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야기♠ 정원 님

정원님께서 내 식성에 관한 글을 읽으시고 나와 비슷한 입맛을 가지셨다면서


글을 보내오셨다. 정원님은 지난해 수필집을 내셨는데 글이 유려하고 아름다워 문단에서도


오랜만에 좋은 수필이 나왔다고 축하하고, 독자들도 많이 확보했으며,


너도 나도 좋은 책이라고 돌려가며 읽는다는 소문이다.


정말이지 정원님이 나에게 글을 보낸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정원님의 글>


 


선생님의 글을 보다보면 사고방식도 그렇고, 오늘같이 음식에 관한 글을 접할 때도 저랑 많이 비슷함을


느껴 마치 동지애가 된 듯한 느낌입니다. ㅎㅎ


 


저는 바다가 인접한 인천이 고향인데도 불구하고, 날생선은 아예 먹어보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익힌 생선들은 좋아합니다. 특히나 갈치, 조기, 우리 자랄 땐, 밴댕이 구이도 좋아했구요.


엄마가 아지라는 생선 졸임을 자주 해주셨구요. (고등어와 비슷한데, 고등어보다는 약간 작습니다.


고등어보다 비린내가 덜하지요.가격도 저렴하구요) 뱅어포 구이도 자주 해주셨고…


가자미, 박대, 망둑어/ 같은 생선을 주로 파, 마늘, 양파 등을 잔뜩넣어 졸여주시는 걸 잘해주셔서


그런 생선들을 맛있게 먹으며 자란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선은 당연히 굽거나 졸여서 먹는 걸로만


알고 자랐어요.


 


아버지는 황해도 옹진이 고향이신데, 음식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셨던 걸로 기억해요.


소간을 날로 드시는 걸 즐기셔서 시력이 나빠지는 저에게도 권유해서 억지로 눈을 감고 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도저히 비릿하고, 피색깔이라 울먹이며 안먹는다고 떼쓰다가 살짝 프라이팬에 구워서 먹었던 생각도 나고…


낚시를 좋아하셨으니 회도 즐기셨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집에선 생선회를 드신 기억이 없습니다.


 


언젠가 집에서 친구분들끼리 개를 잡았다고 해서 우리집에서 보신탕을 끓여 친구분들에게 나눠 줘서


보신탕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시뻘건 색인데… 저는 처음엔 보신탕인줄 모르고


소고기랑 비슷한 고기라고 해서 조금 맛본 기억으로는 살이 매우 부드럽고, 소고기 살처럼 담백했던


기억이 나네요. 개고기란 얘기를 듣고는 입에 손가락을 넣어 토해내려고도 했어요. ㅎㅎ


 


여름같은 복날에는 백숙을 해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엄마 따라 시장갔다가 닭을


잡는 광경을 자주 봤기 때문에 닭고기 또한 먹지 않았어요. 저는 고기란 소고기 국과 김치찌개에 넣는


돼지고기, 석쇠에 구워서 먹는 돼지고기/ 정도만 먹은 기억이 납니다.


닭고기는 겉껍질이 징그러워서 살로만 발라서 조금은 먹었던 것 같구요.


 


직장 다니면서부터는 회식 자리가 많아 소갈비와 돼지갈비 등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지만,


생선회를 먹으러 가는 날은 반찬만 집어 먹다가 혼자만 멀뚱멀뚱 앉았다가 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ㅎㅎ


그때 저는 실은 매운탕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매운탕에 넣는 고추기름이 시뻘겋게 둥둥 떠있는 것과


산초같은 향이 짙은 양념 때문에 먹지 않았지요.


 


어찌보면 은근히 음식을 그렇게 가리던 제가 모든 음식을 거의 먹기 시작하게 된 것이 결혼을 하고


부터였나 봅니다. 시아버님이 워낙에 생선회를 비롯해서 육회를 즐기시는 분인지라 남편도 회를


즐기더라구요. 남편은 고기는 별로 안좋아하는데… 닭고기를 유난히 싫어합니다.


산낙지를 비롯해서 회를 참 좋아해요. 담백하고 깔끔해서 좋다나요? 결혼 날짜잡고 시댁에 놀러갔는데,


어머님이 안 계신 날인데… 아버님이 느닷없이 육회를 만들어 가지고 오라고 해서 기겁을 한 적이 있었어요.


