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이다

지난 달 그러니까 9월 13일 임태희 경기도교육감 당선인으로부터 교육감 공관에서 점심 초대를 받았다.  나 혼자가 아니고 중도보수교육감 후보 단일화 모임 임원 18명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사과를 먹고 있는 분이 임태희교육감이다.

나는 지난 13년간 좌편향된 경기교육을 바로잡을 것을 부탁하였다.  김상곤, 이재정 좌파 교육감들이 혁신학교라는 미명 하에 편중되게 특정학교의 예산을 증액시켜 핏자 사주고 사탕발림하는 혁신학교 제도를 폐지함은 물론 아직도 썩어빠진 혁신학교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일벌백계 차원에서 숙청하도록 당부하였다. 나는 과감하게 숙청이라는 표현을 썼다. 과거 김상곤, 이재정 좌파교육감이 바른 말하는 많은 교육자를 숙청한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3월이면 교육감이 학교에 공문을 보내 학교에 세월호 코너를 설치하라. 세월호 플래카드를 교문에 달아라. 세월호 글짓기대회, 세월호 포스터그리기 대회, 세월호 그림그리기 대회 등을 열어 대입내신에 가산점이 되는 학교장 표창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세월호라는 해난 사고에 전 국민이 울었고 학생 1인당 공식적 금액만 8억2천만원씩 보상금을 지급하였다. 그만하면 되었다. 천안함 사건은 3월 26일이다.  순국 장병들은  5천만원씩 받았다. 임태희교육감에서 세월호, 천안함 폭침 등을 균형있게 교육하고 다루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이번 선거말고 그 직전 선거에 경기도 교육감 선거는 좌파가 단일화 하지 못하고 분열하였는데도  보수가 졌다. 서울과 인천은 보수가 분열되어 졌다는 말이 되지만 경기도는 그렇지 않다. 좌파가 단일화에 실패했는데도 보수가 졌다.  하여 경기도에는 이번 선거에 아무도 나서지 않아 우리 후보단일화 추진단의 애를 태웠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여러 유명인사에게 출마하라고 접촉을 시도해보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임태희다! 우리는 보수 단일화 후보로 임태의를 추천하였고 응원하였다.  임태희교육감에게 말했다. 교육감님은 당선된 그 자체만으로도 하실 일을 다 하셨다.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 수고하셨다고 말했다.

마지막 일어설 때 내가 일어나 모두 잔을 잡으라고 말했다. 내가 선물이다! 라고 말하면 모두 선물이다! 라고 소리치라고 말했다.

임태의교육감이 경기도에 온 것은 선물이다! 선물이다!!(일동 모두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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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움

<인터넷 경매 화면을 찍었다. 내가 산 그 질화로다. 아직 물건이 도착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기후를 보통 온대기후라고 말하는데 온대기후의 범위는 넓어서 우리보다 따뜻한 유럽 해안지역의 서안해양성기후나 지중해성 기후, 캘리포니아반도 안쪽의 기후 등 다양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후는 온대 중에서도 겨울이 더 춥고 길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의 기후를 엄밀히 말해 냉대기후에 가까운 온대기후로 본다. 실제로 우리나라 가정에서 방에 불을 때는 기간은 보통 10월에서 다음 해 4월 말까지다.  6개월을 난방하는 나라다. 일 년이 4계절이라고 하나 겨울이 반이다. 젊은 날 군대 시절 2월 말이면 난방을 끝낸다. 막사 안에서 연중 3월 1일이 제일 추운 날이었다. 지금 군대는 많이 좋아졌으리라.

이렇게 길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온돌을 사용해왔다. 더하여 아궁이에 불을 때고 남아있는 숯불을 용기에 담아 방으로 들여왔는데 이게 바로 화로다. 이것만큼 상하 계층이나 빈부의 차이 없이, 그리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두루 쓰이는 살림살이는 드물다. 손님을 맞을 때 화로를 손님 가까이 밀어주어서 따뜻한 정을 표시하였다.

