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살 때 읽었던 영국 섬머싯모옴의 장편소설 ‘면도날’을 여러 날에 걸쳐 다시 읽었다. 주인공의 이름이 ‘래리’다.
나는 소설 속의 주인공 래리를 평생을 통해서 좋아했다. 젊은 날 ‘면도날’을 일고 느꼈던 진한 감동이 또 다시 전해왔다.
래리는 비행사로 참전 중 자신을 돕기 위해 전우가 총상으로 죽는 장면을 목격하고 인생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삶은 무엇인가? 신은 있는가? 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직면한다.
그는 아름다운 약혼녀 이사벨에게 내면적 사유를 위해 공부할 시간을 달라고 하지만 이사벨은 파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그러나 이사벨은 평생 래리를 잊지 못하고 죽도록 사랑한다. 래리는 무섭게 책을 읽고 그리고 여러상활을 경험하며 인생의 의미를 알기위해 여러나라로 구도의 길을 떠난다.
어떻게 보면 평생을 구도자로 사는 나에게 ‘래리’는 나의 분신이다. 래리만큼 치열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래리의 탐구를 통해 나를 본다.
내가 중요하게 읽은 부분을 책에 있는 그대로 타자를 쳐서 옮겨 본다.
한시간 전까지도 쌩쌩하던 사람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있던 것이 떠올라.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산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삶이란 눈먼 운명의 신들이 만들어 낸 비극적 실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않을 수가 없어
약혼자 이사벨은 특정한 방식으로 교육받으며 자랐고, 또 그러면서 배운 원칙들을 받아들이고 지키며 사는 여자였다.
부족함이 없이 원하는 것은 늘 가지고 살았으므로 돈에 목을 매지는 않았지만 돈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돈은 곧 힘과 영향력을 의미했고 사회적 지위도 의미했다.
래리는 나를 보자 얼굴이 환해지면서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래리는 얼굴이 창백했지만 천진난만하고 매력적인 미소는 여전했다.
래리가 워낙 쾌활하고 명랑했으므로 대단히 심보가 삐뚤어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종사 팻시는 아일랜드인이었어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활기가 넘쳤죠. 웃는모습도 재미나서 누구든 보면 웃음이 났어요.
무모한 구석이 있어서 깜짝 놀랄 일도 자주 저질렀어요. 겁이 없어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세상에서 가장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활짝 지었어요.
둘이 휴가를 떠나기 전 날 적진을 정찰하라는 명령을 받았죠. 정찰 도중에 독일 전투기 몇대와 치열한 공중전을 하게 되었고 나를 공격하는 적기를 내가 먼저 해치웠어요.
그런데 또 다른 녀석이 바짝 붙어 공격하는거예요. 이제는 끝장이라고 생각했죠. 바로 그 때 팻시가 번개처럼 달려와 녀석에게 사격을 퍼부었어요.
얼마후 적기들은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방향을 돌려 가버렸고 우리도 기지로 돌아왔어요. 팻시의 비행기는 먼저 들어와있었는데 보니까
사람들이 부상당한 팻시를 끌어내고 있었어요. 래리! 네 뒤에 있던 놈을 내가 해치웠어!
그리고 팻시는 쓰러져 죽었어요. 겨우 스물둘이었는데….전쟁이 끝나면 아일랜드에 있는 아가씨와 결혼할거라고 했는데…..
그건 래리도 전해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일이었을 거야
그 일로 인해 인생의 무상함을 강렬하게 느꼈을 거야
그리고 이세상의 죄악과 슬픔에 따르는 보상 같은 것들에 대하여 고뇌하지 않았을까 싶어
왜 이런데서 사는거야? 국립도서관과 소르본대학이 가깝거든. 저책은 뭐야? 그리스어 사전이야. 걱정마 사전이 너를 잡아먹진 않으니까.
그리스어를 왜 공부해? 그냥 그러고 싶어서. 파리에 와서 줄곧 뭘 했는지 말해줄 수 있어? 책을 좀 많이 읽었어. 하루에 여덟 시간에서 열시간 쯤.
소르본대학에서 하는 강의도 들었고, 프랑스 문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다 읽은것 같아. 라틴어도 읽을 줄 알아.
그런 것들은 배워서 뭘해? 지식을 얻는거지. 래리는 웃었다. 래리! 그러나 그런것들은 현실적으로 쓸모없는것 같은데…
그렇지않아 굉장히 재미있어. 오디세이아를 원문으로 읽은 것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지 몰라
뭐랄까 발끝으로 서서 손을 한껏 뻗으면 별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지난 두달간은 스피노자를 읽었어. 굉장히 흥미로왔어. 산악지대에 있는 드넓은 고원에 비행기를 착륙시키고 내려선 기분이야
마치 와인을 먹고 취한것처럼 고독감과 맑은 공기에 취하지 정말 흥분되고 행복한 기분에 젖게 돼
시카고에는 언제 돌아올거야? 2년이 지나도 원하는것을 얻지 못하면 돌아온다고 그랬잖아
잘모르겠어.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 이제 뭔가 조금 보이려고 하니까
이사벨!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진 드넓은 정신세계가 나를 부르고 있어 난 그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해
거기서 뭘 찾고 싶은데?
