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호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내가 개인적으로 그토록 좋아하고 사모하는 국보133호 청자진시연화문 표형주자를 보기 위해

아내와 함께 서울 리움미술관에 다녀왔다. 진품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리움미술관 세밀가귀전에 첫번째 배우가 되어 앉아 있었는데 자태가 신비로웠다.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특별전시관과 상설전시관을 모두 보는데 하루 종일 걸렸다.

25년 전에 미국 전시를 위해 나들이를 했었는데 당시 보험가액이 250억이었다.

나중에 판매점에 들려 133호 복제품을 사고 싶었는데 너무 비싸서 못샀다.

집사람이 말렸는데 사실 나도 살 자신이 없었다. 복제품으로 너무 비쌌다.

헐한 물건이라도 진품이어야지 복제품을 그렇게 비싸게 주고는 안산다.

오늘 하루 아주 보람된 날이었다.


<사진은 삼성갤럭시3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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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 설계도

                                                                                              어머니는 치아가 부실하시다. 젊은 시절부터 치아가 좋지 않았다.

                                                                                               어려웠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야매치과쟁이로부터 불법시술을 받았는데 어머니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직장생활를 하고나서부터는 정식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하나 둘 말썽을 부리더니 상하기 시작했고 썩은이 빼기를 거듭한 이래 결국 틀니를 하게 되셨다.

                                                                                               나는 틀니를 하면 다 잘되는 줄 알았다. 틀니는 살을 누르고 아팠으며 씹는게 부실하였다.

                                                                                               김치나 과일도 제대로 씹기 어려웠다. 사과는 깍두기처럼 썰어서 드셔야했다.

                                                                                               그것도 대강 우물우물하여 넘기시니 위장병이 생겼다. 늘 소화제를 달고 사셨다.

                                                                                               물론 그동안 임플란트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임플란트 상담을 했더니 잇몸뼈가 12mm는 되어야 9mm정도 나사를 박고 그 위에 인공치아를 돌려끼우는데

                                                                                                어머니는 잇몸뼈가 얇아 몸의 다른 부분에서 뼈를 떼어다가 이식해야한다고 하니 병약한 어머니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어서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동네 치과의사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섰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

                                                                                                시작부터 장벽이 가로막았다. 과거 어머니의 골다공증치료약 복용이 문제였다.

                                                                                                 그 약을 복용한 경험이 있는 환자가 임플란트 시술 중 사망한 예가 있는데

                                                                                                 극히 드문 예이기는 했지만 의사가 못하겠다고 난색을 표명하고

                                                                                                내과의사에게 해도 좋다는 확약을 받아오라는데 아무도 해주지 않았다.

                                                                                                치과의사를 붙들고 통사정을 했다. 부작용은 극히 드문예라고 하니 제발 시술해달라고 사정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시술을 시작하였다.

                                                                                                드디어 지난 6개월간 고생한 끝에 왼쪽에 2개의 임플란트를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다.

                                                                                                 어머니는 이제야 제대로 씹을수 있다고 하시며 좋아하셨다.

                                                                                                소화가 잘되니 얼굴에 화색이 돌고 예전보다 훨씬 기운이 나아지셨다.

                                                                                                얼마나 반갑고 감사한 일인가! 이제 반대편 시술에 들어간다.

                                                                                                의사는 먼저 2개는 보험이 적용되지만 앞으로는 안된다며 주저하였다.

                                                                                                보험이 되고 안되고가 문제랴! 할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해달라고 하였다.

                                                                                                어제 빠리바케트에 가서 전병셋트를 사서 시술한 의사선생님께 드렸다.

                                                                                                그 동안의 임플란트 2개시술성공에 감사한 마음을 어찌 전병으로 대신하랴만 내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려 한것이다.

                                                                                                의사선생님은 잘 먹겠다고 밝게 웃으시며 받으셨다. ㅎㅎㅎ~


                                                                                                 다음 시술 계획을 들으며 잘 기억했다가 집에 와서 종이에 그렸다. 기분좋다!

                                                                                                 이 참에 장모님 이도 해드리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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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 발령

수원시 영통구에 위치한 매탄고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그 유명한 삼성전자 정문 가까이에 있는 고등학교다.

