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 字 수필/ 키/맹기호

키/ 맹기호

민속박물관에 갔더니 내가 어린 시절 사용하던 물건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아직 살아있는데 전시된 물건은 과거였고, 죽은 물건이었다. 엄밀히 말해 과거는 죽은 시간이다. 우리 집에도 죽은 과거가 하나 있다. 거실 벽에 걸려 있는 키다. 50년 전 시골을 떠날 때 이삿짐 위에 키를 실었다. 왠지 도시에서도 키를 사용할 때가 있을 것 같아서 가져온 것이다. 그 키를 볼 때마다 강변 풀밭에서 소 풀 뜯기며 요란한 매미 소리에 진저리를 치던 여름날이 생각난다.

살아있는 우럭으로 매운탕을 끓인 것과 냉동된 우럭은 맛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금방 추수한 밀로 만든 국수와 수입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맛이 다르다. 나는 그 맛을 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는 밀 농사를 지었고, 밀을 추수하면 그날로 국수를 빼 왔다. 금방 추수한 밀로 만든 국수는 정말 맛이 좋다. 그 국수가 먹고 싶어 지난 가을 도심 한복판에 있는 마당에 우리 밀을 심었다. 그리 넓은 면적은 아니지만 푸른 싹을 상큼하게 올리더니 겨울의 눈보라도 이기고 기운차게 올라왔다. 아침마다 새파랗게 올라오는 밀을 만나면서 국군의 날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용사의 기백을 보는 듯하다. 5월 말 밀대가 노릇하게 익어갈 때 고향의 밀밭 하늘 높이 정지 비행을 하며 노래하던 종달새가 생각난다. 마당 밀밭에 눕고 싶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마당에서 밀을 추수하면 산비둘기가 내려와 밀알을 먹었다. 6월 말 추수를 하게 되었다. 드디어 키를 사용할 순간이 온 것이다. 까부르면서 껍데기와 모래를 골라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가 웬 새가 왔다고 말한다. 돌아보니 세상에! 산비둘기 두 마리가 내 집 마당에 들어와 밀을 먹고 있다. 130만 인구가 사는 도심 복판에 산비둘기라니! 건령 50년 된 집에 처음으로 진객이 찾아온 것이다. 참새는 자주 오지만 집비둘기도 한 번 들어온 적이 없다. 반가워 숨이 막히는 듯하였다. 나는 얼른  쌀을 한 줌 쥐고 나와 마당에 뿌려주었다. 그런데 쌀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까운 밀만 쪼아 먹는다. 산비둘기도 그 맛을 아는 걸까? 키로 날곡 까부르는 소리를 들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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