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야기♠ 길을 가는 필부필녀에게 물어보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통령이 자연인의 신분으로서 헌법재판소에 기본권이 침해당했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에 대한 헌법재판소에 보내는 답변서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며 행정부의 수반인 헌법기관이기 때문에 자연인으로서의 헌법소원을 낼 자격이 없다고 답변하였다. 헌법소원자체가 기각되어야한다고 하였다.

 

운동경기에서 심판의 판정에 불만이 있더라도 계속 불복하면 당연히 퇴장감이다. 설사 오심이었다 해도 일단 경기가 진행되면 번복할 수 없다. 심판의 권위를 부정하면 경기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경기도중 사사건건 심판을 불러 이렇게 해도 되냐고 묻고 경기에 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선수라면 당연히 경기의 룰을 숙지하고 경기에 임해야 한다. 동네축구에서도 마찬가지이며, 국가대표선수인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노대통령의 헌법소원에 대한 선관위 의견서에서도 나와 있듯이 대통령은 사적, 공적 영역을 구분할 수 없는 살아있는 헌법기관이다. 그 행위에 대한 법적 판단은 헌법이 정한 사법기관의 고유권한에 속한다. 경기규칙이 마음에 안 든다고 대통령이 자꾸 심판을 흔들어 대는 것은 법치주의와 권력분립의 정신을 훼손할 소지가 크다. 노대통령의 자중을 거듭 촉구한다. (이상은 오늘 경향신문사설, 동아 e-TV의 내용에서 발췌하고 조금 첨가한 것이다.)


 


 


(대통령에게 바란다 : 선거에 있어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은 간단한 의미이다. 너무 깊게 생각하신 것은 아닌지? 해석이 명확한 것을 자꾸 따지시니 보기에 딱하다. 길을 가는 필부필녀에게 물어봐도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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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미운 오리 소리

 


 


  내심 실패를 바랬다.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고자 한 평창군민과 강원도민, 한국국민들의 뜨거운 염원


 


과 부푼 기대가 세상을 뒤덮고 있었지만, 유치 실패를 바랬다. 그리고 다행스


 


럽게도 유치 실패가 현실이 되어 내심 기뻤다. 유치단과 평창군민들이 눈물을


 


흘릴 때 나는 쾌재를 불렀다.


 


왜 동계올림픽 유치가 안 되길 바랐냐면,


 


동계올림픽 신규경기장 증설로 산하가 짤려나가고 파괴될 것은 불보듯 하다.


우리나라의 마지막 청정지역인 강원도가 속살을 드러내고 파괴되어가는 모습


 


을 보기 싫기 때문이다. 왜 지도자가 되면 한건 하기 위해 환경을 파괴하는지


 


모르겠다. 도로가 뚤리고 시간거리가 단축되고, 인터넷이 발달했다고 우리가


 


행복해졌는가? 나는 내 어린 시절이 소를 끌고 들판에서 풀을 먹여야 했던 여


 


름날의 지루함만 조금 줄인다면 나머지는 지금보다 행복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도룡룡 서식지 파괴를 막기 위해 40일 이상 단식하며 도로개통을 반대한


 


한 스님의 행동에 공감을 보냈다.


 


나는 오래전부터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에 소속되어 환경운동을 했다.


현재 환경단체활동은 거의 하고 있지 않지만 교단에서 수업을 할 때는 학생들에게 정말 열심히 환경교육을 했다. 나는 환경운동연합 최열씨와 아무런 교분도 없지만 어제 뉴스에서 정치판에 뛰어든 것을 보고 무척 실망하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우려하였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청정지역을 찾아내어 어떻게 보전할것인가 고민하였다. 청정지역을 발견하고 그 곳에 탐사기록을 남겼지만 몇 달 후에 가보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된 것을 보고 학생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오염현장도 찾아가 원인을 탐색하고, 대책을 세우기도 하였지만 나의 환경교육은 주로 오염지역보다는 청정지역을 찾는 일에 비중을 두었다. 특별하게 환경의 중요성을 가르치지 않아도 청정한 지역을 찾아 보여주면 학생들이 자연스레 환경애호가로 변하였다 


 


나에게 돈이 많이 있다면 일정한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여 개발하지 않고 청정한 생태계를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10만평 정도의 임야를 살 수 있으면 가능한일이다.


