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는 2007년 유림 여섯권을 쓰고 난 후 2008년 침샘암에 걸렸다.
최인호는 2012년 6월에 소설 맹자를 썼다.
그는 침샘암으로 말도 못하는 상황에서 맹자를 썼다. 305쪽에 달하는 장편이다.
그리고는 2013년 9월25일 한국문단의 별 최인호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유림 6권 중 4번째 책은 맹자 한사람을 다뤘으면서 암에 걸린 상황에서 왜 맹자를 단행본으로 또 냈을까?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하여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나의 한문실력이 너무 부족하여 원전으로 읽는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데
다행스럽게도 최인호가 소설로 쉽게 써놓았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책의 내용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내가 맹자에 대하여 어떤 글을 쓴다기 보다
최인호의 책 맹자를 읽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을 발췌하여 타자하였다.
공자는 55세에 출발하여 주유열국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1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68세에 돌아와 5년동안 불후의 명저 여러권을 남기고 73세에 세상을 떤난다.
맹자도 마찬가지였다. 38세에 주유열국을 시작하여 23년 동안 자신의 뜻을 받아줄 제후를 찾아다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60세에 돌아와 83세까지 제자들과 책을 저술하고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맹자가 주유열국을 단행하였던 것은 공자처럼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기 위해 자신을 인정해줄 군주를 찾아 헤멘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전국시대 각국에서 활약하고 있던189종의 제자백가와 사이비 사상가들을 유가의 맹장으로서 격파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맹자는 전국시대에 풍미했던 두가지 사상 즉 묵자의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절대적인 사랑을 주장한 겸애가 있어고
남을 위해서는 터럭 하나도 뽑을 수 없다고말하는 극단적 개인주의인 양자의 사상이 지배적이었는데
맹자는 묵자와 양자 그 두가지 사상에 집중하여 대적하여 싸웠다.
맹자의 무항산무항심(일정한 소득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도 없다)의 경제책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 무엇보다 백성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일정한 생업을 보장하는 항산이야말로 백성들이 방자함, 사악함, 사치스러움의 죄에 빠져들지 않고 항심을 지켜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강조한다.
안정된 생업을 만들어 주지 않고 백성들을 죄에빠진 후에야 벌을 주는 것은 법망에 걸려들도록 그물질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다.
호연지기는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크고 굳센마음인데 호연지기를 기름에 있어 효과를 미리 성급하게 기대하지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도 말아야한다고 말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맹자의 호연지기에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본래 호연지기는 마구 생성시킬 수 없으며 억지로 기를 수 없는 것이다. 오직 도로 말미암아 의를 행하여 날로 쌓고 달로 쌓으면 마음이 넓어지고 몸에 살이쪄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호연지기는 밖에서 닦쳐와서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내 안에서 도의 가 쌓여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맹자 스스로도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명했던 호연지기!
결국 호연지기는 의와 도가 쌓여 충만함으로써 저절로 생기는 것이므로
오직 정도를 행하여 절도를 지키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대장부의 기상이라고 이해하면 될것이다.
공자의 원시유교가 학문적으로 체계화되고 발전 될수 있었던 것은 오직 맹자 때문이었으니
이는 예수로부터 창시된 초기 기독교가 제3의 제자인 바오르에 의해서 체계화되고 발전된 것과 같은 현상이다.
따라서 유교는 공맹사상으로까지 불리는데 이는 맹자가 공자의 유가사상을 형이상학으로 이끌어 올린 공적 때문이다.
사단론! 이는 맹자의 행심사상 중 골수로 맹자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가진 선천적 도덕적 능력이라는 것이다.
측은지심 인, 수오지심 의, 공경지심 예, 시비지심 예 이와 같은 인의예지는 마음 바깥에서부터 나에게 녹아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시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맹자의 이 유명한 사단론은 네가지 마음이 각각 다른 종류의 다른 마음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임을 가리키고 있다.
