손에 잡지 못했던 삼국유사를 읽었다.
읽으면서 왜 사람들이 삼국유사를 꼭 읽으라고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서양에 그리스로마 신화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삼국유사가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우리문화의 중요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존감을 가질 수 있었다.
원전은 한문이어서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고 [불국정토의 입장에서 본 삼국유사도 읽기 어려웠다.
하여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를 읽었는데 360쪽의 해설을 곁들인 장편이었다. 해설까지 있어 읽기 좋았다.
다만 일부에서 저자의 편협한 해설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신라 박제상에 대한 부분이다.
신라 눌지왕 10년(426년)에 왕이 잔치를 베풀고 있던 중 눈물을 흘리며 신하들에게 왜놈들에게 볼모로 끌려간 아우 미해와 고구려에 끌려간 아우 보해를 구해오라고 하였다.
이에 만고충신 박제상이 나선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들어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보해를 구해온다. 눌지왕은 보해를 보자 일본에 끌려간 미해 생각에 더욱 슬피운다.
이를 보고 박제상은 두 번 절하고 집에도 들리지 않고 길을 떠나 율포바닷가에 이르렀다. 제상의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으나 박제상을 실은 배는 떠났다.
일본에 가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미해를 탈출시킨다.
미해가 함께 가자고 했으나 같이 떠난다면 왜놈들이 알고 쫒아올 것입니다. 신은 이곳에 남아 추격을 막겠습니다. 미해가 어찌 나혼자만 간단말이요 라고 말하자
박제상은 신이 공의 목숨을 구하여 눌지대왕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미해가 완전히 탈출한 뒤 왜왕에게 잡혀간 박제상에게 왜왕이 네가 왜국의 신하가 된다면 녹을 후히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박제상은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 지언정 왜국의 벼슬은 받지 않을 것이요!
왜왕이 노하여 박제상의 발바닥 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서 그 위를 걷게 하였다.
왜왕이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의 신하인가? 나는 계림의 신하요! 왜왕이 쇠를 달구어 그 위에 박제상을 세워놓고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의 신하인가? 나는 계림의 신하요! 왜왕이 박제상을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불에 태워죽였다.
이대목에서 저자 김봉주는 박제상을 다음과 같이 폄하하고 있다. 박제상이 두 왕자를 탈출시킨 이후 신라와 왜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엄밀히 보면 박제상은 전쟁을 막는데 공헌한것도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는데 공헌한 것도 아니며 단순히 왕 개인에게 혈육을 찾아준것에 불과하다.
사회전체에 공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박제상은 신라이후 어느 왕조에서나 충신으로 강조되었지만 사실 그는 지배자의 입맛에만 맞는 사람이다.
전제왕조의 입장에서는 가장 내세우고싶은 사람이겠지만 피지배자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왕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국가 전체적으로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왔다면 그를 위인으로 부르고 존경하는 것은 망설여진다.
저자의 이런 대목이 나를 실망시켰다. 과연 이것이 글쟁이가 할 말인지 의심스럽다. 역사적 안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당장의 백성 안위만 중요한가? 민족의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 저런 정신이 있었기에 군왕에 대한 충성이 이어졌고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를 지키려는 민초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힘을 보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의병들이 증명하고 있다. 대저 나라를 잃은 백성이 얼마나 핍박을 받았는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보면 당잘 알수 있다.
그리고 임금 개인을 위한 충성이지 백성들에게는 고생만 시켰다고 하는데
1500년 전의 사실을 지금의 윤리적 잣대로 재서 해석하는 것이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의 책임있는 글발인지 묻고 싶다.
아주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박제상을 파견했으니 이는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말하지 그랬나?
박제상은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만고의 충신이다. 신라에 박제상이 있다면 조선 병자호란 때의 김상헌이 있다.
김상헌은 심양에 끌려가 청태종이 수시로 감옥에서 불러내 나의 신하가 되면 풀어주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고 꼬였지만
그 때마다 김상헌은 더러운 소리 듣기 싫다. 어서 빨리 내목을 쳐라라고 결기를 보였다.
지금생각해도 보석처럼 빛나는 나라사랑의 정신이다. 이와 같은 결기가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정신적 지주로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당장은 백성을 힘들게 하는 것 같지만 그런 정신을 보고 만백성이 애국의 불씨를 피우는 것이다.
당시에는 성리학적 전통으로 임금에 대한 충성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국가와 민족을 빛내는 정신으로 보아야한다.
역사에서 비굴함만 가지고 살아남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강인함과 비굴함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민족의 물결과 역사는 도도히 흘러가는 것이다.
인터넷에 보니 다음과 같은 잡글이 있다.
3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 정말 답도 없고 세계정세 뒤떨어진 무뇌충들…….이런 주전파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고통을 당했는가!
병자호란으로 삼학사는 청나라로 끌려가게되고 청나라황제 홍타이지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주전의 대의를 끝까지 밝히다가 모두 선양성 서문 밖에서 처형당하였다.