 


 


< 대부도에 근무하던 시절 학생들과 환경탐사활동을 하고나서 간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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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으시대지마라!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1987년 6월 29일 이른바 6.29선언이 발표되었다.




내용의 골자는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는 방법 대신 국민직선제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사실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정권은 7년 내내 정권의 정당성 시비에 시달렸다. 그리고 전두환정권 말 대통령국민직선제 개헌 요구가 한창이던 1987년 4월에 4.13호헌조치라는 것을 발표하여 헌법을 개정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당시 고등학교에 근무하던 필자도 호헌의 정당성에 대하여 주민을 계도하라는 공문이 있었지만 실제로 주민을 계도한 사람도 없었고, 하려고 마음먹은 교사도 없었다. 하여튼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는 계속되었고, 6월 9일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이한열군 사망이 있었다.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이한열 군은 호헌철폐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 했다가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다음날인 6월 10일 여당은 노태우를 대통령후보로 선출했다. 7년 임기의 대통령을 다시 체육관에서 뽑겠다는 것이다. 7년이면 4년짜리 대통령을 두 번하겠다는 것이다. 박대통령 시절에는 4년이었으니까! 전두환은 7년을 했다.




바로 이날(6월10일) 시작된 6월 민주항쟁에는 전국에서 연인원 500여 만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혼란 정국을 수습해야 했던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 후보의 이름으로 ‘6·29민주화선언’이란 승부수를 던졌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을 보장한 대통령 선거법 개정을 내걸었다.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한 것이다.




6월28일 오후 6시쯤


학교에서 퇴근하여 버스에서 내린 나는 수원역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보았다. 6월 내내 수원역에서는 시위가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의 시위 규모는 대단했고, 나는 그 현장을 보고, 이미 이 정권은 정당성을 잃었으며 민의에 굴복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현장을 보고 있던 나는 집에 가서 아들을 데리고 거리로 나섰다. 만 3세였던 아산이를 목에 태우고 시위대를 따라갔다. 가는 길에 주인수건축사무소 소장을 만났다. 주소장은 내가 아끼는 동네의 후학이다. 나 보다 한 살어린 주소장은 어린시절부터 옆집에 살면서 우정을 키운 사이다. (지금도 만나면 나에게 꼭 형님 형님하면서 따른다. 나도 주소장님이라고 부른다.) 아니 형님 어디가십니까? 응, 이 정권은 이미 기울었어, 민주화 역사의 현장을 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가네! 주소장은 어린아이를 목에 태우고 최루탄 냄새가 자욱한 도로를 따라가는 나를 어이없어 했다.




주소장과 헤어지고 나서 수원소방서를 지날 즈음 경찰병력이 최루탄을 쏘면서 시위대를 덥쳤다. 나는 아산이를 감싸안고 잽싸게 아무 집에나 들어갔다. 마침 대문이 열려있는 가정집이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 집에서 한참을 지난 다음에 밖을 살펴보니 추척하던 경찰이 없어진 것 같아서 동네 골목길로 돌아서 집으로 걸어왔다.




6월10일을 민주화항쟁기념일로 정했다 한다.


일제하 3.1 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학생들이 벌였던 6.10만세운동을 이어받은 것이라면 모르되, 1987년 6월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면 나는 이것에 동의할 수 없다.




박정희 독재는 무서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박정희대통령 시대에 교육받은 내가 어떻게 자유의식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초, 중학교를 거치면서 막연하게나마 자유와 평등이 소중한 가치이며, 언론의 자유가 중요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우리나라 헌법의 중요한 두 축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유물론이 어떠한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물질이 아닌 정신이라는 생각을 분명히 갖게되었다.