어렸을 적 우리 집에도 화로가 있었다. 주물로 만든 투박한 무쇠화로 였다. 마치 갓을 엎어놓은 것 같은 넓은 귀가 달렸고 다리는 특별히 없었다. 아침에 어머니가 아궁이에서 화롯불을 방으로 들이며 언 손을 비비면 우리 형제도 웃음이 가득한 얼굴을 화로에 디밀었다. 창호지 한 장으로 북서풍을 막는 방에서 화로는 구세주였고 방안 가득히 정다움을 채웠다. 아버지는 된장 투가리를 올리셨고 우리는 고구마를 구웠다. 인두로 다독거리며 불을 잘 관리하면 오후 점심 후까지도 따뜻함을 유지할 수 있다.

동네 부잣집 남참봉댁에는 백동화로가 있었다. 두어 번 구경했는데 투명한 은빛에 눈이 부셨다. 나는 남참봉을 본적도 없는데 과거 참봉벼슬을 한 집안이라 모두 남참봉댁으로 불렀다. 우리집에도 백동화로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성년이 되어 수원 태장면 고개를 지나는데 골동품가게가 있어 들여다보니 세상에! 백동화로가 있었다. 들어가 물어보니 25만 원 이란다. 30여 년 전인데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다. 옆에 무쇠화로가 보였다. 우리 집에서 쓰던 그 화로였다. 보는 순간 내 방에 가득 찼던 정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10만 원을 주고 샀다. 옆에 있던 인두도 달라고 했더니 덤이라며 주었다. 집에 가져와 아버지에게 보여드렸더니 그냥 데면데면하셨다. 시골에서 이사 올 때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 물건은 챙겨왔는데 연탄을 때는 도회지에서 화로는 필요 없으니 웬만한 살림살이는 숙부댁에 모두 주고 왔다, 아버지에게 화로는 그런 물건이었다. 당신에게는 도회지로 이사 와서 식솔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절박함이 더 우선이었지 한가한 겨울날의 낭만은 그냥 과거였다. 나는 그런 면에서 지금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존경하며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거대한 바위로 느낀다.

거실에 무쇠화로를 놓았고 현관 열쇠, 손톱깍기, 동전지갑, 구두주걱 등 여러 가지가 담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무쇠화로를 사던 날 돈을 더 주고서라도 백동화로를 살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잣집 남참봉댁에서 봤던 눈부셨던 백동화로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20여 년을 아쉬움으로 지냈다.

어느 날 수원 행궁 거리에서 시화전을 열어 작품을 냈다. 그런데 행궁 옆길에 새로 생긴 골동품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 안에 백동화로가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백동화로다. 문을 열고 들어가 만져보니 역시 귀티가 난다. 몸체와 다리를 따로 주물로 만들고 리벳 공법으로 결합하였다. 조선 말 어느 양반집 아랫목에 있던 물건이다. 다음에 오겠다고 하니 카드도 받는다고 한다. 40만 원을 주고 샀다. 집에 와서 거실에 놓고 보니 역시 눈부시다. 구리와 니켈을 섞은 것이 백동인데 니켈을 많이 섞어 할머니 쪽진 머리에 꼽혀있던 비녀처럼 은빛이 났다.

그 후 여러 개의 백동화로를 구입하였다. 가마에서 사용했던 작은 백동화로, 박쥐 모양의 손잡이가 달리고 면에 모란을 음각한 백동화로, 정말 대감님댁 같은 지체 높은 집에서 사용했던 대형 백동화로도 샀다. 골동품가게를 순회하면서 특별한 화로가 있으면 샀다. 나중에는 무쇠화로도 형태가 특별한 것을 보면 구입하였다. 사실 비용이 만만치 않았는데 아내도 평생 집안 식구를 위해 헌신한 나의 공을 봐서 그러는지 말리기는 하지만 그 강도가 감내할 만한 수준이어서 나의 화로병은 계속되었다. 왜 사냐고 물으면 만지고 싶은 것이다. 박물관에 가면 눈으로만 화로를 본다. 나는 화로를 사갖고 와서 손으로 품고 마음 놓고 만진다. 만지면서 100년 동안 거쳐 간 사연과 그리움을 감촉으로 느낀다. 그리고 언젠가는 아궁이 있는 집을 마련하여 군불을 때고 화롯불을 방안으로 들이는 기쁨을 기대하며 살아왔다.

