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을 조판했다고 알려진 강화도 선원사에 들렸더니 박정희 대통령 사진을 상설 전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주지가 박정희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18년이나 집권하여 내가 어린시절부터 대통령이었으니 그를 매체를 통해서 많이 보았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지나고
여러 대통령을 거치는 동안 그의 모습은 나에게 잊혀졌다. 오늘 사진으로 다시 보니 박정희 대통령이 새롭다.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니 더욱 새롭다.
박정희……
4.19 이후 거리는 매일 데모대로 넘쳐났고 사회는 혼란했으며 장면정부는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했다.
그 틈을 타고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를 스스로 작곡하고 어떻게 하면 국민을 잘 먹일 수 있을까하는 걱정에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나라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1970년대 연평균 경제성장률 7% 이상으로 20여 년간 세계 최고였다.
3선 개헌,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규정을 철폐한 유신헌법,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자기가 계속해서 대통령을 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한국적민주주의라는 명분이 당시 나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국가법질서 체계가 무너지고 모든 것을 데모로 해결하려하며 공권력이 무너지는 작금의 현실을 보니
한국적민주주의라는 것이 실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 한국적 민주주의도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했다. 모든 것이 내가 아니면 안된다라는 생각이
나라와 자신을 망쳤다. 그가 다른 이들 처럼 뒷돈을 챙기지 않은 것을 보면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하여 효율적 자원배분곽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 대기업위주의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수출산업 성장을 위해 노동자 농민들의 이익은 제한되었고 고통을 감내해야했으며 그결과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하였다. 동아링보 광고탄압 등의 언론탄압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 중에서 OECD에 가입하고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바뀌고
세계 수출 7위의 위업을 달성한 나라는 코리아 뿐이다. 그런 기초를 제공한 사람이 박정희인것은 맞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과실도 있다. 박정희가 죽었다는 뉴스를 듣던 아침이 생각난다.
아! 그날 영원히 갈것처럼 공고했던 박정희 정권이 끝나던 날, 역사는 흐르며 영원한 권력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김일성 권력보다 더 짧게 끝날 줄이야. 김일성은 세계사에도 없는 3대세습불법독재정권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으니……
박정희의 사적인 사진을 보니 그는 권위적인 지도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에서의 미소도 권위가 잔뜩 들어가있고 모내기 사진에서도 옆사람과 너무 비교되는 이른바 썩소다(썩은 미소)
그가 격의 없는 활짝 웃음을 내보이는 것을 본적이 없다. 두딸의 어깨를 잡고 있는 사진은 더하다. 저런 아버지와 사진찍고 싶을까? 옛날 사람이라 그런가?
모내기 사진에서도 권위가 들어가 있다. 옆사람과 너무 비교되는 이른바 썩소다(썩은 미소)
두딸의 어깨를 잡고 있는 사진은 더하다. 저런 아버지와 사진찍고 싶을까?
비질을 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서민적이다. 빗자루도 평범하고 값싼 대비다.
박정희대통령이 국민의 배고품을 걱정하고 나라 경제를 일으키려 애쓴 대통령은 맞다.
그는 전대미문의 세계사적 기념비에 해당하는 20여년간 연평균경제성장률 7%를 이룩한 대통령이며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과실도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 점이 안타깝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3번만 하고 유신헌법 직전에서 사퇴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로 나는 집에 이승만대통령 사진을 마루에 걸고 있다.
붕우 남기완으로 부터 내
雅號를 몇개 지었으니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쓰라는 연락이 왔다.
참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내게 보내온 편지글 전문을 실어본다.
아내와 의논하여 수일내로 결정할 것이다
전부 다 맛좋은 것이어서 어떤 것을 먹어야할지 그저 행복한 고민이다.
내가 무슨 복이 많아 이런 호사를 누리는지
기완아! 고맙다. 기다려라 이 웬수 기필코 값겠다!! ㅎㅎㅎ~
< 적당한 사진이 없어 몇 년 전 마라톤에 출전한 사진을 실었다>
맹기호의 雅號를 지어보려 생각은 줄곧 해왔으나, 정말 어려워서 미루고 미루어 왔는데,
요즘 맹기호 시가 나오기 시작하여 더는 미룰 수
없어서 몇 개 생각해 봤어.
마음에 들면 골라 쓰고 마음에 안 들어도 좋고 :
맹기호 아호
짓기
:
1. 焉知
焉知 : 논어 ‘未知生
焉知
死’
‘어찌 알겠는가?’로
끝없이 묻고 진리를 찾아가는 정신의 표현.
*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계로문사귀신. 자왈: 미능사인, 언능사귀? 왈: 감문사. 왈: 미지생, 언지사)”
論語(논어) 先進(선진)편에 출전한다.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여쭈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도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감히 죽음에 대해 여쭙습니다.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 子曰 後生可畏
焉知
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
공자가 말했다. 뒤에 태어난 사람이 가히 두렵다. 어찌 오는
사람들이 이제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으랴.
40이 되고 50이 되어도 명성이 들리지 않으면, 이 또한 두려워할 것이 못될
뿐이다.
2. 問仁
어떻게 하면 어질고 멋지게 살 수 있을까 늘 고뇌하는 모습을 담아서
司馬牛
問仁
. 子曰 : “仁者其言也?.”
顔淵
問仁
. 子曰 克己復禮爲仁.