 


박정희대통령이 유신헌법 개정안을 발표하던 날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그날 나는 서울역에 있었다. 석간신문을 사서 그 자리에서 개정헙법안의 모든 내용을 읽었다. 유신헌법은 매우 잘못된 법이라는 판단을 했다. 서울역 주변의 사람들이 개정헌법안이 발표된날 신문을 보지 않고, 다른 날과 변함없이 평안히 길을 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하긴 지금도 전철 안에서 조간신문을 읽을 아침 출근시간에 너나 할것없이 스포츠 신문을 들고있는 사람들을 보면 공연히 화가난다.


 


나는 어려서부터 정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나보다.   고등학교 시절 교련교육을 받았는데, 수업이 끝날 때 멸공구호를 주먹을 들고 합창한다.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 4가지 구호 중에서 마지막 이룩하자 유신과업은 입밖으로 소리내지 않았다. 군에 입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1학년 때 동아일보 광고탄압사태가 일어났다. 동아일보 광고란이 공란으로 발간되었다. 나는 자발적으로 모금운동을 하러 다녔다. 기업은 무명으로 광고내용 없이 광고란에 네모칸만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때 위험을 무릅쓰고 실명광고을 내는 기업이 있었다. 부광약품이다. 나는 지금도 그 회사 사장이 누군지 모르지만 용기있는 기업인이다. 나는 지금도 부광약품에서 생산하는 물건을 산다. 블랜닥스 치약으로 유명하다.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해서는 개인적으로 자유에 대한 갈망이 포화상태에 있었다. 당시는 박정희 독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때였다. 유신헌법으로 집권연장하더니 그 유신헌법으로 두번째 체육관선거를 통해 당선되었을 때였다. 그 때 새벽에 혼자 대학에 가서 벽에 글을 붙였는데 내용은 대체로 국민에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가 라는 것이었고, 유신정권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있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내가 부르는대로 당시 여고에 다니던 여동생이 썼다. 정말 나는 영원한 자유인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음성적인 반정부 학생운동이 어떠한 벌을 받았는지 생각해보면 나의 행동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나 혼자 한 일이었으며 이것은 인간의 천부인권인 자유에의 열망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나에게 가르쳐 준것은 바로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시대의 교육이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생각해보니 반공교육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자유와 민주주의의, 인권의 가치를 교육하게되었던것 같다.


 


장황하게 나열하다 보니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말하는것 같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수 있겠다. 나는 그런 뜻이 아니고 그저 한 젊은이로서, 민초로서, 가만히 침묵할 수는 없었다는 의미다. 무슨 일을 했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박정희 독재는 정말 무서웠다.


그 때는 감히 시위할 생각을 못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끌려가는 세상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는 박정희독재에 비하면 구우일모, 창해일속, 조족지혈이었다. 박정희독재에 항거하려면 목숨을 걸어야했다. 박정희독재에 맞서서 싸운 사람들이 진짜 민주화 인사들이라고 감히 나는 단언한다. 누구일까? 김영삼, 김대중, 함석헌, 이런 정도의 사람들이다.(이 사람들의 노선에 대하여 나 개인적으로 다 동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중에 내 생각과 다른 사람도 있다.) 나머지는 민주화 투쟁인사 대열에 넣고 싶지 않다. 전두환 군사정권하에서는 개나 소나 다 데모하고 시위했다.




6.10 민주항쟁기념일이라고?


볼썽사납다. 


일하고 나서 했다고 나대거라!


한일도 없으면서 나서기는……


 


 


민주화투쟁을 했다고 말하려면 적어도 자유와 민주주의에 목숨을 걸었어야지,


어린 아들 목마 태우고 시위대에 참가했던 맹기호는 감히 민주화투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었던 사람이다.  




박정희독재에는 무서워서 말 한마디 못했으면서 박정희 죽고나니까 갑자기 민주투사가 이곳 저곳에서 막 나오는데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나는 박정희의 경제개발 공을 인정한다. 오죽 백성의 배고품을 해결하고 싶었으면 “잘살아보세” 노래를 대통령이 직접 작사 작곡 했을까! 우리 역사상 어느 지도자가 백성이 굶는것을 이토록 진정으로 가슴아파한 사람이 있었는가?  새마을노래도 직접 작사작곡했는데 그 가사를 생각하면 기가막히다. 새벽종이 울리는 소리들 듣고 새로운 마음으로 아름답게 우리마을을 가꾸자는 것이다.


