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일은 춘원이 2.8독립선언을 한지 100년 되는 날이다.
춘원은 당시 27살의 청년이었다.
식민지 청년들이 침략국 수도에서 독립선언을 한것은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신문사와 주요 인사들에게 발송했고
오후 2시 도쿄 조선기독청년회관에 2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으며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민족자결주의를 조선에 적용하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이지않으면 일본과 영원한 피의전쟁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이 들이닥쳤고 학생들은 모두 연행되었다.
이러한 일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2.8독립선언이 기폭제가 되어
한 달 후 조선 땅에서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 여파로 상해에 임시정부가 들어서게 된것이다.
그리고 그 2.8독립선언의 중심에는 춘원 이광수가 있었다.
한 달 후 3.1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였으며 이광수가 교정을 보았고
태화관에서 만해 한용운이 낭독하였다. 12시에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33명이 모두 제 시간에 온것은 아니었고 4명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다가 2시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으며
나타나지 않은 4명은 훈방으로 풀려나 해방후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지 못했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독립선언서에 서명만 하고 나타나지 못했을까!
충분히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춘원은 3.1운동 후 중국 땅으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의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로 활약하였다.
1921년 귀국하여 일경에 체포되었다 풀려났으며 1926년에는 동아일보 주필을 맡기도 했다.
그 후 조선문인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애석하게도 그는 일제 말년에 친일 운동을 하였다.
1937년 독립운동 혐의로 안창호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6개월 후 병보석으로 풀려나면서 일제에 전향하였다.
당시 조선인 85%가 따라간 창씨개명을 선도했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빨리 해방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어떤 사실에 대한 정답은 둘이 아니고 하나일 뿐이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독립을 외치며 감옥에서 죽어갔다.
그 분들의 애국심과 기개는 존경받아 마땅하다.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감옥에서 죽은 신채호선생, 적을 향해 몸을 던지 안중근, 윤봉길의사가 정답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한다. 춘원은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중심인물이다.
그 것이 1919년 3.1운동과 1919. 4.11일상해임시정부 수립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의 문학적 자산은 말할 것도 없고,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그 하나로 이제 춘원을 용서할 때가 되었다.
춘원의 책 중에서
사랑, 무정, 유정, 흙을 읽었다.
사랑과 무정은 특히 감명깊게 읽어서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순신, 단종애사, 마의태자 등의 역사소설도 썼고 도산안창호도 집필하였는데 이런 책은 읽어보지 못했다.
오늘 타자치는데 힘들었다.
주간보호센터에서 어머니가 오실 시간이다.
마중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