2005년에 개교하였으니 금년 3월에 에 개교10년을 맞은 학교이다.

내가 4번째 교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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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묘화^-^

 

교내 학생 작품전시회에 3학년 학생이 내 얼굴을 점으로 묘사하여 전시하였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교장선생님을 존경하여 그렸다고 한다.

특징을 잘 살려서 그렸다. 어째 마오쩌뚱 냄새가 난다. 푸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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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her in low 81th 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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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만난 명강의

지난 일주일 동안 경기도박물관에서 교원을 대상으로 하는 연수를 다녀왔다.

주제는 ‘고려와 동아시아 사회와의 소통과 교류’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장남원교수님의 강의가 아주 좋았다.

명강의 였다. 그 분이 맡은 주제는 ‘고려와 요, 금의 도자교류’ 였는데

단순히 도자기에 관한 내용만 갖고 강의하는것이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세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와 문화 전체를 아우르는 강의를 하셨다. 여성의 나이를 짐작하기는 어려웠는데 50대 중반 쯤으로 보였다.

아는것은 100인데 짧은 시간에 함축하여 20정도를 강의한다는 인상을 보였다.

거기에다 언어가 고급이었다.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마이크사용법도 정확하여 바람소리 한번 들어가지 않았다.

흔히 어줍잖은 식자층에서 많이 쓰는 했다라면, 영향을 주었다라는, 열심히 싸웠다라는, 용감하다라는, 좋았다라는 등의 했다라는 잘못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연륜이 보였는데 멀리서 보면 아주 젊은 인상이었다.  인터넷에 나온 사진은 실물보다 못했다.

좋은 강의는 결국 공부를 많이 해야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 내용은 우리가 알기에는 고려자기가 송나라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문화는 동시대의 여러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듯이 남송과 동시대에 존재했던 거란족이 세웠던 요, 여진족이 세웠던 금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특히 요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물론 송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지만 요의 영향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강의 도중에 여러가지 용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질문해서 알았다


우리가 보통 도기라고 하는 것은 비교적 낮은 온도, 1000도 이하에서 굽는 토기, 도기, 석기 등을 말하고

자기는 10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굽는 청자 백자 등을  말한다른 것을 알았다.

가만이 있으려다 진짜 몰라서 물었다.


그리고 고려 상감청자가 세계 최초의 상감기법을 쓴 것이 아니고

이미 기원전 2000년에 이집트에서 상감기법을 썼으며 중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상감기법을 사용해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받아들여 고려에서 상감청자를 만들었고  그 상감청자가 세계최고의 품격을 가졌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세계최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최초도 두번째 사람이 더 잘만들면 별거아니라는 것이다.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세계 최초의 고려상감청자 이렇게 말하면

중국이나 일본의 학자들이 어이없어 하니 앞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말하고 하였다.


그리고 고려에서 청자에다 금을 입히는 등 사치가 심하여

국왕이 이를 금하고 나서부터 금을 못쓰게 하니 비싼 재료가 아니면서도 화려한 상감기법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의 점토가 입자가 곱고 좋아서 즉 처음의 태토가 좋아야 상감을 해도 곱게 나온다고 했다.

중국이 상감을 일찍 개발 했어도 흙이 우리만큼 곱지 못하여 고려청자만큼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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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자기가 중국의 남북으로부터 모두 영향을 받았음을 보이는 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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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에 금과 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뒤부터 상감청자가 발달하여 14세기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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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일대에서 발견된 10세기기 상감청자 조각들이다.

10세기에서 이미 상감청자가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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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발견된 상감청자 도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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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에 검을 흙을 입히고 칼로 파낸다음 백토를 넣어 상감한 고려도자기인데 학의 문양이 현대적 추상무늬다.

내가 강의하는 교수에게 이중섭의 회화를 보는듯하다고 했더니 그렇다고 맞장구쳐주었다.

강의가 정말 좋아 쉬는 시간에 사진을 좀 찍겠다고 양해를 구하였다. 핸드폰으로 ppt영상을 찍었는데 강의에 방해가 되어 미안하였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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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her in low 81th 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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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의 81th 생신을 맞아 처가 근처에 있는 한정식집에서 점심을 사드렸다.

오래된 한정식집이었는데 그런대로 음식이 괜찮았다.