 


그러나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억눌린 자유가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는 내가 피부로 절절하게 느꼈다. 박정희는 공이 큰 만큼 과실도 크다. 그 시대의 논리로 봐도 국민이 감내하기에는 버거운 사람이었다.






오늘 내가 조금 흥분한 것 같다.


그러나 1987년 6월에 투쟁했다는 사람들,


특히 386세대 어쩌구 하며 으시대는 사람들은 조심하고 겸손할지어다.


노찾사 노래를 들으면 코웃음이 난다. 그런 노래부른 시절은 저항도 아니었다. 놀이였지!


그대들은 별로 한일 없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이런 말 들어보기나했는가?


 


 (1980년 봄에 내가 직접 함석헌옹의 집을 찾아가서 1:1로 정치담화를 나눈적이 있다. 당시 내나이 20대 중반의 젊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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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이 노래가 너무 좋다


 


SG워너비 의 노래 ‘살다가’


 


요즈음 젊은이가 이런 노래도 부르나?


사실은 몇년 전에 나온 노래인데


내가 무심했었나? 아니면 느낌의 폭이 오그라들었나……


세상에! 요즈음에 이런 노래가 있다니……


이 노래가 너무 좋다!


계속 들었더니 이들의 아름다운 서정에 눈물이 난다……


 


「SG Wanna BE – 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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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금연 6주년의 이익



금연나라 라고 불리우는 싸이트가 있다. 내가 자주 들어갔던 곳인데


몇년동안 잊고 있다가 오늘 들어가보았더니 옛날 생각이 난다.


그리고 금연에 새롬게 도전하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남겻다 여기에 복사해 올린다.


 


20일만 있으면 금연 6주년이되는 사람입니다.
금연 6주년의 이익!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겠습니다.


고백하자면 금연 3주년 되는날 아내가 사무실로 3주년 축하 축전을 보냈더라구요 그날 저도 기뻐서 식구들을 데리고 회식을 했습니다. 회식하는 자리에서 식당주인에게 담배한개피를 달라고 했어요 기념으로 피워본다고!아내와 아이들이 말렸지만 저는 불을 붙였고…..세상에!처음 두모금 정도는 머리가 핑돌더니 그 다음부터는 아무렇지도 않고,그렇게 맛잇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식구들 몰래 1년을 피우는데 죽을뻔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금연을 시작하여 지금 6주년이 된것입니다. 두번을 합하면 9주년이군요! 



 


1. 소화제를 끊었습니다.



 


늘 속이 더부룩하고 쓰리고 트림이 나와서 평생소화제를 먹었고, 활명수 무척 먹었어요. 주머니에 훼스탈하고 활명수 항상 넣고 다녔구요.여행을 갈라치면 가방에 소화제 천지였어요.  베스타제, 위청수, 베아제도 있지요 저는 언젠가는 위암에 걸려 죽을것이라는 두려움이 항상있었어요. 위 내시경 여러번 햇습니다. 의사선생님이 담배를 끊으면 소화는 저절로 될것이라고했는데(담배를 피면 위가 망가진다는 것은 이미 스타디가 끝난이론이라고 말했어요 의사의 말을 그대로  적었습니다. 연구가 이미 끝난 이론이라는 말이지요) 정말이지 금연 이후 저는 소화제 한번도 먹지않았어요



 


바나나, 고구마, 과자, 수제비, 칼국수, 커피, 떡, 빵 등은 먹기만 하면 생목이올라오고, 체했는데 지금은 얼마든지 먹습니다. 그리고 술도 잘먹어요 ㅎㅎㅎ 절제합니다. 소주반병이상 먹지않아요



 


2. 이가 튼튼해집니다.



 


풍치에 시달렸어요 가을바람만 불어도 이가 시리기시작했지요 충치는 정말로 고질병입니다. 그런데 금연이후 풍치가 저절로 낫어요. 정말로 신기합니다. 이가 강력해졌어요!



 


3. 피부가 젊어집니다.



