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비

우범순을 살해하고 고종황제와 황후 민씨의 능비를 건립한 고영근

일본에 망명한 우범선과 일본인 처, 중앙의 아들이 우장춘이다. 우장춘은 아버지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조선인을 위해 무언가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그가 발명한 것이 오늘날 김장용 배추다. 나는 몇 해 전 우연한 기회에 우장춘의 묘가 수원의 어느 산에 은밀하게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에게 시해된 일이다. 이를 두고 을미사변이라 부른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날 일본 낭인과 일본공사 미우라에게 길 안내를 한 사람은 조선인 우범선이다. 우범선은 김옥균과 같은 개화파적인 사고로 무장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별기군 대대장이었는데 황궁을 지켜야 했던 군인이 오히려 적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이 일로 보복을 두려워한 그는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 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우범선은 아들이 여섯 살 되던 해 조선인 자객 고영근에게 피살된다.
고영근은 왕실에 소속된 근위 요원으로 오로지 충성으로 무장된 수구파적인 사고로 항일 저항 운동의 선구자가 된다. 우범선과 대칭점에 선 인물이다. 고영근은 대한제국의 복수심에 불타 우범선을 살해한 후 일본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며 신하로써 황후를 시해한 자에 대한 정당한 임무라고 주장하였다. 복역 중 고종황제와 이토 히로부미와의 담판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 후 석방되어 1910년 한일 병탄 후에는 일제가 제의한 모든 관작을 사양하고 계속 황후의 능참봉 일을 계속했다. 고종 사후 조선 왕조가 이왕가로 격하된 상황에서“대한 제국 황제”라고 쓰인 비석을 세웠다는 이유로 조선 총독부에 의해 파직되고, 1923년 향년 71세를 일기로 이듬해 사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