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고난 감성으로 그림 그리고, 애절한 그리움으로 시 쓰는 시인
맹기호 시인은 서명을 할 때도 그림을 그린다.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순식간에 이름을 그려놓는다,
타고난 예술인이다. 간단히 정자로 써도 될 이름을 굳이 그려놓는다.
그가 출판기념회에서 증정한 시집의 서명 역시 그렇다. 글씨라기보다는 그림이다.
그림 실력을 자랑하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그림처럼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는 글씨를 그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 같았다. 타고난 미적 감각 때문이다.
그의 선친 역시 타고난 예인(藝人)이셨다. 그분은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건만 그림을 많이 그렸고, 전시회도 했다.
지금도 맹 시인의 집에는 아버지의 그림이 여러 점 게시되어 있다. 그분은 상업으로 가세를 일으켰으니 그 직업에 가장 정열을 기울이셨을 것이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창작이나 예술을 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바쁜 사업 중에 배운 일이 없는 그림을 스스로 그렸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하고 싶은 욕구가 특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맹 시인도 역사를 전공했는데 화구를 장만하여 그림을 그렸다.
수원의 어느 미술 단체의 회장일도 했고 화성시의 어느 시골집을 빌려서 화실로 쓰며 그림 그리는데 열정을 쏟기도 했다.
시를 쓰기 이전의 젊은 날에는 시낭송대회에 나가 대상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와 노천명의 ‘고향’을 더듬지 않고 줄줄 암송한다. 대단한 암기력의 소유자다.
특히 선명하고 힘찬 발음, 진지한 음성으로 낭송하기 때문에 내용 전달도 잘 된다.
맹 시인은 정년퇴임 직전에 처음으로 시집을 냈다. 그의 시집 서문에 “ 시는 읽은 사람이 이해하기 쉽고, 힘들이지 않아도 감동이 철철 넘쳐야 한다.
그래서 나는 시를 쉽게 쓴다.”고 자신의 시 창작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시가 이해되지 않으면 주제의 파악도, 감동을 만나기도 어렵다.
요즘 시화전이나 시낭송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시를 한번 읽고, 또는 한 번 듣고는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시낭송 자리에 나가기가 마음 내키지 않는다. 시 낭송을 한번 듣고 그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청자(聽者)가 얼마나 될까?
정말 주제 파악을 할 수 있을까? 의미나 내용 파악도 어려운데 어떻게 감동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그런 의혹을 떨칠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시인이 시 한 편을 완성해서 발표하기 까지는 수많은 수정을 하게 된다.
그렇게 어렵게 창조되는 작품을 한 번 듣고 이해하거나 감동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유명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와 조지훈의 ‘승무’ 는 완성해서 발표하는데 3년이나 걸렸다 한다.
그렇게 고민과 고뇌를 하면서 쓴 시를 한 번 읽고, 또는 한 번 듣고 이해하거나 감동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단번에 이해할 수 있고, 쉽게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는 시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시는 대부분이 낭송하지 않는다.
내용은 쉬워도 담긴 의미가 상징이나 은유로 쓰여 함축적일 때는 주제나 깊은 의미를 단번에 이해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시의 전문가가 비유적, 상징적으로 함축해 놓은 시는 더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고차원적인 의미를 쉽게 드러내지 않은 시는 두고두고 음미하며 오랜 시간 의미를 탐색해서야 조금 깨닫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독자나 시인들이 시를 멀리 했을 수도 있다. 시인조차도 남의 시를 주의 깊게 읽는 경우가 드문 게 사실이다.
그런 게 안타까워 맹 시인이 시를 쉽게 써 보자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시가 읽혀져야 하고,
이해가 되어야 감동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직설적이고 감정이입이 많다. 그러나 담백하고 분명하다.
물론 시에서 주제의 노출이 심하면 구호처럼 단정적일 수 있고, 감정 절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엄숙함이나 고아함이 담기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장점만 가진 사람도 없고 단점만 가진 사람도 없는 것처럼 시 역시 간단하면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이미지가 선명할 수도 있다.
그의 시, ‘개망초’에서, “그리움을 / 은하수처럼 뿌리면 / 님이 오실까”.
‘파도’에서, “얼마나 그리우면 / 저토록 끊임없이 달려와 제 몸을 부술까”,
‘꿈’에서 “그대를 만나는 / 하나밖에 없는 길‘ 을 보면 정말 단순하다.
단순한 만큼 메시지가 강렬하고 이미지도 선명하다. 한때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했다는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와 형식이 유사하다.
그의 시집 제목이며 시의 제목인 ‘그리워서 그립다’를 보자.
산수유, 얼레지가 봄의 전령인줄 알았더니
그건 모두 그리움이더라
밤하늘만 보면
북극성, 카시오페아, 오리온 찾기가 좋았더니
그것도 모두 그리움이더라
복자기, 은행잎이 예쁘게 물든 길도
온통 그리움뿐이더라.
첫눈 오는 날
무조건 좋아서 좋은 줄 알았더니
그것도 진정 그리움 때문이더라
이 시의 제목은 역설적 표현이다. 언어의 어법이나 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매 연마다 ‘그리움’으로 서술어를 쓰고 있다.
그리워서 그리운 건 어쩌면 당연한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써 놓으니 그리움이 새롭다.
창작이란 새로운 의미,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는 도전인지도 모른다.
시는 언어의 옳고 그름에 따라야 하는 질서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의 변형을 통한 이미지의 형성이며 새로운 의미의 창조다.
봄의 전령도, 별자리 찾기도, 단풍잎이 예쁜 것도, 첫눈이 오는 것도 모두 그리움에서 비롯된다는 시인의 해석.
그건 자연 현상이나 사람의 심리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며 작가의 의미부여다.
작가란 의미를 발견하거나 의미를 창조하여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개척자이고 전문가이다.
맹 시인은 정년퇴임을 하며 자신의 생애와 시심, 사유와 느낌, 생활과 생각을 이 시집에 담았다.
자신의 성장기, 가족, 동네, 정서, 사유, 신념 등을 고루 담았다.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학교생활의 체험도 담았다.
인간 본연의 고독을 동경하고 고독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
친구와 지인들, 가족이나 제자와도 교분이 두터워 외로울 날이 없지만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이상을 추구하느라 고독에 빠져들기도 한다.
절대 고독을 지향하기도 하지만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도서관에서 독서로 양식을 얻기도 한다.
그림과 시를 창작해 온 맹 시인에게 이번 시집 출간을 계기로,
더욱 예술 세계가 확대되고 보람 있는 삶으로 충만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