 


얼굴색이 희게 변하고 뽀얗게 됩니다.
검은얼굴이 환해지니 모두 젊어졌다고 말합니다.



 


 


4. 입냄새가 없어졌습니다.



 


어느날 사무실에서 처녀직원이 제 앞을 지나다가 손으로 코를 막는것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하필 제가 담배 피운 직후에 가까이서 지나치게되었지요. 왜 금방담배피운 입냄새 있잖아요? 그후 담배피우고 나서 껌을 씹기도 하고, 은단을 먹기도 했는데요 아가씨들이 또 은단냄새를 싫어합니다. 내앞에서 코막은 그 사건 잊혀지지 않아요. 지금은 어떠냐구요 제 입에서 절대 냄새나지 않아요!



 


5. 금연 이후 자녀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합니다.



 


두 아들은 아빠가 힘들게 담배끝는 모습을 보더니 절대로 담배 피우지 않겠다고 합니다. 말이 필요없어요. 금연을 보여주는것이 제일 좋은 금연 교육입니다.

이제 저는 담배의 욕망에서 벗어낫습니다.
그러나 제가 죽을병에 걸려서 한달밖에 살지 못한다면
담배를 다시 피울겁니다. 제 기억에 담배는 정말 맛있거든요.
그러나 지금은 절대 피우지 않습니다. 금연은 이익이 훨씬 크구요.
그리고 꼭 피우고 싶은 마음은 이제 없어졌거든요.
만약 지금 담배 한대를 피운다면? 금연 6주년도 믿을 수 없습니다. 무너집니다. 그래서 절대 피우지 않습니다.

마지막 한마디!
저는 하루 하루를 모아서 6년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제일 힘든것은 금연 첫날이었습니다.
하루를 참기가 그렇게 힘들더라구요 그런데 그 하루을 참으니 할수 있을것 같았어요…….



  다음에 생각나면 또 올릴게요…..  모두 힘내셔요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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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아침에

오늘 그가 찾아왔다.

아침 7시 55분

그가 왔다……

여러 날 만에 날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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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화두




 


요즈음


 


내 생각의 중심은  精神 이다.


 


머리 속에서 늘 정신을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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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공부

오늘 여러가지로 바쁘게 다녔다.


 


만난 사람도 많다.


 


그 중에 제일 반갑게 만난 사람은 수원제일중학교 김영선 선생이다.


여러번 마음 먹다가 오늘 시간을 내어 실행에 옮겼다.


 


김영선 선생은


내가 가르친 제자인데 지금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다음에 만나면 정확한 나이를 물어야겠다.


 


수원제일중학교에 도착하여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을 만나 차를 마셨다.


 


김영선 선생이 수업을 마치고 나왔다.


 


이영관 교감선생님이 교무실에서


나와 김영선 선생을 가리키면서


나를 김영선 선생의 스승이라고 소개하였다.


 


나는 


 


“내가 김선생을 가르친 것은 맞지만 인품으로 보면 오히려 “김영선선생이 나의 스승이란 생각이 들때도 있다”고 말했다.


 


거짓도 아니고 과장도 아니었다. 나의 솔직한 마음을 그대로 말한것이다.


젊은 교사이지만 정말로 인품이 훌륭하다. 진짜 교사다.


내가 그에게 고등학교 3년 내내 가르쳤다고 하지만 뭐 대단한 것을 가르쳤을까?


 


그런데 오늘 이리 저리 돌아다닌답시고


공부를 하지 않았다. 크게 공부랄 것도 없지만


그동안 집에 있으면서도 매일 조금씩은 공부를 했는데


 


오늘은 글 한줄 읽지 않았다. 이미 밤 12시다. 오늘을 돌이킬 수도 없다.


이미 내일이 되었다.


 


마음이 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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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병역의 의무

어떻게 오셨습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자식놈이 해외에 유학 갔는데 내년쯤 귀국하여 병역의무를 마치게 할까 하여 상담을 하고자 왔습니다.


2008년 8월31일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 한 다음 귀국하여 병역의무을 이행하고자 합니다.