내 의문에 대한 답들,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확실히 알고 싶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도 또 내게 불멸의 영혼이 있는지 아니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지 알고 싶어
하지만 래리 그런 질문은 수천년부터 사람들이 물어온 것이 잖아 만일 해답이 있다면 벌써 밝혀졌을 거야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그런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그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
게다가 답을 찾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야 다양한 대답들이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는 대답을 찾아냈어
예를 들면 로이스부르크 처럼. 그 사람이 누군데? 14게기 플랑드르의 신비론자야
래리! 그런 문제를 푸는데 얼마나 걸릴것 같아? 음….5년쯤 아니 10년이 걸릴지도 몰라
그런 다음에는 어쩔건데? 내가 해답을 얻는다면 그걸로 무엇을 할지도 알 수 있을 만큼 지혜로워지겠지
이사벨 내가 제안하는 삶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풍성한지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지 당신에게 알려 줄 수만 있다면
그건 정말 끝없는 즐거움이고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행복이야
그 때 느끼는 흥분이란 세상 그 어떤 권력과 명예를 준다해도 바꾸고 싶지 않아 얼마 전 데카르트를 읽었어 그 평온함, 품격, 명석함이란!
하지만 래리 당신은 내게 맞지도 않는 삶을 요구하고 있어 내가 관심도 갖고 싶지 않는 삶 말이야 난 그저 평범한 여자야
몇번이나 말해야 알겠어 난 이제 겨우 스무살이야 10년이면 늙어버릴거야 래리 난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 지금 시간이 있을 때 삶을 즐기고 싶어
래리 제발 부탁이야. 당신이 말하는 삶은 시시해 당신은 남자야 남자다운 일을 하란 말이야
당신이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그런 헛된 꿈 때문에 나를 포기하지는 않겠지?
안돼 이사벨 그럴수 없어 그건 내게 죽음과도 같아 영혼에 대한 배신이야
윌리엄 섬머셋 모옴(1874-1965)
그해 여름을 줄곧 파리에서 지냈고 쉬지 않고 공부를 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공부를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년간 매일 8시간 내지 10시간씩 공부를 했으니까요.
탄광으로 가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몇달을 육체노동을 해보는 것도 좋을것 같아서요.
생각을 정리하고 또 나 자신을 정리하는 기회가 될것으로 생각했어요.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엉뚱한 행동을 한 이유가 이사벨과의 파혼이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수 없다.
하지만 이사벨을 잃은 것은 래리에게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탄광에서 함께 일한 파트너 폴란드 사람인 코스티는 술에 취해 신비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에게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예요.
전에 마테를링크가 로이스부르크에 대해 쓴 글을 파리에서 읽은 적은 있지만 신비주의에 대하여 자세히는 몰랐어요.
그런데 코스티는 플로티노스, 디오니시우스, 구두장이 야코프뵈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까지 줄줄이 꿰더군요.
그렇게 거구의 술고래한테서 세상과 단절하고 사는 냉소적인 사내의 입에서 사물의 궁극적인 실체니 신과의 합일에서 오는 행복이니
하는 얘기들이 나오는 걸 듣고 있으니 정말 묘한 기분이었어요.
그는 무에서 무는 나올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리고 이세상은 영원성의 현시라고 말했어요
게다가 이런 말도 했어요 선 뿐만 아니라 악 역시 신의 직접적인 현현이라고 말했어요.
그래 탄광에서 그런 경험을 한 후에 뭔가 얻었나? 물론 입니다. 래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말하고 싶을 때는 기꺼이 말을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을 때는 질문을 피해 대충 화재를 다른 쪽으로 얼버무려 아무리 캐봐도 소용없었다.
섬머셋 모옴
이사벨! 세월이 이렇게 많이 지났는데 아직도 래리를 사랑해? 미치도록요. 평생 다른 사람은 사랑해본적도 없어요. 그런데 왜 그레이와 결혼했지?
결혼은 해야 했으니까요. 그레이는 저에게 푹 빠져있었고 엄마가 원하셨어요. 저도 그레이가 정말 좋았구요. 지금도 그래요 그가 얼마나 자상한 사람인지 몰라요.
저한테는 늘 천사같아요. 늘 갖고 싶은게 없냐고 물었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갖게 해주는 일이 자기에게 너무 즐거운 일이라는 거예요
그레이를 진짜 사랑했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사랑없이도 잘 살 수 있다구요. 마음속 깊이 래리를 갈망했지만 눈 앞에 안보이니까 그럭저럭 버틸수 있더라구요.