소고기와 오징어를 내밀면서 저보고 육회와 오징어를 날로 채썰어서 가지고 오라더라구요.


‘ 어떻게 날로 그런 걸 먹느냐고? ‘ 남편이 옆에서 이것저것 양념을 넣는 걸 가르쳐줘서 만들어 가긴 했는데…


그때 난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오징어는 제가 데쳐서 가져갔어요. ㅎㅎ 아버님 친구분들이


오셨었는데…  못한다고 할 수도 없어서…


 


결혼하고도 한참을 그런 것 때문에 많이 힘들더라구요. 시아버님이 집에서 꿩과 참새를 잡아서 구워서 드시는 것도


봤는데… 아무리 시아버님이지만, 도무지 그분의 그런 걸 이해하기 힘들어서 한동안 그런 것 때문에


정말 많이 힘들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여자는 시집가면 그 집 구신이 되라는 옛말처럼, 꾹꾹 참아가며


결혼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시댁의 그런 음식 문화를 차츰 접하면서 이제 저도 회를 즐기지는 않지만,


남들 먹을 때, 옆에서 조금씩 먹는 정도는 되었네요. 그러나 아직도 저는 회가 맛있는줄은 잘 모르겠어요.


아주 배가 고플 때, 입에서 부드러운 살 맛이 느껴지기는 하나 즐기지는 않는답니다.


 


음식이란 자라온 환경과 사고방식에서 많이 좌우되는 것 같아요. 이것이 먹는 음식이다 / 라고 생각하면


못 먹을 건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못먹는 사람의 심정은 이해해줘야 될 것 같아요.


몇달 전, 오이도를 같이 간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소고기 국도 기름기가 있어서 먹지 않던 친구여서


제가 별종/ 이라고 생각도 하고 그랬었는데… ㅎㅎ 이제 그 친구도 결혼하더니 고기를 잘 먹더라구요. 하하.


 


그러나 아직까지 저는 보신탕은 싫더라구요. 수술을 몇번씩 해서 의사 선생님이 보신탕을 먹으라고


권하기도 했는데, 그런데도 저는 먹지 않았답니다. 아마도 앞으로도 쭉~ 먹지 않을 것 같네요. ㅎㅎ


추어탕도 시아버님 덕분에 억지로 먹어봤고… (이거 먹으면 설사해서 싫더라구요. ㅎㅎ )


 


선생님처럼 그냥 나물 반찬, (이것도 지금은 상추니 깻잎이니 날로도 먹지만, 예전엔 생거로는 먹지도 않았어요. ㅎㅎ)


깻잎을 양념에 재서 살짝 쪄서 먹는 반찬을 제가 참 좋아하는데… 지금은 날거로도 잘 먹지요.


이것도 결혼하고 나서의 일입니다. ㅎㅎ ) 끓인 국이나 찌개, 익힌 생선 등이 좋은 것 같아요.


선생님이 날거를 싫어하는 이유가 저도 마찬가지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원글보다 답글이 더 길어지는 모양이네요. 에구… 죄송해라.


선생님 글을 보다보니 자꾸만 저도 생각나는게 많아져서 그런가 봅니다.


실례를 용서하시구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휴일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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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댓글란을 따로 정리하면서

 계획을 진행하다가


비효율적인 점이 발견되면


시행 도중에 고치는 경우가 있다.


대개의 경우 고치는 시도는 적합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또 고친다.


문제점은 늘 생기게 마련이다.


주변환경이나 상황 또는 사물에 대한 인식은


늘 변하기 때문이다.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인헤겔은


모든 인식과 사물은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발전한다고 하였다.


 


일상일기가 개인의 일기같은 느낌을 주어 나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약간 거리감을 느낄것 같아서


일상이야기로 제목을 바꾸었고, 독자들이 댓글을 달 수 있도록 하였더니


많은 독자들이 먼저대로 환원하는 것이 좋을것 같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후퇴도 발전인가? 후퇴도 정-반-합인가?


이런 때는 후퇴가 아닌 르네상스같은 재상, 부활, 즉 다시 돌아가는 발전인가?