맹자는 이 사단론을 통해서 처음으로 仁愛 즉 사랑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논리를 정립하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한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모두 깜짝놀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함으로써 널리 명예롭게 되기를 구하는 것도 아니며
그 비난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렿게 하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며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말리는 것은
명예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 때문이니
이러한 마음이 태어날 때부터 있다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 태어날 때부터 선한 것임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맹자는 역설하며 성선지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맹자와는 반대로 순자는 사단이 선천적으로 태어날때부터 가지는 도덕적 능력이 아니라
반드시 스승과 법도의 가르침에 의해 고쳐지는 후천적 작위(作爲)라는 것이다. 작위야말로 순자가 말한 성악지설의 골수다.
순자는 사람은 태아날 때부터 악한 본능을 갖고 태어나는데 이 본능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소리와 좋은 빛깔을 추구하는 욕망으로,
이를 절제하고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작위라는 것이다.
성인들은 사람들의 본성을 교화시켜 작위를 일으켜 예의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예의는 성인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여러사람들과 같은것 곧 성인이 여러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것이 본성이고 여러사람들과는 다르고 훨씬 뛰어난 것이 작위다.
순자는 인간은 본래 태어날 때는 악하지만 작위(인위)를 거치어야만 바르게 교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성선설과 성악설을 대립된 사상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상은 어느 쪽이 절대 진리이로 다른 쪽이 절대오류라는 식으로 나누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성선설과 성악설은 둘 다 절대 진리인것이다.
공자의 위대한 至聖은 주유열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68세-73세까지의 5년 동안 짧은 후반기에 완성된 것이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가 하, 은, 주 3대의 예를 주석하고, 고서, 전기등을 정리하였으며
위로는 요, 순의 시대부터 아래로는 진의 목공에 이르기까지 순서에 따라서 정리편찬하였다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5년의 짧은 기간에 詩經, 書經, 易經, 禮記, 樂記, 春秋 등 6경이라고 불리는 유교의 경전을 스스로 편찬하였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할 만큼 불가사의한 일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석가모니와 예수는 그 많은 설법을 했으면서도 스스로 단 한편의 경전을 편찬한 적이 없다.
그러나 공자는 스스로 창시한 유교의경전을 제자들의 몫으로 넘기지 않고 살아생전에 제자들과 더불어 편찬하였던 것이다.
그 중 공자가 직접 지은 책은 역사책이라 할 수 있는 춘추이다. 공자는 요순시대부터 아래로는 진의 목공에 이르기까지 순서에 따라 역사를 저술함으로써
후세의 정치가들에게 역사를 거울 삼도록 하려는 의도예서 춘추를 썼던 것이다
13년의 주유천하에서 현실정치를 바로잡지 못했던 공자는 중국최초의 역사서인 춘추를 저술 함으로써 현실정치의 모순을 지적하려 함이었던 것이다.
사기에 의하면 공자는 관직에있을 때 소송이 들어오면 고소문 한장 쓰는데 혼자서 하는 법이 없이 반드시 동료들과 의논했었다.
그러나 춘추를 저술 할 때는 가필과 삭제를 오로지 혼자했다 자하처럼 문장력이 뛰어난 제자라도 스승의 저작에 글자 한자 가감할 수 없었다.
공자는 리를 낳았다.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는데 리는 탁월한 사람이 못되었다.
공자가 수많은 제자를 키웠음에도 막상 아들인 리에게는 별다른 가르침을 펴지 않은 것을 보면 리는 평범한 사람이었나보다.
공자의 아꼈던 수제자들은 모두 단명하였다.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 안연이 젊은 나이에 죽고, 안연이 죽은 후 2년만에 자로마저 죽는다.
자로가 죽으면서 공자가 사랑했던 제자는 자공이었다. 자공은 공자 사망 후 6년이나 시묘살이를 한다.
공자의 손자 자사는 4세때 할아버지를 잃었으므로 공자로부터 직접 유학을 배우지는 못했다.
공리의 아들 급은 아버지를 뛰어넘어 할아버지 공자에 필적하는 대사상가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형질은 열성이는 우성이든 한 대를 걸러 나타나는 격세유전 때문일까?
공자의 손자 공급, 자는 子思이며 62세에 죽었다. 그는 中庸을 저술하였다. 자사는 공자의 학문을 이어받는 제자 曾子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증자는 주자가 大學을 지었다고 단정한 인물이다.