지난여름부터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아궁이가 있는 시골에 거처를 마련하고 주말에는 그곳에 가서 조용히 지낸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어  자주 갈 수는 없지만 주말에는 집사람에게 어머니를 전적으로 맡기고 시골집에 간다. 아내는 내 소망을 잘 알기에 어머니가 더 나빠지시기 전에 시골 주택에 자주 가라고 권한다. 고마운 일이다.

인가가 드문 시골 밤은 어둡다. 마당에 나오면 더욱 어둡다. 보이는 건 별이고 들리는 것은 풀벌레 소리, 볼을 스치는 바람이 전부다. 아무도 없고 홀로 외롭다. 외로움은 글쟁이의 밥이다. 나는 그 외로움이 좋다. 어차피 사람은 외롭다. 갈 때 같이 가줄 동무도 없다. 아버지도 92세로 비교적 장수하셨지만 어머니를 홀로 남기고 가셨다.

무쇠화로, 백동화로, 시골 아궁이를 갖추웠다. 이제 추운 겨울만 오면 된다. 그런데 마음이 허전하다. 무언가 모자란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답은 질화로다. 어릴 때 옆집에 가면 할머니가 질화로를 끼고 사셨다. 설날 동네 어른에게 세배를 다니던 날 할머니에게 가면 질화로를 다독거리시며 달달한 엿을 내주셨다. 마지막으로 그 질화로를 만지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골동품상을 뒤져도 질화로가 없다. 내 기억에 질화로는 떡시루 같은 질감을 갖고 있다. 비교적 연질이었을 것이고, 당시 무쇠화로보다 값이 쌌을 것이다. 연질이다 보니 쉽게 깨져서 오늘날 남아있는 것이 없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그 질화로를 만나고 싶다.

어제저녁 골동품 경매시장에 질화로가 등장하였다. 눈이 번쩍 떠졌다. 최소 100년은 된 물건이다. 어떻게 저게 살아남았을까! 가슴에 감동의 물결이 넘쳤다. 무조건 사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쟁자가 붙었다. 그 사람이 값을 올릴 때마다 나도지지 않고 더 올렸다. 자꾸 값은 높아졌다. 통장에 돈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걸 놓치면 내가 얼마나 후회할 것을 알기에 그가  지치기를 기도하면서 계속 올렸다. 드디어 그가 줄을 놓았다. 경매사가 맹기호 선생님께 최종 낙찰합니다! 소리를 들으며 가슴을 쓸었다.

어머니가 아침밥을 짓고 들여오시던 화로의 정다움,  겨을날 삼태기처럼 생긴 오목한 동네, 삼태기마을에 집집마다 울안에 정다움을 가득 차게 했던 무쇠화로, 백동화로, 질화로까지 모두 갖추었다. 오라 겨울이여! 내 기꺼이 너를 따뜻하게 품어 안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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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무리다완

햇무리 사진이다. 눈부시다.

고려청자 햇무리다완이다.  비색이 아름답다. 인터넷에서 따온 사진으로 투명한 비색이 환상적이다. 최고 명품이다.  밑굽에 3개의 흰색은 구울 때 여러 개를 포개고 붙지 않게 넣은 규석 받침이다. 언젠가 이런 명품을 한 개 갖고 싶다^^ 중국 청자에는 없는 투명하고 청아한 한 비색이 일품이다.