樊遲
問仁
.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樊遲
問仁
,
子曰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
: 번지(樊遲)가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거처함에 공손하며 일을 집행함에 공경하며 사람을 대하기를 충성스럽게 함을,
비록 이적(夷狄)의
나라에 가더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 -자로편(子路篇) 19장(章)-
3. 新雨
(막 내린 비)
늘 새롭고 상큼함을 추구하는 마음, 늘 일신우일신하는 마음을
담아서
唐詩, 王維의 오언율시 ‘山居秋暝’ :
空山
新雨
後, 天氣晩來秋. …………..
* 新月 :
초승달
4. 多情
소동파가 詞를 삼백여 수 썼는데 ‘多情’이란 말을 유난히
많이 썼으며, 이는 매우 특이한 점이다.
호방한 문인임에도 ‘多情’이란 말을 매우 좋아 했다는 것인데,
맹기호의 ‘다정함’(정이 많음)과 혹시
통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름도 그렇지만 ‘최고로 좋은’ 그런 것은 없는 것 같아.
내가 좋아해야지 좋은 것이지.
더 생각해 볼게~~
from 기완
<또 기완이가 오늘 아호를 또 보내왔다>
맹교장,
최고의 정승 고불 맹사성의 후손으로 사는 것을 늘 잊지 않으려 :
5. 騎牛, 牛夫,
牽牛
– 騎牛 : 맹사성의 ‘騎牛’를 본받는
의미에서
– 牛夫 : 맹사성의 마부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소를 끄는 것이니馬夫가 아니라 牛夫
– 牽牛 : 소를 끈다는 뜻을 직접 표현
* 두산백과 :
기우[ 騎牛 ]
소를 타고 다니는 일. 소를 타고 다니는 풍습은 교통수단으로 이용한
경우와 순전히 풍류적인 멋으로 되는 경우가 있다.
기차나 자동차 같은 교통기관이 출현하기 전에는 주로 말[馬]을 타고 다녔으나,
가까운 거리나
바쁘지 않은 용건으로 왕래할 경우에는 소를 타고 다니기도 하였다.
소의 걸음은 말보다 느리지만, 소를 타는 재미는 느릿느릿한
걸음에 있다고 한다.
소를 탈 때 안장을 얹으면 소의 등에 사람이 앉게 되지만, 안장 없이 탈 때는 소의 등줄기 엉덩이 위에 앉는 것이 가장
편안하다.
《독좌문견일기(獨坐聞見日記)》에 보면, 세종 때에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孟思誠)은 고향인 온양을 왕래할 때 늘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또, 《기문총화(記聞叢話)》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맹사성이 소를 타고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용인에서 비를 만나 어느 여관에 묵었는데, 먼저 들어온 선비가 불러서 장기를 한 판
두고,
심심풀이로 공(公)자 당(堂)자로 문답을 했는데, 먼저 맹정승이 “무슨 일로 서울에 가는공” 하니, 선비가 “녹사시험 보러 간당”
하였다.
녹사(錄事)란 의정부에 딸린 아전벼슬이므로, 맹정승은 “그러면 내가 좀 도와줄공” 했더니,
정승인 맹사성을 알아보지 못한 선비는 화가
나서 “아니꼽당” 하였다.
그 후 선비가 시험을 치르는 차례에 따라 좌의정 앞에 나온 것을 맹정승이 알아보고 “어떠한공” 하였더니
선비는 깜짝
놀라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죽여 주사이당” 하였다.
그래서 의아해 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맹사성이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한바탕 웃었다는
것이다.
그 선비는 맹정승의 도움으로 벼슬에 올랐으며, 이 일은 ‘공당문답(公堂問答)’이라고 전한다.
《해동잡록(海東雜錄)》 《동문선(東文選)》
《양촌집(陽村集)》에도 기우설(騎牛說)이 나오는데,
평해(平海)사람 이행(李行)은 호(號)를 기우자(騎牛子)라 하며,
달밤에 소를 타고 호리병에
술을 채워가지고 산수 좋은 곳에 가서 놀며 사나이의 호탕한 기개를 길렀다고 한다.
《패관잡기(稗官雜記)》에도 진사 이별(李鼈)이 소를 타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으며,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조석간(趙碩澗)도 날마다 소를 타고 왕래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매산잡지(梅山雜識)》에는 안주 서촌에 사는
김(金)이라는 사람이 저자에 갔다가 소를 타고 밤에 집으로 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나 해치려고 덤비는 것을 소가 나서서 호랑이를 상대하여
싸웠는데,
새벽에 이르러 소도 호랑이도 다 죽고 사람만 살아나서 그 소를 의리 있는 소라고 하여 의우총(義牛塚)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 밖에도 《삼연집(三淵集)》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율곡집(栗谷集)》 등에는 기우가(騎牛歌)가 실려 있다.
소를 타는 풍습은 그림의 소재로도 다루어져서 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목동의 한가로운
모습을 묘사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기우목동(騎牛牧童)》이나,
해질녘에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그림, 너울 쓴 여인이 소를
타고 나들이하다가 나귀를 타고 가는 남자들과 마주친 광경 등은
한국의 기우 풍속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우
[騎牛] (두산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마부[ 馬夫 ]
말을 타고 갈 때에 고삐를 잡고 앞에서 끌거나 뒤에서 따르는 사람.
[네이버 지식백과] 마부
[馬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기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