이사벨! 래리가 정말 너를 사랑했었을까? 그녀는 등을 꼿꼿이 세웠다.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두눈은 화가 난둣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사랑했죠. 여자라면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정도는 안다구요!
래리는 숫총각일까요? 이사벨 그 친구 벌써 서른두살이야.
분명히 숫총각일거예요. 어째서? 여자라면 그 정도는 직감으로 알수 있어요.
내가 아는 어떤 젊은 친구는 예쁜여자만 보면 숫총각이라고 말하면서 여자를 사귄다는거야
뭐라고 하시던 상관안해요 그냥 제 직감을 믿을래요
래리는 조수석 등받이 위로 팔을 뻗어 걸쳐놓았는데 셔츠의 소매가 올라가서 가늘지만 강인한 팔목과 팔뚝이 드러났다.
팔뚝을 가볍게 덮고 있는 솜털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나와 황금빛으로 빛났다. 순간 나는 이사벨의 몸이 경직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마치 최면에 걸린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호흡이 빨라지면서 두 눈은 금빛 솜털로 뒤덮인 강인한 손목에 고정되었다.
나는 사람의 얼굴에서 그토록 강렬한 욕정을 본적이 없다. 미치 색욕의 가면 같았다.
그 아름다운 이사벨의 얼굴에 그토록 방자하고 음탕한 표정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라기 보다 짐승에 가까웠다. 미치 교미중인 암캐의 얼굴을 보는듯했다.
이사벨 네가 래리를 포기한 것은 다이아몬드와 모피코트 때문이었잖아!
그러나 나는 이사벨만 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이사벨의 코는 나폴리 박물관에 있는 프시케의 코와 똑같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을 상징하는 프시케 말이야 게다가 이사벨은 다리 곡선도 예술이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것은 이사벨의 손이야 손이 움직일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오지 꽃같기도 하고 하늘을 나는 새같기도 하고
래리가 오랜 시간 동안 무엇을 찾아다녔는지 알수있을것 같다고 말하셨죠? 그게 무엇인가요?
내 생각에는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머리와 가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인생의 규칙같은 것을 찾지 않았을까 해…..
래리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아무래도 시대를 잘못 태어난것 같아요.
신앙을 당연히 받아들이던 중세에 태어났어야 하는건데 그랬다면 제길이 확실히 정해져 있었을 테니 저도 수도회에 들어갔겠죠.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믿음이 생기지 않았어요. 저도 믿고 싶었는데 하느님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수사들이 암송하는 주기도문을 듣고 있으면 저들은 어떻게 한치의 의심도 없이 꾸준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아이들은 자기 아버지한테 양식을 달라고 간청하는 것보셨습니까? 아이들은 아버지가 당연히 먹여줄 거라고 믿잖아요.
아버지가 음식을 준다고해서 고마워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죠. 오히려 낳아놓고 제대로 못먹이거나 안먹이면 우린 그런 사람을 비난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당신의 피조물에게 물질적으로 영적으로든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 준비가 안되었다면 창조하지 말아야죠.
맙소사 래리! 중세에 태어나지 않은것이 천만 다행이네 중세라면 틀림없이 화형당했을 테니까말이야
2
시간이나 타자를 쳤다. 자꾸 넘어가는 책을 한손으로 누르면서 타자를 치니 힘들다. 또
눈이 아프다. 오늘은 여기서 그치고 다음에 다시 올려야겠다.
섬머셋 모옴 91살이나 살았다. 만년의 사진인듯 싶다
선생님은 크게 성공하신 분이잖아요 그렇다고 대놓고 칭찬을 하면 좋으시겠어요?
그러면 민망하겠지.
저도 같은 생각이예요. 하느님이 대놓고 칭송받길 원한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어요.
육군 항공대에 있을 때 편한 일을 하려고 사령관한테 아첨하는 녀석들은 동료들이 전부 싫어했어요.
하느님이라고 집요하게 아첨해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실까요?
하느님 역시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가장 유쾌한 숭배 방식으로 여겨야 하는것 아닙니까?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한 존재잖아요. 인간을 죄를 지을수 있는 존재로 창조했다면 그건 하느님이 의도한 때문이겠지요.
내 집에 키우는 개한테 누가 오면 무조건 목을 물어뜯도록 훈련시켰다면
정말 개가 뒤뜰에 들어오는 사람을 물어뜯었다고 해도 때려서는 안되는거죠. 그건 정당하지 않은 겁니다.
선량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대체 악은 왜 창조한 것입니까?
수도사들은 자기 안에 있는 사악함을 무너뜨리고 유혹에 저항하며 고통과 슬픔과 불행을 하나님이 내리는 시련으로 받아들이면 결국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된다고 했죠.