내가 갖고 있는 햇무리 다완이다. 11C 전남 강진에서 만든 것이다. 형태는 햇무리굽다완이  맞는데 빗깔이 좋지않다. 산화가 많이 진행된 것이다. 대부분의 도자기는 무덤 출토품인데 흙에 오랜동안 뭍혀 있다보니 산화된다.

안쪽을 찍었다. 왼편에 쪼개진 것을 접착제로 붙인 흔적이 보인다.  산화가 되기는 했지만 11C 강진에서 생산된 햇무리청자다완이 틀림없다.

세워놓고 찍었다.  유약이 덜 뭍은 곳이 보인다. 1000년 가까이 된 물건에서 이 정도는 흠이라고 보기 어렵다.  다만 도자기는 색깔이 제일 중요한데 이건 산화되어 청자의 빗깔이 많이 변했고, 수리한 것이다. 깨진 것을 붙인 자기는 아주 헐값이다.  그래도 좋은 기회가 있어 아주 싸게 구입하였다.  흠이 있는 도자기는 정품에 비하여 말도 못할 정도로 싸다. 5만원에 구입하였다. 흠이 있지만 1000년 된 물건을 만져보는 것만으로 감사하다.

 

 

중국  9C~10C 월주청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집트의 고대유적지에서 월주청자의 햇무리굽 다완이 발견되었는데 그만큼 월주청자는 세계에 귀중품으로 수출되었다.  9C 중국은 세계를 경탄시키는 자기를 만드는 유일한 나라였다.

그런데 중국에만 있다고 믿었던 청자가 11C 고려에서 생산되었고 미륵사지에서도 출토되었다. 11C 고려햇무리다완은 굽이 약간 좁은 형태였다. 바다 속에서 발굴된 청자에서 중국 청자와 같은 명문이 나온 것으로 보아 고려에서는 처음에 월주청자를 모방하여 청자를 만든것으로 보인다.

고려청자가 중국청자와 다른 것은 중국 청자는 비색이 불투명한데 비하여 고려청자는 투명한 물빛이라는 점이 장점으로 다르다. 강진은 고려청자에 알맞은 흙과 물을 가진 곳으로 500여년간 왕실에 청자를 공급하였다. 고려청자 비색의 비밀은 불과 공기의 싸움에서 흙가마에서 소성시 공급되는 산소의 양을 통제하는데 있다.

12C 고려는 태토를  칼로 파내고 그 속에 다른 색의 흙을 집어넣어 만드는 상감기법을 개발하여 그 유명한 상감청자를 만들어 낸다. 그리하여 고려청자가 송의 기술을 뛰어넘자 남송시대에는 고려 귀족들이 중국 청자를 수입하지 않고 고려청자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남송의 수도 항저우 발굴에서 고려청자들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오히려 고려상감청자가 남송으로 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12C 고려청자는 중국 관요에 영향을 주어 형식과 모양에서 고려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고려 주전자에 있는 뚜껑 결합 고리가 중국에 나타나게 되고 중국이 자랑하는 명의 명품 청화백자의 형태와 문양에서 고려자기 형태가 나타난다.

필리핀에서 고려청자가 발굴되었는데 규석받침으로 특징되는 증거가 확실하다.  또  일본의 무사계급 상류계층에서는 고려청자를 갖고 있는 것이 부와 권력을 나타내는 징표였을 정도 였으며, 몽고지역에서도 고려청자가 출토되는 등 당시 고려청자가 일본 뿐만 아니라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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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

내가 교장으로 재직하는 8년 동안 학교 회계를 농협으로 지정하여 농협과는 비교적 좋은 인연으로 지내고 있다. 그런데 퇴직한 뒤에도 동네 농협을 출입하다 보니 은행 직원과 낯을 익히게 되었다. 가끔 지점장실에 들어가 차도 마시고 한담을 나누기도 하였는데 수원농협 권혁진지점장은 유달리 친절하여 가까이 사귀게 되었다. 그는 정년 퇴직하면서 아랫 직원을 불러 내가 나가더라도 맹교장님께 잘 해드리라고 부탁을 하기까지 하였다. 사실 은행에 돈을 많이 넣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별 중요한 손님이 아닌데도 권지점장의 나에 대한 배려는 특별하였다.