너무 나이가 많아서 군대에 가는것이 동료들과 어울리기도 불편할것같아


대학을 마치면 군대에 입대할 계획입니다.


 


네..주민등록번호를 불러주시지요. 컴퓨터로 조회하겠습니다.


 


네, 84####-####### 입니다.


 


네,이름이 맹인영 이군요


현재 내년 8월31일까지는 연기가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법이 바뀌어 1984년생은 내년 말 즉, 2008년 12월 31일까지는


특별한 허가조치 없이 해외 체류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귀국할 때가 있으면


들어오기전에 인터넷으로 병무청에 들어가서 전자민원으로 우선징병검사를 신청하면


들어와있는 동안에 징병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 귀국해서도 직접 병무청에 와서 징병검사를 신청해도 징병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징병검사를 받은 다음에는 유학생은 병무청의 직권으로 입학허가서가 있으면


석사학위를 마칠때까지 입영을 연기해줍니다.


따라서 언제든지 징병검사를 받아도 되고, 또는 받지 않고 있다가 입대 시점에 징병검사를 받아도 됩니다.


 


 


아드님 전공이  무엇입니까?


전자공학입니다.


전자공학중에서도 무엇인지요?


컴퓨터입니다.


컴퓨터 중에서도 무엇인지요?


하드웨어입니다.


 


전자공학이면 아주 좋은 전공을 택하셨군요.


병역특례제도를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병역특례는 산업기능요원과 전문연구요원의 두가지가 있는데


산업기능요원은 자격증을 가진 기능공을 의미하며


전문요원은 공학계열 석사학위 이상자를 대상으로 모집합니다.


 


전문요원은 3년근무해야하고,


산업기능요원 중 현역입영대상자는 34개월,


산업기능요원 중 공익근무요원 소집대상 보충역은 26개월입니다.


 


선생님의 아들은 대학원까지 마치고 기업체에 가서 전문연구원으로 복무하는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봉급도 기존사원과 똑같이 받습니다. 우수한 학생이라면 그런 방법을 모색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연봉도 3500만원 정도 받습니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2년 군대 생활하고 나서 공부하려면 그동안에 배운것을 다 잊어먹을것 아닙니까?


대학원에 입학하면 2011년 12월 31일까지 군입대가 연기되며 그때 까지는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석사학위 받고 나서 전문연구원으로 가면 좋을듯합니다.


 


네, 그런 제도가 있었군요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들과 의논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박사까지 마치고 귀국해서 전문연구원을 하면 안될까요?


 


그건 안됩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앞으로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귀하의 아드님은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원을 하기에는 나이가 늦었습니다.


박사과정은 28세까지 군입대가 연기되고, 박사학위를 받는다는 확인서가 있으면 29세 6월까지 연기가 되지만


그때까지 아드님이 박사학위를 받는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둘째 아들은 약학과 2학년인데 듣는 말에 의하면


약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으면 역시 전문연구원으로 근무하는 병역특례제도가 있다고 하던데요


그런제도가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그런데 경쟁이 아주 치열합니다.(왜 경쟁이 치열한지는 시간관계상 물어보지 못했음)


그리고 대부문 제약회사에서 전문연구원으로 근무하는데


기존 사원과 대우도 똑같이 해주고 보수도 아주 좋습니다. 다만 퇴직금이 없고,승진이 안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보니


마치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고


특례제도로 병역의무를 이행하려하는


사람같아서 부끄럽습니다. 꼭 그련것은 아닙니다. 현역으로 가도 좋습니다. 


다만 큰 아들은 외국유학을 하고 있으니 여러가지 사정이 있고,


둘째 아들은 그런 특례제도가 있다고 하니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정상적으로 군복무를 마친사람입니다. 그때는 기간도 길어서 3년이었습니다.


