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일야방성대곡!
아들은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나서 혼자서 차를 끌고 나가려 한다. 나도 그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하여 불안하지만 조심하라고 당부하면서 내주었다.
그 동안 무리 없이 혼자서 운전을 잘 하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였지만, 문제는 아들이 운전을 너무 용감하게 하는 것이었다. 몇 번 야단을 쳤지만 요새 젊은 아이들이 아비 말을 들을 리 없다. 정말 걱정스러웠다.
오늘도 차를 끌고 나갔기 때문에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하였다. 퇴근길에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사고를 냈다는 것이다. 친구 두 명이 함께 탄 것을 알기에 다쳤냐고 물었더니 몸에는 이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고소식을 전하는 아들의 목소리는 약간 흥분되어있었다. 사고가 어떻게 나는 것인가 알고 싶었는데 드디어 이렇게 나는 구나 하는 경험을 하였다면서 약간 신이 난 것 같은 소리여서 이상하기는 했지만, 다치지 않았다는 소식에 별로 나무라지 않고 보험회사에 연락하여 조치하라고 말하였다.
아들은 바로 올라오고 싶지 않다고 하여 아버지 친구인 대전의 남기완 교수댁에 가겠느냐고 했더니 흔쾌히 가 뵙고 싶다하여 그러마 라고 하였다.
아들의 말로는 범퍼가 내려갔고, 앞뒤 문짝이 찌그러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의 말과는 달리 대전에서 수원까지 견인해온 몰골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범퍼는 떨어져 내려갔고, 라지에타에서 부터 안쪽 차체가 휘여져 있었다. 앞뒤의문이열리지 않는다는 것은 차축이 뒤틀렸다는 뜻이다. 양쪽 라이트도 모두 깨져있었고, 운전석 뒷문짝은 움푹 패여있었다. 앞범퍼 밑의 가리개도 부서졌다. 시동을 걸었더니 쇳소리를 내며 마지막 가뿐 숨을 헐떡였다. 그런 처절한 신음은 처음 듣는다.
경기 3959 소나타Ⅱ !
그가 오늘 처참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섰다. 나의 애마는 차마 눈뜨고 불 수 없을 정도였으며 전신에서 붉은 선혈을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숨통을 끊어주는 것이 애마에 대한 나의 마지막 사랑일 것이다. 안락사 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나의 애마는 1994년 8월 2일생!
내일 이면 만 10세가 된다.
자동차 10년 타기 운동도 있고, 내가 무리하게 운행을 하지 않아 앞으로도 3년은 충분히 몰고 다닐 생각이었다. 교장 승진할 때까지는 타고 다닐 생각이었다. 열 살 생일 찬치를 의미 있게 하고 싶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난 10년간 나를 아무사고 없이 출퇴근 시켜준 나의 애마이다. 대부중학교에 근무하던 시절은 하루에 110km를 운전하고 다녔는데, 장거리 운전에 여러 번 졸았다. 운전을 해본 사람은 안다. 운전 중 에 잠간 졸은 것은 마치 오랜 시간을 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잠을 깬 뒤에는 정말 모골이 송연해진다. 애마는 내가 졸음운전을 할 때도 나를 도로에서 이탈시키지 않고 안전하게 운행해주었다. 주인이 졸고 있다고 생각하면 애마가 알아서 운전을 했다. 대부도 길은 반듯한 길도 아니고 구불구불한 길인지라 애마가 알아서 운전을 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다.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닌 여러 번의 일이니 애마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선부중학교에 근무하던 시절에 구입한 차이니 대부중학교를 거쳐, 성안중학교로 그리고 현재의 망포중학교로 전근을 오기까지 4학교를 거치면서 나와 모든 것을 함께 하였다. 기쁜 일도 함께하고 슬픔도 함께 하였다. 10년 전이면 내가 40의 팔팔한 나이였으니 내가 밤을 새워 일을 해도 지치지 않던 40대 초반의 정열적인 모습을 애마는 기억할 것이다. 물론 내가 교감으로 승진하던 기쁨도 함께 하였다.