그가 퇴직하고 나서 점심이나 같이 하자고 해서 나갔는데 아들 혼인 주례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사실 서울까지 가는 일이 번거롭기는 하지만 마다할 수 없어 오늘 영등포에 가서 주례를 서고 왔다.

예식 중간에 혼주가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더니 아주 만족해 하였다.  혼주가 손님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기회가 거의 없으니 당연히 그런 시간을 갖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례를 맡으면 늘 하는 소리인데 성공하려 하지 말고 만족하라고 했다. 만족하는 저점 ! 거기가 바로 성공이라는 말을 당부하였다.

김은주 작가의 출판기념회가 동시간에 열려 참석하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역시 감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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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ure

여주에 마련한 내 우거에 사과가 열렸다. 지난 주 따서 먹어보니 맛이 들었다. 모두 딸까 하다가 식구들에게 먹여주려고 남겼다가 다시 가보니 새가 와서 거의 다 파먹었다. 새도 기다림의 맛을 안다. 풋과일은 먹지 않고 맛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파먹는다. 다행이 남은 3개를 수확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새는 이것 저것 쪼지 않고 먹는 것만 집중적으로 쪼아서 남은 3개는 온전하였다. 그러나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모양은 정말 흉하였다. 일년 내내 농약 한 번 살포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온갖 병충해에 시달리다가 저런 처참한 몰골을 만들어 냈다. 이른바 기적의 사과다! 먹어보았더니 정말 맛이 좋다! 아! 기적의 사과!!

기적의 사과 관련 신문에서 발췌한 것을 여기에 옮긴다. 여간해서 남의 글을 옮기지 않는데 이것은 특별한 내용이라 신문에서 끌어다 쓴다.

지난 100여년 사이 인간이 가장 활발한 품종개량을 해온 과일이 사과다. 그러는 동안 사과는 농약 없이는 기르지 못하는 과일이 되어 버렸다. ‘과학영농’을 표방해온 현대농법은, 비료와 농약과 농기계라는 형태의 석유에너지를 원료로, 자연물의 짝퉁인 ‘합성식량’을 제조하는 공정일지도 모른다.

 

사과를 재료로 사과 수프를 만드는 레스토랑(히로사키의 ‘레스토랑 야마자키’)의 주방장이 우연히 발견한 사실 때문에 사과 생산자 기무라씨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기무라씨의 사과를 반으로 갈라 냉장고 위에 방치했는데 2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고, 일반적인 갈변도 없이 달콤한 향을 내뿜으며 시든 것처럼 조그맣게 오그라든 상태로 있는 것을 보고 놀라 ‘기적의 사과’라고 불렀다.

 

 

평범한 사과농사꾼 기무라 아키노리는 우연히 ‘자연농법’을 접하고 그것에 꽂히게 된다. 자연농법은 말 그대로 자연회귀의 농법. 땅을 갈지도, 풀을 뽑지도 않으며, 화학비료나 농약은 일절 치지 않는다. 다만 퇴비와 토착미생물을 이용해 작물의 생명력을 북돋울 뿐이다.

 

 

야생에서 가장 멀어진 사과를 야생농법으로 길러보려 한 그의 시도는 어찌 되었을까. 농약과 비료를 주지 않자 아니나 다를까 과수원은 잡초천지가 되고, 해가 갈수록 나무들은 지실이 들어갔다. 아예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몇 년 새 절반가량이 고사해 버렸다. 주변에선 그를 바보, 파산자라고 놀렸다.