그건 마치 심부름을 보내면서 길을 험난하게 만들고 미로를 만들고 해자를 두르고 마지막에는 벽을 만드는 것과 똑같은것 아닙니까?
저는 상식이 없는 하느님은 믿을 수 없어요. 수도원에 있는 신부들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의문들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 못했어요.
엔스하임 신부에게 작별인사를 하러갔을 때 그저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정한 눈으로 저를 보았어요.
제가 말했어요. 신부님에게 실망을 안겨드린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은 안믿지만 매우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찾아낼것입니다.
당신은 반드시 돌아올것입니다. 이곳이 될지 아니면 다른 곳이 될지는 오직 하느님만아 아시겠지요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후 인도의 봄베이에 도착했어요. 저는 동굴을 구경하러 엘레판타섬으로 갔습니다.
머리가 셋달린 커다란 반신상을 보면서 저게 무얼 의미하는걸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반신상은 창조자 브라마, 수호자 비슈누, 파괴자 시바입니다. 궁극적 실재의 3대 현시들이지요. 잘 이해가 안가는데요. 제가 이렇게 대꾸하자
그는 저를 비웃기라도 하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했어요. 당연하지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신은 신이 아닙니다. 어느 누가 무한한 존재를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브라만교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는 저는 계속 그 신비한 세의 두상을 보고 있었죠. 그리고 가슴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인도가 제가 반드시 가져야할 무언인가를 갖고 있다는 강렬한 확신이 드는 겁니다.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느낌,
바로 그 순간에 그곳에서 그것을 잡지 않으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그길로 원주민 마을로 들어가 호텔을 찾았습니다.
라마크리슈나 선교회(흰두교의 성인 라마크리슈나의 삶에 구현된 베단다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인도의 종교단체)에 가서 엘레판타섬에서 말을 걸었던 수행자를 찾았죠.
그가 바라나시로 가자고 해서 열차를 타고 함께 갔습니다. 그날 저녁 그가 저를 배에 태우고 갠지스강으로 데리고 나갔어요. 정말 신나는 경험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풍경은 더 굉장했어요. 수천명의 사람들이 강가로 내려와서 정화 목욕을 하고 기도를 올리는게 아니겠습니까?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남자가 중요한 부분만 천으로 가리고 벌거벗은 상태로 두팔을 뻗고 태양을 향해 기도를 올리더군요.
제가 받은 인상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어요. 바라나시에서 6개월을 머물면서
몇번이고 새벽에 갠지스강으로 내려가 그 기묘한 광경을 보았어요. 그 경이로움은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지요.
어떤 조건도 없이 한치의 의심도 없이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기도를 올렸던 겁니다.
힌두교에 대하여 잘 아세요? 거의 모르지. 틀림없이 선생님도 흥미로워하실 것입니다.
우주에는 시작이나 끝이 없다는 사상, 생성되었다가 안정되고 안정에서 쇠퇴로 쇠퇴에서 해체로 해체에서
다시 생성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는 사상보다 더 굉장한 사상이 있을까요?
그럼 힌두교도들은 그처럼 끊임없는 순환이 왜 일어난다고 생각하나? 그것이 절대자의 본질이라고 하겠죠.
그들은 창조의 목적이 전생의 업보나 공적을 벌하거나 상주기위한 무대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렇다면 영혼의 윤회가 전제되어야 겠군. 전 인류의 2/3가 영혼의 윤회를 믿고 있어요.
그렇다면 영혼은 바뀌지않고 전생의 업보나 공적에 따라 끝없이 몸만 바뀐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는건가?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
윤회가 세상의 악에 대한 설명이 되는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우리가 겪는 나쁜 일들이 전생에 지은 업보라면 그저 단념하고 견뎌 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요?
그 과정에서 선을 추구하면 다음 생에서는 고통이 줄어들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구요.
자신이 겪는 악이나 불행은 비교적 쉽게 견딜 수 있죠. 약간의 강인함만 있으면되니까요.
반면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 종종 너무나도 부당하게 보이는 일들은 더 받아들이기가 힘들죠.
그런데 그것이 업보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애석한 마음도 들고 고통을 분담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겠죠.
그게 마땅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그에 대해 분개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신은 왜 처음부터 고통이나 불행이 없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은거지? 그랬다면 개인이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결정하던 득이 될것도 없고 실이 될것도 없었을것 아닌가?
힌두교 사람들은 처음같은 것은 없다고 말할겁니다. 개인의 영혼은 우주와 함께 영겁토록 존재해 왔으며 그 성격은 전생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윤회에 대한 믿음이 실질적으로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 결국은 그게 중요한 거지.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한 남자의 경우 그러한 믿음이 삶에 아주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거든요. 바라나시에 있는 친구로부터 어떤 사람을 소개받았는데 재무장관이었어요.
