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일기♠ 아! 문수산성


 



 




 




 


보통 공직사회에서는 체육의날 행사가 있다.


하루 날을 잡아서 체육 관련 행사를 갖는 것이다.


어느 곳으로 갈것인지 교육원 직원들이 설문조사를 했는데


서울의 북한산을 가자는 의견도  있었다.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정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여 강화도 앞의 육지에 있는 문수산성으로 정했다.


 


불평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대형 버스를 대절했는데


겨우 10km 떨어진 문수산성을 가면 어떻하느냐 면서 불평을 하였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문수산성은 병인양요의 격전지이며,


문수산성 밑에 있는 갑곶나루는


정묘호란 때는 인조를 비롯한 왕실 전체가, 


병자호란 때는 세자빈, 세손, 봉림대군, 인평대군이 피난을  왔을 때 건넜던 다리이며,


그 이전 고려의 39년 항몽시절에


몽고군이 주둔하면서 강화도의 고려군과 대치했던 장소가 아마도 문수산일 것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이런 때 일부러 문수산성을 가보지 않으면 개인적으로 가기 어려운 곳이라고 주장하였다.


요즈음 인터넷에서 가장 가고싶은 관광지를 검색하면 강화도가 전국 10여개 지역 중에서 5위안에 든다.


그러나 강화에 사는 일반직 직원들은 멀리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여러 사람을 설득한 끝에


문수산성으로 가게되었다.


 


참으로 웃기는 것은 


11시에 출발한 버스가 문수산성을 지나


1시간이나 더 멀리 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문수산으로 돌아와


산성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목적지가 너무 가까이 있으니


목적지를 지나 먼 곳에 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가까운 목적지로 돌아온 격이 되었다.   



산성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었다.


돌을 쌓은 솜씨가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첫 사진은 정상에서 찍은 사진인데


뒷쪽은 한강이며 강 건너가 북한 땅이다.


맑은 날씨여서 북한 땅이 잘 보였다.


 


듣던 대로 땔감으로 쓰기 위해 산의 나무를 베어내어


모든 산은 붉은 민둥산으로 나무가 없어서 썰렁하였다.


녹음이 우거진 남한의 산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신식 소총을 쏘고, 군함에서는 대포로 함포사격을 하며 공격해오는 프랑스군 앞에


조선군은 제대로 공격도 해보지 못하고  도망가는 바람에 순식간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이어 문수산성도 점령당했던 일을 상기하고


서양세력의 침입 앞에 무기력했던 조상들을 생각하면서 회한에 젖었다.


 


양헌수 장군의 지략으로 프랑스를 격퇴하기는 했지만


결국 10년이 지난 1876년에 일본에 무기력하게 강화도조약으로 굴복하고 말았다.


 


 


 


 


< 관련자료 >


김포에서 강화도로 가다 보면 강화대교를 건너기 바로 전에 오른쪽으로 높은 산이 보인다. 바로 김포반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해발 376m의 문수산(文殊山)이다. 이 산에 사적 제139호로 지정된 문수산성이 있다. 문수산 정상에 올라가 보면 동북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가고 서쪽으로는 강화도와 김포 사이를 갈라 놓는 염하가 흐르고 있다. 염하 건너편으로 강화도 갑곶돈에서 월곶돈에 이르는 강화도 동쪽 해안이 눈 아래 들어온다. 문수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이 강들은 조선 시대에 서해안을 따라 올라온 배가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들어가는 유일한 뱃길이었다.




이 뱃길을 감제하고 강화도 수비를 보강하기 위해 숙종 20년(1694) 문수산에 산성을 쌓았다. 문수산이 전략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병자호란(1636) 이후다.




정묘호란(1627) 때에는 인조를 비롯한 조정이 강화도에 들어가 후금에 항전하면서 협상을 주도해 후금군의 철수를 이끌어냈지만 병자호란 때에는 청군의 도하작전 성공으로 강화도가 쉽게 함락됐다. 당시 청군이 수전(水戰)에 익숙한 중국 군사를 대동하고 왔을 뿐만 아니라 강화도 대안인 문수산 일대를 장악하고 수십 일 동안 강화도의 정세를 관망하며 주변에서 조선인들의 선박을 징발하고 민가를 헐어 수백 척의 뗏목을 만들어 일시에 염하를 도하했기 때문이다. 문수산이 강화도 공략의 거점으로 이용됐던 것이다.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의 군비에 대한 청의 감시가 느슨해지자 조정에서는 강화도를 보강하면서 문수산에 산성을 축조할 계획을 세우게 됐다. 강화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수산을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축성 공사는 숙종 19년(1693) 말부터 시작, 이듬해 9월에 끝났다. 대략 10개월 정도 소요된 셈이다.




문수산성은 강화대교가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염하를 따라 평지로 이어지다 문수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북쪽 능선을 따라 올라가 다시 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도록 쌓아졌다. 이 산성은 둘레가 6201m, 내부 면적이 6만4000평에 이르는 비교적 큰 규모다.


육군박물관은 1998년 문수산성에 대한 현지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산성은 모두 돌로 쌓여졌는데 현재 염하와 연해 있는 평지 부분은 모두 파괴돼 성벽이 남아 있지 않지만 문수산 능선에는 성벽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성벽으로 볼 때 외벽은 35m의 높이로 수직 벽면을 이루고 있으며 성벽 상단부의 두께는 2m 정도로 비교적 견고하게 축조됐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곳의 문루(門樓)와 남·북·동 세 곳의 아문(亞門)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문과 북문을 복원해 놓았을 뿐 모두 훼손돼 위치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문수산 정상에는 지휘소인 장대(將臺)가 있었는데 현재는 지름 20㎝ 내외의 원형 주춧돌만 남아 있다.




이 문수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1866년의 병인양요 때였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갑곶진에 상륙해 강화성을 점령하자 조정에서는 문수산성에 50여 명의 군사를 배치, 프랑스군의 내륙 침략에 대비케 했다. 이 무렵 로즈 제독은 조선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70여 명의 정찰대를 문수산성 쪽으로 보냈다. 이를 주시하고 있던 조선군의 기습 사격으로 프랑스군에서 전사상자 5명이 발생했다. 프랑스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우세한 화력을 이용, 남문으로 돌진했다. 남문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조선군은 화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동쪽의 능선을 따라 통진 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을 점령하자 남문을 비롯한 부속 건물과 민가 30여 호를 모조리 소각하고 조선군의 후미를 추격하다 짙은 안개로 추격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되돌아갔다.




전투는 조선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문수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부각됐다. 원래는 내륙으로부터 강화도가 침공받을 경우를 대비해 문수산성을 쌓았던 것이지만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문수산성이 강화도 쪽에서 내륙으로 침공하는 적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인식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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