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내가 27살이던 해
나는 시골의 고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아이들은 순진했고 잘 따라 주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교육열은 대단하여 그 학
교에서도 대학입시는 주요관심사였다. 가자마자 고등학교 3학년을 맡았는데 학교 앞에서 하
숙을 하면서 밤에는 대학입시를 위하여 학습지도안을 짜고 수업준비를 하였다. 정말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다. 한 시간 수업을 위하여 최소한 두시간을 준비하였다.
학교 앞에서 하숙을 했는데 그 하숙집 이름이 “하얀집”이었다. 지붕은 슬레이트였고 벽에는
흰 석회칠을 했는데 그 이유로 어떤 사람은 “White house”라고도 불렀다. 할머니의 음식은
깔끔했고, 바닷가 지역의 토속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좋았으며, 하숙집 둘째 딸은 통기타를
치며 비교적 기품 있게 노래를 불렀다.
그 하숙방에서 총각선생님으로 혼자 살면서 詩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어느 때는 밤을 새워
그림을 그린적도 있다.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 당시 나는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가 제일인줄 알았다.
목이 터지라고 하나라도 더 가르쳐, 좋은 대학에 합격시키는 것이 훌륭한 교사라고 생각되
었다. 실제로 서울법대를 비롯한 기타 명문대학에도 꽤 많은 학생을 합격시키는 성과를 이
룩하였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지금처럼 대학이 많은 시대가 아니었고, 실제로 대학에 가는 학생보다 떨어지는 학생과 포
기하는 학생이 더 많았다. 그런데 계속 공부지상주의로 가는것에 대하여 회의를하기 시작하
였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문화였다. 시골지역은 문화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다. 그 지역에서
최고학부이며 하나밖에 없는 고등학교로서 어떤 문화적인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였고,
아이들에게 문화의 참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다른 두 선생님과 함께
고등학교 연극부를 창설한 것이다. 창단 공연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였다. 초등학교 학예회
같은 연극이나 학생연극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삐뚤어진 청소년 제길 찾기나, 부모의 과
잉기대로 망가지는 학생을 다루는 극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때 느낀 것이 우리나라 연극
대본으로 개발된 학생극은 별로 없었다.
이왕이면 대작을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정말 크게 판을 벌렸다. 연극을 해본 사람은 오
영진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이다. 그는 한국의 세익스피어다. 그 중에서도 “맹진사댁 경
사”의 대본을 보면 오영진씨가 얼마나 천재적인 극작가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맹진사댁 경
사는 일반 성인극단에서도 무대에 올리기 어려워하는 작품이다. 1시간 30분짜리 연극을 무
대에 올렸으니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15회 정도의 공연을 했고 연 관람 인원은 2000명이
넘었다. 고등학생, 중학생에 이어 학부모까지……..모두 감동의 물결이었다. 그 학교를 오래전
에 떠났지만 지금도 연극부는 계속되고 있으며 매년 공연이 있을 때 나는 꼭 초청을 받는
다.
나는 그 학교에 내 젊음을 바쳤다. 내 몸을 통째로 던져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공부도 열심
히 가르쳤고, 매년 학교 축제도 열어, 운동도 하고 학생마다 자신이 만든 작품을 전시하게
하여 공부가 전부가 아님을 알게 하였다. 그 학교에서 나는 독재자이며 우상이었다.(영심아
이 표현이 맞냐? 푸하하!!)
그리고 무엇보다 연극부를 사랑하였다. 그 연극부에서 만난 아이가 영심이다.
그는 주연 배우였다. “2회 공연인 ‘생일잔치’의 주연으로 발탁하였다.
그는 천부적인 연기의 재능을 타고난 아이였다. 남자배우가 연기를 못
하면 여자인 영심이로 바꾼 적도 있는데 휠씬 잘했다.
영심이는 얼굴도 예쁘지만 인성(人性)은 더없이 훌륭하였다. 나는 영심이
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지금은 영심이가 아마도 30살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에게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다.
영심아 장미꽃 보낸다 받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