유럽에서 교육을 받고 옥스퍼드에서 살다 온 사람인데 진보적이고 박식하며 깨어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옷도 유럽식으로 입고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이었어요.
그집 정원이 넓어서 우리는 나무 그늘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죠. 아내도 있고 다 큰 자녀도 있었어요.
누가 봐도 영국에서 교육받은 인도인의 전형이었는데 1년 후 그 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때 저는 혼비백산 했답니다.
쉰살이 되면서 안정적인 자리에서 물어나 재산을 전부 아내와 자녀들에게 주고 세상으로 나가 탁발 수행자가 된것입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친구들도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기이한 행동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받아들였다는 거죠.
언젠가 저는 그 분에게 물었습니다. 장관님께서는 매우 자유분방하시고 세상에 대해서도 많이 아시고 과학, 철학,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책도 많이 읽으셔는데 그런데도 진정 윤회를 믿으십니까?
그러자 그분의 얼굴이 변하더군요 몽상가의 얼굴 같았어요. 그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무슨 말씀이십니까? 윤회를 믿지 않으면 제 삶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겁니다.
래리 자네는 윤회를 믿나?
어려운 질문이네요.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 서양인들은 동양인처럼 맹목적으로 윤회를 믿을 수는 없을것 같습니다.
동양인들은 피와 뼈에 윤회가 뿌리박혀 있지만 우리에겐 그저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죠.
저는 믿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안믿지도 않습니다.
제가 겪은 아주 기묘한 경험을 말씀드릴게요. 아슈라마에서 있을 때의 일이예요, 어느 날 밤 제 작은 방에서 인도 친구들이 가르쳐준 명상을 연습하고 있었죠.
양초에 불을 붙이고 그 불꽃에 정신을 집중시켰어요. 그러자 얼마후 그 불꽃을 통해 저편에 길게 줄지어 선 사람들의 형상이 보이는 겁니다.
꽤 분명하게 보였죠. 맨 앞에는 할머니. 다음에는 마른 유태인이 서있었어요. 그 뒤에는 쾌할하고 혈색좋은 청년이 있었어요.
그 뒤에도 사람들의 형상이 끊임없이 늘어서 서있었어요. 마치 영화를 보려고 줄을 선 사람들처럼, 하지만 세사람을 제외하곤 모습을 정확하게 알아볼수는 없었어요.
얼마 후 그들은 전부사라졌죠. 물론 제가 깜박 졸다가 꿈을 꿨는지도 모르죠. 아니면 희미한 불꽃에 집중하다가 일종의 최면상태에 빠졌을 수도 있구요.
그랬다면 제가 지금 선생님을 보는 것처럼 뚜렷하게 목격한 세사람은 제 잠재의식에 있던 모습이 튀어나온 거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저의 전생일수도 있어요. 제가 얼마전까지 뉴잉글랜드에 사는 할머니 일수도 있습니다. 그전에는 레반트의 유태인이었구요.
또 그전에는 세바스찬 캐벗이 브리스틀을 출발한 직후쯤에 웨일스의 황태자 핸리의 궁정에 있던 멋진 신사였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죠
다음에 트라방코르트로 가려했는데 그곳에 가면 가네샤씨를 만나보라먼서 이렇게 말했죠.
당신이 찾는 것을 줄겁니다.
그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그는 그저 미소만 지었어요.
그리고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길을 떠났어요.
그 목표가 뭐였지?
환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거죠.
베단타 철학자들은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자아를 아트만이라고 부르죠.
그들에 따르면 아트만은 육체와 육체의 감각들 정신과 정신이 가진 지식과 구분되는 겁니다.
절대자의 일부가 아니라 절대자 그 자체죠. 무한한 존재인 절대자에게는 일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영겁토록 존재해온 것이기 때문에 마침내 일곱가지 무지의 베일을 벗게 되면 다시 처음 상태 즉 무한의 상태로 돌아가는 거죠.
바다에서 증발한 물이 소나기가 되어 산에 내렸다가 다시 평원을 지나 다시 바다에 도달하죠. 그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1946년에 면도날이 미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진것을 알았다.
남자는 타이론파워, 여자배우는 진티어니
다시 볼수 있으면 좋으련만…..
래리 절대자는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나?
실재라고 할까요? 사실 정확히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아닌지만 말할 수 있죠. 그건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도 사람들은 그것을 브라만이라고 부르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 만물에 내재되어 있지만 동시에 만물에 의존하는 대상.
사람도 아니고 사물도 아니며 원인도 아니죠. 속성도 없구요 항구불변도 가변도 초월한 전체이자 부분이고 유한하면서도 무한한 존재예요.
시간에 따라 완성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영원하죠. 그것은 진리이자 자유입니다.