 

절망이 거듭되던 어느 날,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뒷산에 오른다. 그랬다가 거기서 야생 수목들을 보고 섬광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도토리나무는 인간의 손길을 타지 않고도 어떻게 저토록 충실한 열매를 주렁주렁 맺을까? 그가 깨우친 답은 바로 흙이었다. 비료와 농약 범벅인 농장의 흙은 영양분이 넘쳐 나무들이 애쓸 필요가 없다. 그러다보니 뿌리의 힘도, 생명력도 허약해져 있을 수밖에! 깨달음을 얻고 내려와 과수원에 콩을 심자 뿌리혹박테리아가 생겨 땅이 살아났고, 사과나무도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다.

 

콩을 심은 지 3년, 자연농법을 시작한 지 8년째 되던 봄, 남은 사과나무 중 한 그루에서 일곱 송이의 꽃이 피어났다. 그리고 두 개가 결실을 맺었다. 그런데 그 맛이 실로 기가 막혔다. 그리고 9년째이던 이듬해, 마침내 기적이 현실로 나타났다. 온 과수원에 사과꽃이 만개한 것이다. 그해 가을, 꽃을 솎지도 않아 탁구공 만해진 사과를 산더미처럼 거두었다.

 

1991년에는 사상초유의 태풍 속에서도 그의 사과밭은 80% 이상이 끄떡도 없었다. 이 이야기가 NHK의 다큐로 세상에 알려지자 ‘기적의 사과’는 먹어보는 게 소원인 명품이 되었고, 자연농법에 대한 관심은 한국에까지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기무라씨의 ‘야생 사과’는 우선 놀라울 정도로 맛있다고 한다. 생생한 풍미와 신선한 과즙이 살아있다는 게 먹어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평가다. 게다가 냉장고에 넣지 않고 두 조각으로 가른 채 방치해도 몇 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고 갈색으로 변하지 않는다. 찾는 사람이 많아 온라인 판매 개시 3분 만에 품절될 정도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그는 어떻게 농약도 안 쓰고 사과를 키울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실은 내가 아니라 사과나무가 힘을 낸 거지. 이건 겸손이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과나무를 돕는 것 정도야”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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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내 버킷리스트가 18개 인데 8가지는 실현하였고 아직 열 가지가 남았다.  그중 하나가 주말에 쉴 곳을 마련하는 것이다. 계획을 오래전에 세웠다가 구체화하지 못했는데 드디어 적당한 자리를 구했다. 장소를 물색하면서 느낀 것인데 자꾸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집 같은 환경을 구한다는 것을 알았다.  현대적으로 멋진 설계를 한 집도 보았는데 영 정이 가지 않았다. 사람은 먹을 것도 어릴 때 먹던 것을 찾는다고 하더니 살 곳도 그러하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시골집을 구하면서 자주 꿈을 꾸었는데 꿈에 고향 집을 자주 보았다. 그런데 자주 꾸다 보니 기존 고향 집에다 내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까지 추가되어 꿈은 발전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고향집에 물은 없었는데 꿈 속의 고향 집은 집 주변으로 작은 물이 흐르고 거기에 가재가 자라고 있었다.  맑은 물과 가재는 영원한 나의 로망이다.

내가 태어난 충청도 두메산골의 집은 뒷산이 서풍을 막아주는 아늑한 삼태기 같은 지형으로 마을 윗쪽에 샘이 있었다.  이번에 내가 찾은 곳도 산 밑 집이고 마당에 샘이 있다. 집주인은 찬물이 솟고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 난 이 집을 보자마자 어머니 품속 같은 느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처음 집 어귀에 들어서면서 붉은 저녁노을을 등에 지고 싸리 울타리 너머로 그 희고 긴 목을 뽑으며 소 몰고 나간 나를 기다리는 어머니를 보았다.