 


내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공개된 일상일기는 읽는데 부담도 없고, 비밀일기의 성격도 아닌 그야말로


살아가는 주변이야기여서 일상일기 라는 제목도 별 문제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런것 같기도 하고, 원래대로 환원하라는 요구가 많아서


오늘 그 동안 올라온 댓글을 지우기로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따로 별도의 공간에 저장해놓고 보고싶을 때는 


읽어볼수 있도록 하였다.  


이미숙, 송을석의 글을 따로 보관하면서 또 한편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본다.


미숙의 글은 아름다웠고, 을석의 섹소폰 소리는 정말 감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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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KOREA : 휴머니스트가 살기 어려운 나라



 


 



나는 생선회를 먹지 않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동료들과 회식을 할 때 주변사람들에게 불편을 주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교감을 할 때도 선생님들이 회식할 때 나 때문에 일식집을 피하곤 했다. 하여튼 나는 문제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내가 날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첫째는 충청도 내륙지방에서 자란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음식은 문화이다. 문화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통해 가진 공통된 생활양식 또는 행동양식이다. 결국 개인이 어떤 음식에 맛을 들이고 좋은 감정을 갖는 것은 음식문화의 기초단위인 가정에서 비롯되고, 나아가 그가 속한 향토의 문화에 길들여지고, 오늘날처럼 문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시대에는 음식도 대중문화의 성격을 갖고 개인에게 스며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자란 가정은 날 생선을 먹지 않았다. 신선한 생선이 내륙으로 들어오기 어려웠기 때문에 소금에 절인 생선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후배교사가 나를 대접한다고 횟집으로 데리고 가더니 산 낙지를 젓가락에 둘둘 말아서 머리부터 통째로 먹으면서 먹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신경질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산낙지 전문점에서 정력에 좋은 산낙지를 대접하는데 자신의 성의를 몰라준다고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정력에 좋은 음식을 찾아다니는 속물인가? 정말 기가 막혔다.




둘째는 아마도 나의 타고난 인도주의(Humanism)정신일 것이다.




나는 어려서 시골에서 자라면서 토끼와 닭을 키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그 수가 제법 늘어서 토끼 50마리, 닭 100마리가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토끼가 먹을 풀을 뜯으러 들로 나가는 것이 주요 일과였다. 닭도 역시 지금처럼 사료를 먹여 키우는 것이 아니고, 내가 들에 나가 닭이 먹을 풀을 뜯어오고, 추수가 끝난 논으로 닭을 내어 몰아 이삭을 먹게 하고, 닭을 풀어놓으면 닭 스스로 집 주변의 땅을 발로 헤쳐 여러 가지 유기물과 벌레, 풀씨 등을 먹으며 저절로 자라는 시절이었다.  토끼는 밥을 주는 나를 보면 뛰어오고, 닭도  싸레기 쌀을 뿌려주면 나를 졸졸 따라오곤 했다. 멀리있는 닭을 부르려면 나는 고고고고–소리를 내곤 하였다. 




아버지가 토끼와 닭을 잡는 날은 나는 거의 밥을 먹지 못했다. 고기가 귀한 시절이라 단백질 부족으로 뼈와 근육의 발달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시절이었지만 내가 기르던 토끼와 닭을 차마 먹을 수 없었다. 고기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음성을 뒤로 하고 뒤뜰에 가서 소리 없이 울곤 하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닭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식구 수대로 닭을 5 마리나  잡았으니 안 먹은 표시가 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먹지 않았다.  아버지의 외숙이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하여 소를 팔았던 날 텅빈 외양간을 보면서 서럽게 울던 기억이 난다. 나는 타고난 휴머니스트였다.




나의 동물에 대한 사랑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연에 까지 미쳐 식물을 볼 때도 그러했다.  지나가다 물을 먹지 못하고 고통 받는 화분을 보면 나는 아무리 바빠도 물을 준다. 그냥 간다면 집에 가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이다. 평생 한 번도 목마른 화분을 그냥 지나친 적이 없다. 교감을 할 때도 방학하는 날 교실에 남는 화분이 있을까 염려하여 담임선생님들에게 교실에 있는 화분을 학교 현관에 내놓을 것을 알리고, 학생들이 하교 후 전 교실을 순회하여 남아있는 화분을 손수 들고 내려오며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나의 이러한 행동을 강박관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나 나는 감히 이것을 나의 휴머니즘이라고 말한다.