오늘 여기까지만 타자하고 나중에 다시 나머지를 올려야겠다 피곤하다.
자네가 대체 무엇때문에 그렇게 확고한 믿음에 매료되었는지 궁금하군? 그건 말씀들릴수 있을것 같네요. 저는 오래전부터 종교를 구원의 필수조건인것 처럼 떠벌리던 종교 창시자들에게서 서글픈 마음을 갖고 있어요. 마치 사람들의 믿음을 얻어야만 자신도 스스로 믿을 수 있는 것처럼 느껴젔거든요. 그들을 생각하면 고대 이교도의 신들이 떠올랐죠. 독실한 신자들의 봉헌물이 없으면 힘을 잃고 마는 그런 신들 말입니다. 아드바이타는(베단타의 가장 영향력있는 학파) 믿음을 요구하지 않죠. 그저 실제에 다가갈려고 하는 열렬한 열망만을 요구할 뿐입니다. 현재 인도에 신을 경험했다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요. 제가 알기만도 수배명이죠. 사실 저는 인식을 통해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이후 인도의 현인들도 인간의 결점을 깨닫고 사랑을 통해 혹은 의로운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시인하긴 했지만 가장 어렵고도 고귀한 수단은 단연 인식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았죠. 인식이라는 수단은 인간의 가장 귀한 능력 즉 이성이니까요. 여기서 분명하게 밝혀둘 것이 있다. 나는 베단타라는 철학 체계에 대하여 설명을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럴 만한 지식도 없지만 설사 있다고 해도 여기에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긴 대화를 나무면서 래리는 수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이 책이 소설인 이상 그의 얘기를 전부 싣는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대상은 바로 래리이다.
트라방코르에 가서 보니 가네샤 씨에 대하여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어요. 그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아슈라마에 도착하여 찾아가니 가네샤씨가 명상하는 자세로 앉아있더군요. 그런데 저를 보자 뜯밖에도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무 말없이 저를 보더군요. 30분 정도의 침묵이 흐른 후 평온한 분위기가 감돌았어요. 선하고 평화로우며 사리사욕이 전혀 없는 느낌이었죠. 그분이 말을 하기도 전에 제가 찾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저는 인도에 오게된 동기와 지난 3년동안 인도에서 지낸 얘기를 들려주었어요. 그런 다음 지혜롭고 성스럽다는 성자들을 여럿 찾아가 보았지만 제가 찾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그분이 제 말을 끊더군요. “다 알고 있으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에 온 이유가 뭡니까.” 스승님을 찾왔습니다. “스승은 오직 브라만 뿐입니다.” 그분은 계속 이상하리만치 강렬하게 저를 보고 있었죠. 그러더니 갑자기 그분의 몸이 굳어지면서 두 눈이 안쪽으로 돌아가는것처럼 보이더군요. 최면상태에 빠져든거죠. 인도에서는 사마디라고 부릅니다. 주관과 객관의 이원성이 ㄱ사라지고 절대지(絶對知)가 되는 상태죠. 저는 그분 앞에서 가부좌를 하고 바닥에 앉아 있었습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죠. 시간이 지난 후 그분이 정상적인 의식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러고는 다정하고 온화한 미소를 저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여기 묵도록 해요, 잘곳을 알려줄것입니다.”
그 분은 젊었을 때 아주 엄격하게 자신을 단련했지만 제자들에게 그것을 강요하진 않았어요. 그보다는 이기심과 정욕, 관능의 노예가 되지않으려고 노력하고 평정과 억제, 금욕, 단념을 추구하며 정신을 다잡고 자유를 열렬히 열망하면 해방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죠. 그분의 가르침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존재이며 지혜가 자유의 수단이 된다. 구원은 반드시 은둔생활을 통해서 얻을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소아(小我)를 버리기만 하면 된다. 사심없는 행위는 마음을 정화해주며 여러가지 방식으로 성전에 경의를 표하는 것은 개아(個我)를 버리고 대아(大我)와 합치될수 있는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정말 훌륭한것은 그분이 가르침이 아니었어요. 그분이 존재한다는것 자체가 일종의 축복이었어요. 저는 그분과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행복했어요. 그분이 먼저 돌아가시기 전에는 제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그곳에 있겠다고 다짐했어요. 사실 그분은 언제든 썩어 없어질 몸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마침내 무지의 굴레를 깨고 나와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절대자와 합치되었다는 확신을 가질수 있는 상태가되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사람들 말로는 더 이상은 아무것도 없어요. 영혼이 이세상을 떠나면 더 이상은 윤회를 하지 않죠. 그럼 가네샤씨가 죽었나? 제가 알기론 아직 살아있어요. 그는 대꾸를 하면서 내 말뜻을 알아차리고 가볍게 웃어보였다.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그가 내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다음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입밖에 내지 않은 그 다음 질문은 당현히 깨달음을 얻었느냐하는 것이었다.