공자의 손자인 공급, 즉 자사는 증자로부터 할아버지의 사상을 전수받음으로써 공자-증자-자사로 이어지는 유학법통의 중심인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자사 최대의 업적은 자사의 학문이 맹자로 이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맹자는 자사로부터 직접 학문을 배우지는 않았고 자사의 문인으로 부터 유학을 배웠다고 사기에 기록되어있다.
맹자는 자사의 再傳제자이면서도 자사를 사숙하는데 그치지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공자를 계승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유교사상을 공자와 맹자의 첫이름을 따서 공맹사상으로 부르는 맹자가 공자사상의 발양자(發楊者)였기 때문이다.
만약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없었다면 맹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맹자가 없었더라면 유학은 대가 끊어져 멸절되었을 것이다.
세계 3대 성인 예수, 석가모니, 공자는 살아생전에는 이 지상의 화려한 왕들이 아니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었지만 십자가에 못밖혀 죽었고
석가모니는 왕자이었지만 제왕의 길을 포기하고 왕궁을 떠나 출가하여 구도를 위한 고난의 길을 걸었다.
13년이나 주유열국하며 밝은 군주를 찾아다니고 천하를 헤메고 다닌 공자 였다.
그들은 모두 세속의 왕권과 영광을 포기함으로써 부활한 것이다.
맹자 역시 공자와 궤적을 같이한다. 23년간 주유열국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을 가르치고 책을 저술한것이 유학을 잇고 더욱 빛나게 계승하게 된것이다.
평생동안 이상적인 왕을 고대하며 천하를 주유하였던 공자는 죽은 후에야 이 세상이 그토록 고대했던 위대한 사상가가 바로 공자 자신이었음을 드러낸다.
공자는 죽어서가는 내세를 말하지 않았다. 공자는 신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으로 성자가 된 인물이다.
예수와 석가는 죽어 신으로 승화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다르다.
공자의 사상이 살아있는 한 공자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변함없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며
예수와 석가모니처럼 신앙의 대상으로 우상화되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맹자는 공자의 仁義사상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뭐니뭐니해도 총 189종의 제자백가들이 난무하였던 춘추전국시대 때 이들 백가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임으로써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던 동방불패의 대사상가는 단, 한 사람, 바로 맹자인 것이다.
맹자가 없었더라면 공자는 역사의 수면 아래 가라앉아버렸을 것이다. 공자가 만든 새에 날개를 달아준 사람은 바로 맹자다.
따라서 맹자가 亞聖으로까지 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것이다
맹자는 주유열국을 끝내고 61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리고 그가 83세로 죽을 때까지 고향에서 제자들에게 시경과 서경을 강술하면서 한편 불후의 명저인 맹자7편을 저술하였다.
참고사항: 중국역사상 인의를 행하였다고 칭송되는 4명의 임금 : 순임금, 우임금, 은나라의 탕왕, 주나라의 무왕
基督 : 크리스트(kristos의 음역이다), 음역: 한자의 음으로 외국어의 음을 나타낸말, 따라서 기독교라함은 카톨릭, 그리스정교회, 개신교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서울에서 전국중등학교 교장 세미나가 있어서 참석하였다. 그리고 해가 남아서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근대회화100선전을 다녀왔다. 오후 3시에 박찬일교장부부를 만나서 함께 구경하였다. 이번 전시회는 소장가들을 설득하여 조선일보 주최로 열렸다. 교과서에서 보던 유명한 그림들이 나왔다. 한국을 대표하는 역대 100점을 전시하였는데 신문에 보도된 여론조사 결과 선호도 1위는 이중섭의 ‘소’였다. 