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영덕중학교 학생 여러분!
오늘은 안중근의사가 100년 전에 중국의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한 날입니다. 안중근의사는 190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처형되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를 위협하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권총을 쏴서 가슴, 복부, 옆구리를 관통시켜 30분 만에 사망케 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저격하고 도망가지도 않았으며 영웅답게 의연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동양의 평화를 파괴하는 원흉으로 규정하고, 재판과정에서 그 죄를 열거하였는데 그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킨 죄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을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철도·광산·산림·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조선군대를 해산시킨 죄
교육을 방해한 죄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한국인은 일본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본 국왕을 속인 죄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등이었습니다.
의사? 어떤 학생은 의사가 왜 총을 쏘느냐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의사는 옳을 의 선비사 의사이며 이는 병원에서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고 나라와 겨레 나아가 인류평화에 대한 대의를 세우고 그 옳은 뜻을 몸을 던져 구현한 사람에게 붙이는 역사 용어입니다. ㅎㅎㅎ~
사랑하는 영덕중학교 학생여러분!
사형이 언도된 안중근의사는 최후진술을 통해 끝까지 자신이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의 신분이기에 일제 법정에서 재판 받는 것 자체가 원천무효임을 선언하고 전쟁포로로서 국제법에 의해 재판 받아야 마땅함을 천명했습니다. 요즈음 안중근의사를 안중근장군으로 고쳐 부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이유가 안중근이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중근 참모중장이 소속된 대한의군은 고종황제가 직접 지원금을 댄 일제침략에 맞선 군사조직이며 안중근의사는 재판정에서 4차례나 스스로 장군이라고 주장하며 전쟁포로라고 주장했습니다. 엊그제 육군본부는 안중근을 장군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만 국가보훈처에서는 안중근의사가 맞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장군은 1년에 60명씩 배출되지만 국가를 위한 의로운 인물은 수십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같은 사람은 천년에 한번나올까 말까 하다면서 안중근도 장군으로 불러야 맞다고 또 주장합니다. 교장선생님 생각은 의사가 맞습니다.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 못지않게 민족독립과 동양평화 그리고 인류공영의 숭고한 뜻을 세우고 펼쳐온 과정이야말로 큰 의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평화에 대한 처절한 갈망은 한국 일본 중국을 넘어 전세계로 통할 수 있습니다. 한․일학계에서도 그의동양평화론을 독일 철학자 칸트의 영구평화론과 비교현구한 성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보훈처에서는 안중근을 의사로 불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안중근을 혁명가 또는 사상가로 품격을 높힐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안중근의사는 재판정에서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판사에게 사형보다 더 심한 벌은 없느냐고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아들의 사형 언도 소식을 들은 안 장군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역시 즉각 전갈을 보내 이렇게 당부했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실로 그 아들에 그 어머니였습니다.
안중근의사는 옥중에서 아무런 자료 없이 사형 집행을 앞둔 절박한 상황에서 혹한을 이겨가며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습니다. (안응칠은 안중근의 아명입니다) 그는 자서전을 완성했으나 ‘동양평화론’은 끝내 마치지 못했다. ‘동양평화론’ 완성을 위해 사형집행 연기를 청했으나 당국이 이를 묵살했기 때문입니다. 안중근이 구상한 ‘동양평화론’은 서양의 침략을 당하여 동양평화를 유지하려면 한국과 청국, 일본 등 삼국이 일치단결해야 하며, 이들 삼국은 각기 독립을 유지한 가운데 단결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내세운 동양평화의 범주에는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태국, 미얀마까지를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자주 독립을 유지할 때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동양평화를 유지하려면 이들 국가가 일치단결하여 서양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많은 연구자로부터 선구적인 제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한ㆍ중ㆍ일 삼국이 동양 평화회의체를 구성하고 공용화폐를 발행하며 공동 군대를 창설하는 등 세 나라가 협력하는 공동체를 결성할 것을 제시했습니다. 이로써 안중근을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폄훼하는 일본은 시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안중근의사는 사형선고일 이후 감옥에서 많은 서예작품을 남겼습니다. 시시각각 죽음이 다가옴에도 안 장군은 그만큼 의연했습니다. 더구나 그의 서예는 단순한 붓글씨가 아니다. 필묵으로 행한 또 다른 독립 전쟁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구국의 영웅이었습니다. 1909년 3월 5일 러시아 땅 엔치아에서 단지동맹을 결성할 때부터 민족의 독립을 본격적으로 꿈꿨고, 그날 12인의 애국동지들은 왼손 무명지 첫 마디를 잘라낸 뒤 태극기에 선혈로 ‘대한독립’이라고 썼습니다. 그해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쏜 뒤 대한민국만세를 외쳤습니다. 동포의 절절한 염원을 대변한 함성이었습니다.
죽기 하루전인 3월 25일. 감옥에서 안중근의사는 동생 정근과 공근을 마주한 자리에서 마지막 유언을 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 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라고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저승에서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100년이 되도록 안 장군의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통탄할 일입니다.
영웅의 죽음은 거룩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부인(김아려)이 고향에서 보낸 흰색 저고리와 검은 색 바지를 입은 안중근은 흰 천으로 눈을 가린 상태에서 2분여간 기도한 뒤 교수대에 올라 조용히 최후를 맞았습니다. 오전 10시4분쯤 안 장군의 목에 밧줄이 걸렸습니다. 의사가 안 장군의 절명(絶命)을 확인한 시각은 오전 10시15분이었습니다. 32살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육군은 육본 지휘부 회의실을 ‘안중근 장군실’로 새로 명명해 어제 25일 개관식을 했습니다. 안중근장군이 순국 100년 만에 대한민국 육군의 최중심부에 자리 잡는 셈이다. 한편 해군엔 안중근함이 있습니다. 현대중공업에서 건조해 지난해 12월 1일 취항한 최신형 잠수함이다. 이렇게 안중근의사는 되살아났습니다. 이제 우리의 심장에서 그를 살릴 차례입니다. 유해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는 안중근의사의 유지를 온전히 살리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한 나라의 진정한 독립과 자존을 세우는 일이어야 합니다.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공존과 화해를 통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는 패권주의로 치달으면서 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중국과 일본 두 나라에도 두루 적용해야 할 보편적 가치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안 의사와 같은 영웅을 가진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겨야할 것입니다. 안중근의사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민족의 길을 올바르게 이끌어 줄 것으로 믿습니다. 그가 지펴 올린 평화의 횃불 또한 온 누리를 비출 것입니다. 더불어 안 의사와 함께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 애쓴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이름도 기억해야 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