야수라마에 머문지 꼭 2년째 되는날 일출을 보러 올라갔어요. 눈부시게 날이 밝아오면서 제 앞에 펼쳐진 그 광경은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것이었어요. 그토록 엄청난 기쁨, 그토록 초월적인 환희가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죠. 묘한 흥분이 일더군요. 짜릿한 느낌이 발끝에서부터 온몸을 타고 올라왔어요. 순간 육체에서해방된 느낌, 육체에서 빠져나온 순수한 영혼에 아름다움이 깃드는 느낌이 들었죠. 인간을 초월한 어떤 인식이 나를 소유하면서 그동안 혼란스러웠던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골치 아팠던 모든것이 설명되는 기분이었죠. 마치 전국에 온것같은 그 황홀경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것 같아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기진맥진해서 떨고 있었어요. 그러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어요.
감히 깨달음을 얻었다고 어떤 계시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수는 없었어요. 다만 수년동안 금욕과 고행을 하면서도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 허다한데 어떻게 제가 일리노이주 마빈의 래리 대럴이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겠어요.
그저 고독과 새벽의 신비스런 분위기 그리고 강철판 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호수각 자네의 심리상태와 합쳐져서 나타난 일종의 최면상태는 아니었을까?
그것이 현실이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어요. 어쨌든 수세기에 걸쳐서 세계 전역의 신비주의자들, 즉 인도에선 브라만교도들, 페르시아의 수피교도들, 스페인이 카톨릭교도들, 뉴잉글랜드의 개신교들이 이와 똑같은 경험을 해왔잖아요. 사실 그것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지만 그들이 최대한 묘사한 바로는 비슷했죠. 그것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하는것은 불가능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것이죠. 제가 실제로 잠시나마 절대자와 하나가 되었을 수도 있죠. 어느 쪽인지는 저도 알길이 없습니다.
가네샤씨는 이 세상에서 느끼는 만족은 덧없는 것이며 오직 무한한 존재만이 지속적인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답하더군요. 이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그러니 무언가에게 영원한 존속을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않는 것은 더 어리석은 거예요. 변화가 존재의 본질이라면 그것을 우리 철학의 전제로 삼는 것이 현명하죠. 똑같은 강물에 두번 들어갈 수는 없어요.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니까.하지만 다른 강물에 들어가도 그것 역시 시원하고 상쾌한 것은 틀림없어요. 감격적으로 일출을 보던 날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 안에 있던 에너지가 분출구를 찾고 있는 느낌이었죠. 세상을 등지고 은둔생활을 하는것은 제가 할 일이아닌 듯 했습니다. 그보다는 세상 속에서 살면서 이 세상의 만물을 사랑해야 할 것 같았어요. 만물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존재하는 신을말입니다. 그 환희의순간에 제가정말 절대자와 하나가 디었다면 그리고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그 무엇도 저를 건드릴 수 없다는 의미였죠. 생의 업을 다 이루고 나면 더 이상 윤회해선 안되는 것이잖아요. 그런 생각이들자 당혹스러웠죠. 저는 몇번이고 다시 살고 싶었죠. 어떤 종류의 삶이든 아무리 고통과 슬픔이 따라와도 끝없이 환생을 거듭해야만 제가 갈망하는 모든 것들, 지의 정력과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을것 같았거든요. 이튿날 산을 내려와 가네샤씨를 찾았어요. “스승님께 작별인사를 드리러드리러 왔습니다.” 이제 제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려합니다.” 아무말도 없으셨어요. 그리고 처음 만난 날 처럼 저를 뚫어지게 보는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제가 겪은 일들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렇게 말하더군요. “잘됐군요. 그 정도면 충분히 떠나있었습니다.”
앞으로 무얼할 생각인가?
미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뭐하러?
살러요.
어떻게?
인내를 갖고 평혼하게 자비롭게욕심없이 그리고 금욕적으로….