숫불에 등심을 굽는 한정식코스요리였다.

쇠고기는 부드러웠고 고기를 굽은 종업원의 솜씨가 좋았다.

도미회 무침이 좋았다. 나는 회를 잘 먹지 않는데 도미를 썰어 초장을 넣고 야채와 버무렸는데 맛이 좋았다.

장모님께 금년을 넘기지 말고 건강검진을 받으시라고 말씀드렸다.

아직껏 큰 병은 없으신데 그 점도 감사한 일이다.

장모님께 용돈을 드렸다.

처제는 아들이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하였다. 감사한 일이다.

대전에 조문갈 일이있어서 처가에 들리지 못하고 음식점에서 나와 헤어졌다.

대전행 KTX 열차를 타고 나장규선생님 부친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조문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밤 10:30분이다.

피곤하여 금방 잠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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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선원사에서

팔만대장경을 조판했다고 알려진 강화도 선원사에 들렸더니 박정희 대통령 사진을  상설 전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주지가 박정희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18년이나 집권하여 내가 어린시절부터 대통령이었으니 그를 매체를 통해서 많이 보았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지나고

여러 대통령을 거치는 동안 그의 모습은 나에게  잊혀졌다. 오늘 사진으로 다시 보니 박정희 대통령이 새롭다.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니 더욱 새롭다.


박정희……

4.19 이후 거리는 매일 데모대로 넘쳐났고 사회는 혼란했으며 장면정부는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했다.

그 틈을 타고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를 스스로 작곡하고 어떻게 하면 국민을 잘 먹일 수 있을까하는 걱정에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나라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1970년대 연평균 경제성장률 7% 이상으로   20여 년간 세계 최고였다.


3선 개헌,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규정을 철폐한 유신헌법,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자기가 계속해서 대통령을 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한국적민주주의라는 명분이 당시 나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국가법질서 체계가 무너지고 모든 것을 데모로 해결하려하며 공권력이 무너지는 작금의 현실을 보니

한국적민주주의라는 것이 실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 한국적 민주주의도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했다. 모든 것이 내가 아니면 안된다라는 생각이

나라와 자신을 망쳤다. 그가 다른 이들 처럼 뒷돈을 챙기지 않은 것을 보면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하여 효율적 자원배분곽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 대기업위주의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수출산업 성장을 위해 노동자 농민들의 이익은 제한되었고 고통을 감내해야했으며 그결과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하였다. 동아링보 광고탄압 등의 언론탄압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 중에서 OECD에 가입하고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바뀌고

세계 수출 7위의 위업을 달성한 나라는 코리아 뿐이다. 그런 기초를 제공한 사람이 박정희인것은 맞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과실도 있다. 박정희가 죽었다는 뉴스를 듣던 아침이 생각난다.

아! 그날 영원히 갈것처럼 공고했던 박정희 정권이 끝나던 날, 역사는 흐르며 영원한 권력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김일성 권력보다 더 짧게 끝날 줄이야. 김일성은 세계사에도 없는 3대세습불법독재정권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으니……


박정희의 사적인 사진을  보니 그는 권위적인 지도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에서의 미소도 권위가 잔뜩 들어가있고 모내기 사진에서도 옆사람과 너무 비교되는 이른바 썩소다(썩은 미소)

그가 격의 없는 활짝 웃음을 내보이는 것을 본적이 없다. 두딸의 어깨를 잡고 있는 사진은 더하다. 저런 아버지와 사진찍고 싶을까? 옛날 사람이라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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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사진에서도 권위가 들어가 있다. 옆사람과 너무 비교되는 이른바 썩소다(썩은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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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딸의 어깨를 잡고 있는 사진은 더하다. 저런 아버지와 사진찍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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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질을 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서민적이다. 빗자루도 평범하고 값싼 대비다.

박정희대통령이 국민의 배고품을 걱정하고 나라 경제를 일으키려 애쓴 대통령은 맞다.

그는 전대미문의 세계사적 기념비에 해당하는 20여년간 연평균경제성장률 7%를 이룩한 대통령이며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과실도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 점이 안타깝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3번만 하고 유신헌법 직전에서 사퇴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로 나는 집에 이승만대통령 사진을 마루에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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焉知, 問仁, 新雨, 多情, 騎牛, 牛夫, 牽牛

붕우 남기완으로 부터 내 雅號를 몇개 지었으니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쓰라는 연락이 왔다.

