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ather
아버지!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잔정이 없으신 분, 구두쇠! 엄한 표정에 별로 웃으시는 적이 없다. 친구들이 놀러와도 아버
지를 보고 무서워 슬금슬금 눈치를 보거나 도망갈 정도였다. 정말로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면목이 없었다. 나는 어른이 되면 자식의 친구에게 친절하기로 맹세하였고, 지금은 아들 친
구가 오면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고, 먹을 것을 챙겨주며, 공자가 친구의 방문을 찬미한 유붕
자원(有朋 自願……)을 들먹이면서 환대한다.
내 성격이 오늘날 이정미 선생님처럼 밝고 아름답지 못한 것은 아버지 탓이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평생 딱 한번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
지가 밤길에 내 손을 잡고 걸은 적이 있는데 그 때의 불안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왜 이러
시나? 너무나 불편하였다.
아버지는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한 1924년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초등학교
에 다닐 때 학교에서 돌아와 솥을 열어 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괜찮은데, 솥 안에 아무것
도 없으면 눈물이 났다는 말씀을 하실 때면 나도 동정이 간다. 밥도 먹지 못했는데 호연지
기(浩然之氣)와 사단(四端)이 형성될 기회가 있겠는가?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일제의 강제
징병으로 2차 대전에 일본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우들은 모두 죽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일
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난 후 부모가 사는 원산에 가서 3년 정도 살다가, 거기서 6.25를 만
났는데 이미 군대갈 나이가 지났으나 인민군에 강제 징집되어 훈련을 받던 중, 부대를 탈출
하여 남한으로 내려왔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이 북상할 때, 북에 두고 온 부모가 걱정
되어 전선을 따라다니다가 인원 부족으로 허덕이는 국군에게 붙잡혀 전선에서 현지 입대되
어 결국 국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여 휴전할 때까지 HID요원으로 활약한 전쟁영웅이다.
아버지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 이렇게 3번이나 입대하였고 생사를 건 2차대전과 6.25전쟁에
참전하셨다.
한국전쟁이후 충청도에 정착하였으나, 그 때부터는 가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보다 무서
웠던 가난의 연속! 가난은 하루 세끼를 위해 미래를 포기하게 했고, 전쟁
은 아버지를 막살게 했다.
술을 한잔하시면 서정적인 유행가를 구성지게 부르는 것을 보면 아버지도 괘 낭만적이고 정
적인 분이시다. 아버지는 천부적인 미술솜씨도 있다. 내가 그런 대로 음악을 좋아하고 그림도
그리는 것은 아버지의 피를 받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아버지의 인생이 불쌍하기도 하다. 1924년 생! “묻지 마라 갑자 생이다” 이런 말
도 있지 않은가? 현재 살아있는 세대 중에서 가장 고생한 세대이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시장에서 장사하면서 배달하는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던 어느 가을날 다른 사람을 통해 내가 학교에 다니기를 권유하셨단다. 왜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 하여튼 내가 다시 학교에 가는 것을 원하셨다.
오늘 월급을 탔다. 항상 생활비를 어머니에게만 드리고 아버지는 특별한 때
만 드렸는데 오늘부터는 아버지에게 별도로 매달
10만원씩 드리려 한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아!! 아버지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