그러나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이었다. 박수근은 정식 미술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고졸학력이 전부였던 그는 다른 화가들이 일본에 유학한 뒤에 풍경, 누드화 등을 그릴 때 그는 한국적인 그림을 생각하였다.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우선 바탕(마띠에르)을 여러가지 물감을 섞어 투박한 화강암 질감을 냈고 그위에 검은색으로 간단하게 스케치를 하고 모티브로 등장한 인체나 사물에 약간의 색을 덧칠하였다. 박수근의 그림을 제대로 알려면 그의 ‘나무’ ‘빨래하는여인’등을 보고 말하면 안된다. 그런 그림은 그의 혼이 전달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이 투박하고 한국적인 바탕위에 그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절구질하는 여인’을 보고 정말 놀랐다. 전시된 다른 박수근의 그림은 작은 소품이었는데 절구질하는 여인은 우선 크기가 1m가 넘는 대작이었다. 박수근은 우연히 단순한 한국적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것이 아니었다. ‘절구질하는 여인 그림을 원화로 보고나서 나는 그의 바탕작업이 단순한 작업이 아닌 한국적 민족 혼을 그림에 실으려 했던 그의 생각을 알게되었다. ‘절구질하는 여인’의 바탕처리는 아주 두텁고(석고나 기타 다른 부자재를 물감에 섞어 짖이겨 두텁게 발랐다) 실제로 눈으로 보니 다른 작품과 다르게 검은색 계통으로 칠해져 절구질 하는 여인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인데 그렇기 때문에 한민족의 질박한 삶의 방식이 보는이의 가슴에 깊고 두텁게 전해온다. 100작품 중에 나에게 가장 큰 감동을 전해주었다. 서양그림만 흉내내던 그 시절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려했던 박수근! 그는 진정 천재이다. 이런 천재가 있어 세상을 기쁘게 한다. 훗날 나같은 민초가 자신의 그림 ‘절구질하는 아내’를 보면서 이 토록 진한 감동을 느낄것을 짐작이나 했을까?
아주머니! 휘트니스클럽에 와서 책을 보면 어떻합니까!
여기가 도서관입니까?
책은 집에서 보세요!
어디서 많이 본듯한 아줌만데……
나는 평생 소화불량을 달고 산다.
젊은 시절 나 스스로 위암에 대한 공포에 쌓여 살았다.
소화가 안되니 주머니에는 늘 소화제, 활명수, 겔포스를 달고 살았다.
여행을 갈라치면 가방에 훼스탈, 베아제, 활명수, 위청수 등을 챙긴다.
신혼 초에 빵을 좋아하는 아내가 빵을 사오면 먹고 싶어 조금 떼어먹는다.
열에 열번 생목이 올라오며 속이 거북하다. 찹쌀떡 처럼 찐득한 것이 소화가 안된다. 그리고 밀가루 음식도 소화가 안된다.
하여 벽에 ‘빵과 떡은 나의 원수’라고 써붙였다.
위내시경 검사도 부지기수로 받았다.
내시경이 들어올 때 처음에는 거북하다가 하도 여러번 하니 ‘내시경은 나의 친구’라는 마음가짐으로 임하면
십이지장까지 내시경이 내려가도 대수롭지 않았다. 나는 내시경 검사 받는 선수가 되었다.
어느날 내시경 검사하는 내과의사가 하는말 “담배를 끊으세요 담배가 위장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은 스타디가 끝난 이론입니다.
드디어 담배를 끊고 나서 기적이 일어났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빵과 떡을 어느정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커피를 입에 대지도 못했었는데 커피를 먹어도 배탈이 속이 쓰리지 않는다.
흡연할 때는 커피먹으면 5분 이내에 쏙쓰림이 와서 겔포스를 달고 살았었다.
‘찰밥드세요 라는 의사와 약사의 말’
속이 쓰려 병원이나 약국에 가면 ‘찰밥을 드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니 찰밥을 먹으면 금방 속이 쓰린데 나보고 찰밥을 먹으라니!
내가 찰밥 먹으면 속이 쓰립니다. 라고 말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뭐 저런 사람이 있나 하고 바보취급을 한다.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어머니 심지어 아내까지 몰아세운다!
단, 한사람 붕우 임국현 세계일보 편집국장만 찰밥이 소화가 안된다가 말한 유일한 사람이다.
내평생에 그 친구만 찰밥이 소화가 안된다고 말한 내편이다
오늘 찰밥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오늘 작심하고 인터넷에서 여러자료를 찾아보았다.
세상에! 인터넷에도 의견이 팽팽하다.