나의 유년 시절은 사람하고 지낸 시간보다 소와 지낸 시간이 더 많았다. 고향 집도 동네 끝에 떨어진 산 밑 외딴 터여서 친구도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9살 때부터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를 몰고 강변 풀밭으로 나갔다. 송아지가 아니고 작은 트럭만 한 성년의 암소였다. 쟁기를 끄는 일을 익힌 소였기에 농삿집에 소중한 자산이었다. 소 꼴을 베어다 먹이는 것보다 소를 끌고 풀밭을 다니면 소는 제가 좋아하는 풀을 골라 먹으므로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 아버지 지론이었다. 어린 날의 시간은 길었다. 학교에서 배운 노래 스무 곡을 부르고 클레멘타인을 다시 불러도 해가 남았다. 햇볕과 바람밖에 없는 강변 풀밭에서 소년의 외로움은 시퍼렇게 쌓였다. 나는 조숙한 편이었나 보다. 넓은 풀밭에서 여러 시간 있으면서 고독한 시간을 보냈고 인간 유한성을 자각하고 무서움에 떨었다.

시골에 쉴 곳을 마련하고 깨끗이 청소하였다. 창을 활짝 열고 물걸레질을 열 번이나 하고 나서 마루에 큰대자로 누웠다. 아무도 없다. 혼자다. 혼자 편하다. 어린 시절 강변 풀밭에서도 혼자였다. 홀로 외로움은 글쟁이의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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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아래 사진은 어머니와 둘이 코다리찜을 먹으러 갔는데 종업원이 찍어주었다.  사진이 좋아 어머니 얼굴만 따로 잘랐다. 오랜만에 어머니의 좋은 사진을 만났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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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

 

 

한국문인협회 한국문화선양분과에서 추최하는 출판기념회가 대구에서 열려 다녀왔다.

나는 이 분과의 부회장을 맡고 있다. 일년에 동인지 한 권을 발행하는데 이번에 2022년 동인지 출판기념회가 열린 것이다.  기념식이 끝나고 이상화고택과 김원일 소설가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를 발표한 이상화 시인!

그는 대접 받을 만 하다! 훌륭한 분이다. 명복을 비는 묵념을 했다. 이처럼 글쟁이는  옳은 신념으로 나라와 겨례가 어려울 때 정직한 글을 써서 민중들에게 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모인 회원들이 모두 조심하고 겸손한 작가들이었으며 아주 품격이 높은 분들이었다. 감사한 히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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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

오늘 아내는 서울 교사 모임에 가고 저녁에 온다.  내가 저녁 반찬을 위해 시장을 보고 마음 먹고 반찬을 했다. 양도 거의 일주일 먹을 정도로 많이 했다. 인간의 치아 구조를 보고 생물학자들은 인간이 원래 초식동물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사실 구석기 시대 수렵,  어로,  채집  등으로 식량을 조달했다고 하지만 인간의 동작으로 생쥐 한 마리 잡기도 쉽지 않다.  사냥으로  고기를 먹어보는 것은 가뭄에 콩 나듯 희박한 일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풀과 나무 열매 등을 먹고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특히 동양인의 장이 식물을 소화하기 위해 길다는 말도 있다.  오늘날 육식으로 장에서 오래  머물러 있다고 보니 여러가지 장 질환 병이 많아졌다는 내용도 신문에서 읽었다.

하여 오늘 완전 채식 식단 요리를 했다.  날로 먹는 것도 아닌데 식초에 20분 담갔다가 헹구어 찜판에 찌고, 고추장 양념으로 무쳤다.

저녁에 아내가 보고 놀라워했다.  뭐! 이정도 갖고 놀라나 ^^

집사람에게 호박 쌈을 먹기 위해 쌈장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두부를 넉넉히 넣고 된장과 고추장을 조금 넣고 짜지 않게 잘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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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ent

친구 남기완교수가 선물로 보내온 것이다.
딱 어울린다. 벽에 제대로 자리하고 있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하루에 한 가지 착한 일을 하고,  세 번 반성하고,  백 글자를 쓰고 일 천 글자를 읽으며, 일 만 보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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