 


정말 친절하게 상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또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전화 (031) 240-7352 김연진으로 문의해주시면


성심껏 답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큰 아드님은 현역으로 복무하는 것 보다 오히려 전자공학관련 전문연구원으로 근무하는 것이 국가에 더 보탬이 될것으로 생됩니다. 가능한 대학원을 마치고 전문연구원을 하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그런데 외국의 유명한 공과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서도 전문연구원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국내의 기업들이 그러한 인재를 얻기 위해 외국의 유명한 대학의 석사학위 수여 예상자를 상대로 로비를 벌일정도로 유치작전이 치열합니다. 국내에 들어오기전에 이미 자기가  전문요원으로 근무할 회사가 정해진 사람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종별 근무기간은?


 


전문연구요원 : 36개월


산업기능요원(현역요원) : 34 개월


산업기능요원(공익근무요원) : 26개월


공익근무요원 : 26개월


현역군인 : 24개월


 


전문요원은 복무기간이 3년으로 다른 분야보다 긴것이 문제군요


하긴 인생 80년에 1년 더 근무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는것은 아닐것입니다.


장시간 상담에 응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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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외래종교의 한국문화 觀


 



세계 3대 종교하면 불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를 들 수 있다.


순서는 종교가 일어난 순서로 열거하였다.


3가지 종교 모두 외래종교이다.




글로벌시대에 토종, 외세 가릴 것은 없지만 하여튼 순수한 국산이 아님은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이슬람교는 세계의 모든 나라 백성들을 형제처럼 생각하는 四海同胞主義적 종교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는 것이 없어서 논점에서 제외한다.




불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한국적으로 토착화되었다.


그 분명한 증거로는 세계 불교문화에서 유래가 없는 삼성각이다.




모든 사찰에 가보면 삼성각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칠성님, 산신령님, 독성님의 삼성을 모신 곳이다. 건물 이름이 삼성각 인 이유는 모두 불교 밖에서 수용한 신이기 때문에 전이라 하지 않고 각이라 한다. 3명의 신은 모두 우리 고유의 신앙에 나오는 신들이다. 절에 처음 가보는 사람도 삼성각 문을 열고 걸려있는 토속신의 얼굴을 보면 이것이 불교의 산물이 아님을 알 수있다. 산신령님은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으로 호랑이와 더불어 나타난 만사형통의 신이다. 열에 아홉은 호랑이를 타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정겨워 웃음이 절로난다. 물론 스님들은 산신령님에게 제단을 차리고 절을 한다.




크리스트교는 구교(카톨릭)와 신교로 나뉘는데


구교 ,즉 성당에 가보면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생겨난 것인지는 몰라도 너무나 형식적이고 작위적인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신부의 설교와 읍조리는 대사는 라르고의 느릿한 일정한 리듬을 타면서 무슨 주술사의 주문 외우는 소리 같아서 싫다. 아무 맛도 없는 동전만한 밥풀과자는 왜 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김수한 추기경은 마음에 든다. 그분의 생각과 행동이 마음에 든다는 뜻이다. 20여년 전으로 기억된다. 추기경은 “1784년 이승훈에의해 카톨릭이 우리나라에 전파될 때 조상제사가 우상숭배적 요소가 있다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는데, 조상에 제사지내는 것은 우리의 문화이며 우상숭배가 아니다. 따라서 한국천주교는 과거의 일을 반성하고 사과한다”. 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하긴 로마교황은 1940년 일본신사참배까지 인정하고 신사참배는 천주교와 상관없다고 했으니 추기경의 발언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조선말 순교한 카톨릭 성인들의 신앙을 깎아내릴 의도는 없다. 그분들은 그 시대의 관점에서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김수환 추기경의 일화는 또 있다. 역시 20여년 전의 일이다. 정확하게 누구의 다비식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유명한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김수한 추기경이 조문을 하러왔는데 기자들은 과연 추기경이 어떻게 조의를 표할지 궁금하였다. 보통사람 처럼 절을 할것인가? 이것이 궁금하였던 것이다. 추기경은 망설이지 않고 성큼 성큼 걸어나가 엎드려 절하였다. 기자들이 놀라서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죽은자에게 절을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추기경의 대답은 명쾌하였다. “자네들은 친구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절을 안하나?”