나의 두 아들에게 조국의 아름다운 산하를 가르칠 때도 함께 하였고
백제 문화, 신라의 문화를 가르칠 때도 함께 하였으며,
특히 수덕사 대웅전에 갔을 때가 생각나고, 서산 마애삼존불의 미소도 함께 보았고
정림사지 5층 석탑 앞에서 아들에게 “이탑은 돌로 만든 시(詩)다” 라고 말하면서 나 스스로 전율을 느낄 때도 함께 있었고, 미륵사탑, 감은사탑, 석가탑, 다보탑도 함께 보았으며,
석굴암에도 같이 갔고, 불국사에서 기초석을 그랭이법으로 역은 천년건축의 아름다움도 함께 보았고, 겨울 날 천하 명당인 진평왕릉 곁에서 두 아들과 라면을 끓여 먹을 때도 누가 오나 망을 보아주기도 하였다.
월악산에서 아내와 두 아들과 장작불을 피우며 노래를 부를 때도 함께 했었고
대부도의 관사 마당에서는 아내의 친구인 이화선 선생님의 가족과 함께 장작불에 고기를 구어 먹을 때도 함께 하였다.
숙부님이 위독하여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마지막 문병을 갔을 때도 애마와 함께였고
어머니가 편찮으실 때 아주대학병원을 함께 간 것도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저께도 아주대학 병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갔을 때도 역시 애마와……
한 달에 두번씩 2,4주 일요일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들로, 산으로 애마를 끌고 나갔으니 10년이면 그 횟수가 얼마인가! 가을의 광교산에서, 이른 봄의 남한강에서 함께 구도를 잡고 붓을 날렸다. 일요화가회 식구들과의 투터운 교분도 모두 애마와 함께였다.
연말이면 그 많은 전시회에 같이 다녔고, 그럴 때마다 축하의 화분을 애마에게 싣고 다녔다. 강원도로 들어간 뒤에 소식도 없는 나의 평생의 그림 스승인 박영복 화백을 찾아갈 때도 애마와 함께 였다.
변난훈 교장선생님이 손자 성민을 바삐 보러가실 때
중앙선을 넘어 도로를 질주하며 달리는 시외버스를 멈추게 하여 교장선생님을 태워 드린것도 애마였으며,
내가 형님으로 섬기는 정무학 교장선생님과 사모님을 모실 때도 언제나 애마와 함께 하였다.
혼자서 10년을 타고 출퇴근 하면서
애마는 나에게 얼마나 좋은 음악을 들려주었던가!
조용필의 ‘큐’는 애마에게서 배웠고,
내가 젊은 선생들 앞에서 회식자리에서 멋지게 뽑는
이정현의 ‘와’ 백지영의 ‘부담’은 모두 애마에게서 배운 노래이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미배의 노래는 지금도 자주 듣고, 해바라기, 트윈폴리오의 노래도 듣는다. 어디 그뿐이랴 가끔은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도 애마에게서 듣는다. 참! 퇴근길에 늘 듣던 ‘이종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시대’도 있구나! 생각할수록 슬픔 뿐이다!
여름 날에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주인이 보트를 탈 때도 더운 주차장에서 땡볕을 맞으며 묵묵히 돌아갈 차비를 해주었고,
정동진에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시를 읊을 때도 곁에 있어주었다.
옆자리에 탄 승객이 “오래된 구형모델인데 차좀 바꾸시지요?” 라고 말할 때면 나는 정색을 하며 “차가 듣는데 못하는 소리가 없구려” 하면서 상대를 나무랐다.
그 동안 내가 애마에게 잘못한 일도 후회된다.
엔진 오일을 제때 갈아주길 했나?
기어오일은 비싸다고 보충만 시켰고,
브레이크 라이닝을 너무 오래 써서 드럼이 긁히기도 했으며,
타이어의 교환주기도 지키지 못하였다.
모든 것이 미안하고 후회스럽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마지막으로 애마에게 써비스 한것이 있다면
아들이 이번 여름방학에 운전을 배우겠다고하여 아들의 안전을 위하여
타이어를 갈고,
엔진오일을 갈았으며,
브레이크 라이닝을 갈았고,
내일은 10살 생일을 맞아 타이밍 벨트를 40만원을 들여 교체할 생각이었다. 타이밍 벨트는 내 스스로 이미 결심한 일이었으니 애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렇게 차가 많이 망가졌는데도 차에 탄 나의 아들과 친구들은 다친 곳이 없다. 나의 애마는 제 몸을 버려가면서 주인 아들의 몸을 구한 것이다. 살신성인(殺身成仁)!
제 목숨을 버려 주인을 구한 나의 애마여!
슬프고도 슬프다!
정말로 슬프다.
어디 가서 너와 같은 애마를 다시 만날꼬!
시일야방성대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