참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내게 보내온 편지글 전문을 실어본다.

아내와 의논하여 수일내로 결정할 것이다

전부 다 맛좋은 것이어서  어떤 것을 먹어야할지 그저 행복한 고민이다.

내가 무슨 복이 많아 이런 호사를 누리는지

기완아! 고맙다. 기다려라 이 웬수 기필코 값겠다!! ㅎㅎㅎ~


< 적당한 사진이 없어 몇 년 전 마라톤에 출전한 사진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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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기호의 雅號를 지어보려 생각은 줄곧 해왔으나, 정말 어려워서 미루고 미루어 왔는데,
요즘 맹기호 시가 나오기 시작하여 더는 미룰 수
없어서 몇 개 생각해 봤어.

마음에 들면 골라 쓰고 마음에 안 들어도 좋고 : 

맹기호 아호
짓기
:


1. 焉知


焉知 : 논어 ‘未知生 焉知死’



‘어찌 알겠는가?’로
끝없이 묻고 진리를 찾아가는 정신의 표현.



*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계로문사귀신. 자왈: 미능사인, 언능사귀? 왈: 감문사. 왈: 미지생, 언지사)”



論語(논어) 先進(선진)편에 출전한다.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여쭈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도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감히 죽음에 대해 여쭙습니다.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 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



공자가 말했다. 뒤에 태어난 사람이 가히 두렵다. 어찌 오는
사람들이 이제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으랴.

40이 되고 50이 되어도 명성이 들리지 않으면, 이 또한 두려워할 것이 못될
뿐이다.



 2. 問仁



어떻게 하면 어질고 멋지게 살 수 있을까 늘 고뇌하는 모습을 담아서



 司馬牛問仁. 子曰 : “仁者其言也?.”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樊遲問仁, 子曰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



: 번지(樊遲)가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거처함에 공손하며 일을 집행함에 공경하며 사람을 대하기를 충성스럽게 함을,

비록 이적(夷狄)의
나라에 가더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 -자로편(子路篇) 19장(章)-



3. 新雨(막 내린 비)



늘 새롭고 상큼함을 추구하는 마음, 늘 일신우일신하는 마음을
담아서



 唐詩, 王維의 오언율시 ‘山居秋暝’ :



空山新雨後, 天氣晩來秋. …………..



* 新月 :
초승달



 4. 多情



소동파가 詞를 삼백여 수 썼는데 ‘多情’이란 말을 유난히
많이 썼으며, 이는 매우 특이한 점이다.

호방한 문인임에도 ‘多情’이란 말을 매우 좋아 했다는 것인데,

맹기호의 ‘다정함’(정이 많음)과 혹시
통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름도 그렇지만 ‘최고로 좋은’ 그런 것은 없는 것 같아.
내가 좋아해야지 좋은 것이지.

더 생각해 볼게~~


from  기완


<또 기완이가 오늘 아호를 또 보내왔다>


 

맹교장,

최고의 정승 고불 맹사성의 후손으로 사는 것을 늘 잊지 않으려 :  
5. 騎牛, 牛夫,
牽牛

– 騎牛 : 맹사성의 ‘騎牛’를 본받는
의미에서

– 牛夫 : 맹사성의 마부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소를 끄는 것이니馬夫가 아니라 牛夫

– 牽牛 : 소를 끈다는 뜻을 직접 표현

* 두산백과 :

기우[ 騎牛 ]

소를 타고 다니는 일. 소를 타고 다니는 풍습은 교통수단으로 이용한
경우와 순전히 풍류적인 멋으로 되는 경우가 있다.

기차나 자동차 같은 교통기관이 출현하기 전에는 주로 말[馬]을 타고 다녔으나,

가까운 거리나
바쁘지 않은 용건으로 왕래할 경우에는 소를 타고 다니기도 하였다.

소의 걸음은 말보다 느리지만, 소를 타는 재미는 느릿느릿한
걸음에 있다고 한다.

소를 탈 때 안장을 얹으면 소의 등에 사람이 앉게 되지만, 안장 없이 탈 때는 소의 등줄기 엉덩이 위에 앉는 것이 가장
편안하다.