다만 조선일보에는 찰밥이 소화가 잘되는 사람이 있고 소화가 잘 안되는 사람도 있다. 개인에 따라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다.
맹기호의 증상
나는 찰밥, 찰떡, 인절미, 절편, 쫄면 등 찐득하여 소화액이 침투하기 어려운 음식은 소화가 잘 안된다.
라면도 퉁퉁 불은 것이 좋고, 밥도 차지지 않은 월남쌀이 제일 좋다.
아들 보러 MIT대학 기숙사에서 머무를 때 슈퍼에서 월남쌀을 사다 밥을 지었는데 차지지 않고 아주 푸석한 것이 소화가 잘되었다.
부모님이 안계시면 나는 그날부터 월남쌀로 밥을 지어먹을 것이다.
찹쌀과 멥쌀의 소화에 자료 모음
(1)찹쌀이 소화가 잘 된다는 의견
찹쌀이 소화가 더 잘된다. 찹쌀은 멥쌀과 대응되는 말로, 나미(糯米) 또는 점미(黏米)라고도 한다.
보통 밥을 짓는 멥쌀은 배젖이 반투명한데, 찹쌀은 유백색으로 불투명하므로 구별할 수 있다.
또 찹쌀의 녹말은 대부분 아밀로펙틴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요오드 반응이 적갈색을 띠기 때문에 명백히 구별된다.
차진 기운이 높고, 멥쌀보다 소화가 잘 된다.
(2) 찹쌀이 소화가 안된다는 의견
찹쌀이 소화가 안되는 이유는 계란을 예를 들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계란을 쩌서 먹는 것, 반숙해서 먹는것, 후라이를 해서 먹는 것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소화가 잘될까요? 답은 쩌서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란 후라이가 가장 소화가 안됩답니다. 그래서 아침에 계란후라이 하나를 먹고 가면 속이 든든한겁니다.
찹쌀도 쌀보다 더 찐득하기 때문에 소화가 덜 되는 것입니다.
멥쌀이 소화가 잘됨니다. 찹쌀은 말 그대로 일반 백미보다 찰지기 때문에 소화흡수력이 일반 쌀에 비해 덜함니다.
소화는 일반 백미가 더 잘됨니다. 찹쌀은 성분상으로 덱스트린의 형태로서 멥쌀의 전분에 비하여 당화가 빨라 소화 흡수가 양호하나
떡으로 만들면 치밀해지고 점성이 강해서 소화액의 침투가 어렵습니다.
쑥, 수리취(산채류)를 혼합하여 떡을 하게 되면 조직이 덜 치밀하게 되어 소화액의 침투가 잘 됨)
(3)사람에 따라 찹쌀이 소화가 잘되는 사람과 안되는 사람이 있다는 의견
보통 위장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좋지 않거나 위장에 염증이 있는 사람은 멥쌀대신 찹쌀을 먹거나 죽을 만들어 먹기를 추천한다.
하지만 사람마다 소화능력이 달라서 무조건 찹쌀을 먹는 것이 위장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보통 아밀로오스와 아밀로펙틴의 함량에 따라 멥쌀과 찹쌀을 구분하는데,
멥쌀은 아밀로오스가 20~25%이고 아밀로펙틴이 75~80%인데 찹쌀은 거의 아밀로펙틴으로 되어 있다
찹쌀은 따뜻한 성질이라서 보통 열이 많은 체질에는 좋지 않다. 찹쌀은 나미, 점미라고도 하는데 멥쌀과는 달리 수분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멥쌀에 비해 가볍다.
찹쌀은 맛이 달고 멥쌀보다 끈기가 많으며 한의학적으로 비위 등의 소화기를 튼튼하게 하고 기운을 북돋는 효능이 있어서
위산 과다, 위궤양, 급성 위염 환자들이 멥쌀 대신 사용하면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멥쌀이 찹쌀보다 소화가 잘 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위장이 좋지 않다고 무조건 찹쌀밥을 먹는 것은 좋지 않다.
찹쌀은 성질이 따뜻하므로, 열 때문에 생긴 위장병이 있거나 체질적으로 몸에 열이 있는 경우에는 오히려 소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 박노훈 헬스조선 기자 황유진 헬스조선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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