나는 신교도(프로테스탄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카톨릭의 분위기가 싫다. 성당에 가면 엄숙한 분위기가 싫고, 주술사의 주문 같은 신부의 인도가 싫다. 개신교에 가야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개신교가 휠씬 인간적이다. 노래도 씩씩하고, 목사의 설교도 활력이 넘친다. 한마디로 생기가 넘친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간다. 오늘도 주일예배에 다녀왔다. 교회의자에 조용히 앉아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고, 지난 주에 잘못한 것이 있나 반성하였고, 큰 아들 아산이를 돌봐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리고 부모님, 장모님의 건강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평안하도록 기도하였고, 마지막에는 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아무개를 위해서도 그가 잘되기를 기도하였다.


목사님의 언변은 유창하였고 표정은 부드러웠으며 아주 겸손하신 분이셨다.(다만 목사의 설교가 질의응답은 없고, 한 시간 내내 일방적인 강의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정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그런 독재적인 강의가 어디 있나? 한 시간 내내 혼자 떠들고 수백 명이 앉아서 지당하십니다! 하고 고개 끄덕거리며 아멘하며 듣기만 하고……이런 설교방식은 언젠가는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철저한 목사편의주의지 이게 무슨 설법이냐? 그런식이라면 나도 하겠다.이점은 카톨릭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석가도 그렇고 공자도 이렇게 하지 않았다. 논어를 보라! 항상 제자의 질문을 받고, 응답한 내용이다)




더욱더 한심한 것은 개신교의 민족문화 觀이다. 개신교의 韓國文化에 관한 이해는 문화의 基本槪念도 모르는 수준이다. 요즈음 애들 말로 무개념이다. 아무 생각 없는 것이다. 문화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이 학습을 통해가진 공통된 행동양식 또는 생활양식이다”.


 


한국민족이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명백하게 신앙이 아니며 생활양식인 것이다. 그것을 크리스크교리에 위배된다고 부모님 제삿날 절하지 않고, 추도식을 올리는 것을 보면 세상에 이런 편견과 아집이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조상에 제사지내고 절하는 것을 영원불변의 신앙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생활양식이고 문화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변한다. 언젠가는 제사가 없어지는 때도 올것이다. 그것이 문화의 속성인것이다. 조상에 절하지 않는 것을 십계명을 지키는 金科玉條처럼 떠받들고 있는 改新敎는 한국카톨릭에서 배워야 한다.


 


원래 한뿌리였던 로마교회가 로마카톨릭과 그리스정교회로 갈라진것도 우상숭배문제 때문이었다. 아시아의 훈족에 쫏겨 로마영토에 들어온 미개한 게르만족을 교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표식이 있어야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만들어 낸것이 마리아상과 십자가이다. 이것을 동로마에서 우상숭배라하여 반대하였고, 이것이 결국 로마카톨릭과 그리스정교회로 갈라진 이유가 된것이다. 결국 오늘날 카톨릭과 개신교에서 모두 사용하는 십자가도 그리스정교회에서는 우상숭배인것이다. 내가하면 로맨스요 남이하면 분륜인가?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절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보기보다 민족문화로 보는 개신교의 넓은 아량과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해본다.   


 


그리고 내가 믿지 않는 다른 신에게 절하면 뭐 크게 덧나나?


그게 무슨 큰 죽을 죄라고……다원화된 사회에서 많은 종교가 서로 어루려져 공동체를 이루며 더불어 협력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내가 믿는 신앙이 소중하면 남의 믿음도 존중해햐한다.  자기가 믿는 신은 위대하고 남이 믿는 신은 악마인가?


세상에 이런 아집과 독선이 또 어디에 있나?  김일성주의 말고는 없다.


아마도 김수환 추기경은 부처님에게도 절하실 분인것 같다. 


 


나는 어떠한가? 내가 불자는 아니지만 불전에 여러 번 절한적 있다.


깊이 있게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불법이야 말로 얼마나 심오한가!


인생의 참모습은 고통이며, 고통의 원인은 욕망이고,


욕망을 끊는 방법은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하는 길이며,  


욕망을 끊으면 해탈하여 니르바나( 涅槃 )의 세계로 간다는 것이다.



 



불교를 믿느냐고?


아니다 좋아할 뿐이다.


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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