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일까?
지난 주일 학교 도서실에서 대출받아 유대계 체코 사람인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다.
카프카의 [변신]은 20세기 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생활능력이 없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누이동생이 함께사는 가족의 실질적 가장이다.
그는 외판사원으로 근무하면서 늘 사장과 지배인으로부터 자신이 무능한 사원으로 퇴출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있었다는 내용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본 모습을 찾으려 애쓰지만 그는 사과로 등을 얻어맞고 상처가 깊어 결국 죽는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다.
카프카는 [변신]에서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잃어버리는 직장인을 그렸다.
그의 이러한 작업으로 인하여 인간 존재의 부조리성을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파헤쳐 현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실존주의란 세계대전, 기계문명, 산업사회의 발달 등으로 약화되어가는 인간 존중의 모습을 개탄하고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현대철학 사조이다.
실존주의를 현대의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성의 재발견, 인간성의 회복 때문이다.
1915년에 [변신]을 썼다고 하는 것은 누구보다 앞서 그가 현대문명을 비판한 천재임을 알수 있다. 천재는 아무도 하지 못한 생각을 한다.
어제 학교 도서실에서
2005년에 김동리 문학상을 받은 김용성의 소설 [촉각]을 읽었다.
그런데 왠지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출판사 편집부 무능력한 말단사원인 정달진은 늘 해고의 압력에 시달린다.
그날도 페이지가 뒤죽박죽이 된 편집으로 부장에게 욕을 먹고 당장 해고하고 싶지만 인생이 불쌍해서 더 둬 본다는 말을 듣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 마포교차로에서 브레이크 고장으로 교통 사고가 났다.
타박상을 입고 병원에서 깨어난 정달진은 간호원과 의사의 귀 옆에 양쪽으로 솟아오른 연골처럼 뻗어오른 흡사 달팽이의 촉각을 확대한것 같은
두 개의 물체를 보고 놀란다. 회사에 와보니 부장은 물론이고 친한 친구까지도 귀뒤에 흔들거리는 두 개의 촉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촉각을 달고 있는 본인들은 촉각이 없다고 말한다. 정달진의 눈에만 촉각이 보이는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자신도 귀 양쪽에 어설프게나마 인공적으로 촉각을 만들어 달고 회사에 나갔다.
다른 사람이 정달진을 볼 때마다 촉각을 달고 다닌다고 비아냥거렸고 정신병자로 몰린다. 결국 정달진을 해고 당하고,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취업하였으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달려오는 차에 치어 죽는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이다.
깊이 문학 공부를 하지 않은 얕은 내공의 내가 감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두렵기는 하지만
1915년의 카프카는 천재였으나 그것과 내용이 이렇게 같은 것이 2005년에 김동리 문학상을 받았다니……무언가 석연치 않다. 우연일까?
똑같은 주제의 두 소설을 일주일 간격으로 읽은 것은 또 무엇인가?
김용성의 [촉각]은 순전히 사서교사가 전해주어 읽은 책이다.
내가 추천한 도서 중 내가 읽지 않은 책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나는 [촉각]을 추천한 적이 없다.
그런데 사서교사의 말로는 내가 이책을 추천하여 구입했다는 것이다. 이것도 우연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