《독좌문견일기(獨坐聞見日記)》에 보면, 세종 때에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孟思誠)은 고향인 온양을 왕래할 때 늘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또, 《기문총화(記聞叢話)》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맹사성이 소를 타고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용인에서 비를 만나 어느 여관에 묵었는데, 먼저 들어온 선비가 불러서 장기를 한 판
두고,

심심풀이로 공(公)자 당(堂)자로 문답을 했는데, 먼저 맹정승이 “무슨 일로 서울에 가는공” 하니, 선비가 “녹사시험 보러 간당”
하였다.

녹사(錄事)란 의정부에 딸린 아전벼슬이므로, 맹정승은 “그러면 내가 좀 도와줄공” 했더니,

정승인 맹사성을 알아보지 못한 선비는 화가
나서 “아니꼽당” 하였다.

그 후 선비가 시험을 치르는 차례에 따라 좌의정 앞에 나온 것을 맹정승이 알아보고 “어떠한공” 하였더니

선비는 깜짝
놀라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죽여 주사이당” 하였다.

그래서 의아해 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맹사성이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한바탕 웃었다는
것이다.

그 선비는 맹정승의 도움으로 벼슬에 올랐으며, 이 일은 ‘공당문답(公堂問答)’이라고 전한다.

《해동잡록(海東雜錄)》 《동문선(東文選)》
《양촌집(陽村集)》에도 기우설(騎牛說)이 나오는데,

평해(平海)사람 이행(李行)은 호(號)를 기우자(騎牛子)라 하며,

달밤에 소를 타고 호리병에
술을 채워가지고 산수 좋은 곳에 가서 놀며 사나이의 호탕한 기개를 길렀다고 한다.

《패관잡기(稗官雜記)》에도 진사 이별(李鼈)이 소를 타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으며,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조석간(趙碩澗)도 날마다 소를 타고 왕래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매산잡지(梅山雜識)》에는 안주 서촌에 사는
김(金)이라는 사람이 저자에 갔다가 소를 타고 밤에 집으로 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나 해치려고 덤비는 것을 소가 나서서 호랑이를 상대하여
싸웠는데,

새벽에 이르러 소도 호랑이도 다 죽고 사람만 살아나서 그 소를 의리 있는 소라고 하여 의우총(義牛塚)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 밖에도 《삼연집(三淵集)》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율곡집(栗谷集)》 등에는 기우가(騎牛歌)가 실려 있다.

소를 타는 풍습은 그림의 소재로도 다루어져서 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목동의 한가로운
모습을 묘사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기우목동(騎牛牧童)》이나,

해질녘에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그림, 너울 쓴 여인이 소를
타고 나들이하다가 나귀를 타고 가는 남자들과 마주친 광경 등은

한국의 기우 풍속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우
[騎牛] (두산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마부[ 馬夫 ]

말을 타고 갈 때에 고삐를 잡고 앞에서 끌거나 뒤에서 따르는 사람.

[네이버 지식백과] 마부
[馬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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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천

동화작가 윤수천 선생님 댁에 다녀왔다.

수원문인협회장, 경기문인협회장을 지내신 문단의 원로이며 동화작가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분이다.

윤수천 선생님은 동화책을 80여권을 내셨다.

그 양만 대단한 것이 아니라 동화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여러번 실렸고

교보문고 아동 베스트셀러에도 여러번 그 분의 동화가 올랐다.


그 분 집 담벼락에 수원시에서 동화에 등장하는 어리이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해서

축하해주기 위해 모임을 가졌다.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길에서 시원한 음료와 수박을 먹었다.

2차로 저녁식사를 했는데 음식값은 인세를 많이 받았다고 하시며 윤수천 선생님이 모두 내셨다.

문인 40여명이 모여 축하해주었는데 윤수천 선생님은 수원의 자랑거리이기도 한 분이다.

그 분과 교우하게 되어 감사하다.

고령에도 동화를 쓰시는 윤수천 선생님은 마음이 어린아이 같으신 분이다.

금년에도 ‘담구멍친구’라는 동화책을 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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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천 선생님댁 문패이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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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 -IMG_20150805_18295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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