어렵군, 그런데 금욕은 왜? 자넨 아직 젊잖아 인간이 가진 동물적 본능을 억제하려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일까? 다행이도 지금까지 저한테 성적 탐닉은 쾌락이긴 해도 욕구는 아니었습니다. 제 경험상 인도 현자들의 주장가운데 가장 꼭 들어맞는 것을 한가지 꼽자면 바로 성적 금욕이 정신력을 크게 강화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인도인들은 우리 서구인들이 많은 것을 발명했고 수많은 공장을 세우고 물질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지만 그들이 생각하기에 행복은 물질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저는 수입이 있어서 정말 유용했죠. 그게 없었으면 지금까지 해 온 일을 하나도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 도제기간은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수입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짐이 될거예요. 그래서 끊어버리려구요. 너무 어리석지 않은가? 자네가 설계한 삶을 살려면 오히려 금전적으로 자유스러워야 할 텐데. 아뇨, 오히려 금전적 자유는 제가 설계한 삶은 무의미하게 만들것입니다. 저도 일을 할겁니다. 미국에 가면 정비소에 자리를 알아볼려구요. 다른 일을 구하면 더 좋을 텐데? 저는 몸으로 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공부를 하다가 막힐 때마다 육체노동을 하면 정신적으로 기운이 솟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물론 정비소에서 영원히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오랫동안 미국을 떠나있었으니 미국에 대해 새로이 배워야겠죠. 그래서 어느정도는 정비일을 하다가 트럭운전을 해볼생각입니다. 그럼 미국 전역을 돌아다닌수 있잖아요. 자네는 돈의 중요성을 잊은 모양이군. 돈을 시간을 절약해주지. 맞는 말씀입니다. 그건 제가 택시를 직접 몰면 해결되겠죠. 택시를 몰면 밥값과 하숙비 차량유지비 정도만 벌고 남는 시간은 다른 일에 쓸 수 있잖아요. 급하게 어딘가를 갈 때도 택시를 이용할 수 있구요.
자네가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면 자네의 삶이 다 완벽하게 안정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네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편안하고 믿음직스럽고 달콤하면서도 그가 가진 매력적인 천성, 즉 순수와 신뢰가 모두 담긴 그런 미소였다. 이젠 너무 늦었어요. 제가 결혼해도 좋다고 느낀 여자는 죽은 소피밖에 없었어요. 그 많은 일을 겪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소피는 정말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여자였어요. 열정적이고 야심차면서도 너르거운…..그녀가 지향한 이상들은 고결한 것들이었죠. 결국 파멸로 향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비장한 숭고함 같은 것이 느껴졌거든요. 그럼 왜 애초에 소피와 결혼하지 않았나? 그때 소피는 너무 어렸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소피 할아버지댁에 가서 함께 느릅나무 밑에서 시를 읽던 시절에는 그 말라깽이 꼬마의 가슴속에 그런 영적인 아름다움의 씨앗이 숨어있는 줄 몰랐거든요.
이것으로 이야기를 끝내려고 한다. 아마도 래리는 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정비소에 취직했다가 그 다음에는 트럭을 몰면서 너무 오랫동안 떠나있었다는 조국에 대해 원하는 만큼 배웠을 것이다.이것을 모두 끝낸 다음 택시를 모는 환상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겼을 거싱 분명하다. 그는 야망도 없고 명예욕도 없다. 어떤 식으로든 유명해지는 것은 그가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선택한 삶의 행로를 따르며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는 데 만족할 것이다. 그는 겸손한 성격 때문에 자신을 타의 모범으로 내세우진 않을 것이다. 다만 적절한 때가 되면 나방이 촛불에 모여들 듯 확신없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그에게 이끌릴 것이고 그리하여 궁극적인 먼족은 오직 정신적인 삶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함께 나눌 거라고 그리고 스스로 사심없이 자제하며 자기 완성을 추구하려 노력하다보면 저술 활동이나 대중 연설 못지 않게 사회에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면도날은 섬머시모옴이 70세의 만년에 출간한 작품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우 팻시가 자기 목숨을 구해주고 대신 죽은 후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된다. 사람이 죽어서 그것으로 끝이라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면 과연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가져오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래리는 전쟁 전의 평범한 삶을 버리고 대신 신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탐구 여정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그는 사회적 성공이나 물질적 만족을 추구하는 속세의 삶에 등을 돌리고 인생과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찾기 위해 수많은 책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래리는 내면의 물음에 대한 답을 얻고자 유럽각지와 인도 등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종교와 철학을 두루 접한다. 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결국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외면적으로는 그저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그의 내면에는 대중의 상투적이고 정형화된 세계관이 아니라 그만의 실존적인 해답(비록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이 똬리를 틀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면도날이라는 제목은 소설 첫머리에 등장하는 “날카로운 면도칼의 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라는 인용구에서 나온것이다. 소설 속에서 구원으로 가는 험한 여정에 대담하게 오른 래리대럴은 육체는 속세에 있으나 정신은 속세에서 보금자리를 찾지 못하는 어중간한 경계인으로 본다면 면도칼의 날은 그러한 래리의 불안하고 위험한 실존적 위치를나타내는 하나의 상징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왜 하필 면도날인가? 하는 독자의 의문에 대해서는 섬머싯몸 자신만이 대답해 주루 수 있겠지만 말이다.
오래 타자를 치느라 힘들었다. 여기서 끝낸다.
래리! 그는 나의 오랜 친구이자 우상이다. 나는 나이를 먹는데 20살 때 사귄 소설 속의 래리는 아직도 30대 초반의 젊은이로 맹기호의 기억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