민중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고집하던 수구꼴통들이다.
이게 말인가? 글인가?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의 저자 김봉주가 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삼국유사(三國遺事:1281)에서 유사(遺事)란 남겨진 이야기라는 뜻으로
삼국시대에 일어났던 일 중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남은 사실들을 적은 책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 기록되지 않은 일이란 1145년 고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삼국시대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서 빠진 일들을 말한다.
김부식은 유교적사대주의와 신라정통론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기록에서 누락시켰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스님은 중국에서 나라가 생겨날 때는 여러 가지 신비한 일들이 발생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삼국 시조의 신비로운 탄생과정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며 기록하였다.
유교적 합리주의에 근거해 삼국의 신령하고도 기이한 이야기를 모두 믿지못할 것으로 보고 역사에서 제외한 김부식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중국과 다를것이 무엇이냐는 저 당당한 일연스님의 이야기는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갖고 있던 자주적 역사관을 뚜렷이 보여준다.
신라는 23대 법흥왕이 처음 연호를 만들어 사용하고 진흥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까지 모두 독자적인 연호를 정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진덕여왕 4년인 650년 여름에 왕이 태평송이란 노래를 지어 당나라 황제에게 올리고 이때부터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김부식은 천자의 나라에 속한 작은 나라는 사사로이 연호를 지어쓸 수 없는 것이다.
신라는 한뜻으로 중국을 섬기고 조공을 계속하면서도 법흥왕이 스스로 연호를 썼으니 의심스럽다.
그 뒤에서 그릇된 대로 여러해가 지났으며 태종의 꾸지람을 듯고서도 오히려 주저하다가
이제 당나라의 연호를 받들어 행하니 비록 부득이하게 시작하였으나 허물을 고쳤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제5 진덕왕
이런 점에서 보면 삼국유사는 단순히 삼국사기에 누락된 내용을 보충하는 것을 넘어
삼국사기의 사대주의적 역사관에 이의를 제기하고 우리 역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그 결과 삼국사기의 중국 중심주의와는 구별되는 자주의식이 분명한 책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오늘날 삼국사기는 보물이고 삼국유사는 국보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삼국사기는 기원전57년 신라의 건국을 첫머리에 두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단군조선부터 시작한다. 여기서도 일연스님의 자주적 태도를 볼 수 있다.
고려 충렬왕 13년(1287)에 이승휴(1224∼1300)가 쓴 역사시(歷史詩)에도 단군신화가 나와있지만
단군신화를 처음 언급한 책이 바로 삼국유사이다.
이런 점에서 삼국유사는 얼마나 소중하고 다행스러운 기록인지 알 수 있다.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단군신화는 없었다.
<참고자료>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7년(1281)경에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사서(史書)이며 목판본이다. 국보 306호로 지정되어있다.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과는 별도로 왕력(王歷)·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서술하였다.
흥법편은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내용, 탑상편은 탑과 불상에 관한 내용, 의해편은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한 내용,
신주편은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神異僧)들에 대한 내용, 감통편은 신앙의 영이감응(靈異感應)에 관한 내용,
피은편은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효선편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등을 각각 수록하였다.
삼국유사는 한국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보고로 평가되고 있다.
그 특징을 보면 첫째, 역사·불교·설화 등에 관한 서적과 문집류, 고기(古記)·사지(寺誌)·비갈(碑喝) 등
지금은 전하지 않는 문헌들이 많이 인용되었기에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둘째, 차자표기(借字表記)로 된 자료인 향가, 서기체(誓記體)의 기록, 이두로 된 비문류, 전적에 전하는 지명 및 인명의 표기 등은 한국고대어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되며
14수의 향가는 우리나라 고대문학연구의 값진 자료이다. 세째, 한국고대미술의 주류인 불교미술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이다.
기사는 탑·불상·사원건축 등에 그리고 역사고고학의 대상이 되는 유물·유적, 특히 불교의 유물·유적을 조사·연구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문헌으로 꼽힌다.
네째, 풍류도(風流道)를 수행하던 화랑과 낭도들에 관한 자료를 상당히 전해주고 있다.
중 일연이 쓴 삼국유사 국보306호 이다. 원전은 위와같이 한문으로 쓰여져 내가 읽기 어려웠다.
고려대 교수가 쓴 불국정토을 이루었던 삼국유사를 샀는데 역시 읽기 어려웠다. 아니 재미가 없었다.
하여 학교 도서실에서 해설을 곁들인 고등학교 교사 김봉주가 쓴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를 읽었다.
김봉주선생님은 나름대로 좋은 책을 썼다. 하나 몇군데는 내가 찬성하기 어려운 해설을 덧붙여 놓아 동의하기 어려웠고
학생들의 나라사랑의 건전한 가치관 정립에 해가 되는 내용이 있었다.
수원역로터리에 있는 커피숍 파스쿠치에서 읽었다. ^-^
까페라테를 시켰는데 칼로리가 많아보였다. 다음에는 먹던대로 아메리카노를 시켜야겠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