위와 같은 연유로 생선회도 먹지 않는 것이다. 익힌 생선은 먹느냐고? 물론 맛있게 먹는다. 날생선과 익힌 생선이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은 분명히 다르다. 날고기는 그대로 피를 보는 살생을 의미한다. 날 고기가 입에 들어올 때 입안의 내 살과 만나는 느낌을 나는 견디기 어렵다. 물컹한 날고기와 내 날고기와의 만남은 그대로 원시이며 식인종이 날로 인육을 먹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화식은 고기를 먹기는 먹되 종이로 싸서 잘 안보이게, 덜 보이게 처리하고 먹는 것이라고 정의하려한다. 물론 나도 “화식은 그래도 휴머니즘이다” 라는 것이 약간 어폐가 있다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날고기를 먹는 것과는 다르지 않는가!




엊그제 돼지갈비집을 지나다 보니 간판에 돼지가 앞치마를 두르고 어서오세요 라고 웃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돼지가 이것을 보면 어떨까? 말이 길었지만 하여튼 내가 휴머니스트 인 것이 날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임은 틀림없다. 




셋째 내가 육회를 포함한 생선회를 먹지 않는 것은 그것이 위생적인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익히지 않고 날로 먹는 것은 대장균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세균과 기생충을 함께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성능이 좋은 구충제가 잘 발달되어있지만 그래도 기생충은 가벼이 볼 수 없다. 특히 서양에서는 여름철에 회를 먹지 않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다.  월 이름에 R자가 들어가 있지 않은 달, 즉 즉 May, June, July, August에는 생선회와 굴을 먹지 않는다. 이 기간이 여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름철에는 익힌 생선도 조심해야한다. 익혀도 상한 조개나 생선의 독소는 조금도 없어지지 않는다. 내가 존경하는 김아무개 교장선생님의 사모님은 재작년 여름에 이웃집에서 보내온 삶은 조개를 드시고 패혈증으로 이틀 만에 돌아가셨다. 서울대학병원으로 달려갔지만 패혈증에는 방법이 없었다. 지금도 가끔 그 분을 뵙곤 하는데 인생 말년에 독신으로 사시는 것이 너무나 쓸쓸하고 안돼보였다. 삶은 맛살조개의 독 때문에 배우자를 잃다니……




회충을 포함한 기생충약은 여러 번 먹어서 안심이지만 여러해 전에 사무실 동료가 강권하다 시피 하여 간디스토마 검사를 했더니 놀랍게도 보균자였다. 디스토마구충제를 먹었는데 일반 구충제와 달리 먹는 방법도 특이했고 까다로웠다. 민물고기 회와 생간은 조심해야한다. 얼마 전 지인이 생간을 먹으면서 같이 먹으라고 나에게 권하였다. 나는 익혀야 먹는다고 했더니 생간을 먹고 구충제 먹으면 된다고 약을 보여주면서 걱정 없다고 했다. 약을 보았더니 간디스토마구충제가 아니고 회충약이었다. 세상에! 회충약이 독약인 것도 모르나? 많이 먹으면 회충만 죽는 것이 아니고 사람도 죽는다. 그리고 간디스토마에 웬 회충약을! 




어제 40년 지기 친구들과 점심을 횟집에서 먹었다. 어린시절부터 평생을 함께하는 정말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러나 내가 회를 먹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나에게 무엇을 먹겠냐고 묻지 않았다. 자연스레 횟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바다에 왔으니 그럴 법도 하겠지 하면서 따라갔다. 나는 익힌 생선은 얼마든지 먹는다. 매운탕을 너무나 좋아한다. 나는 별도로 매운탕을 시키려했으나 다른 사람들이 서둘러 생선회로 정했다. (한 두 번 겪은 일도 아니다. 맹기호는 음식이 까다롭다느니. 매운 것을 먹지 못해 함께 식사하기 불편하다느니 이런 소리를 한 두번 들은 것이 아니니 이젠 만성이 되었다. 하긴 내가 금연하기 전에는 밀가루 음식과, 커피, 매운 것을 먹지 못했고, 늘 주머니에 소화제와 활명수를 넣고 다녔으니 내가 위장이 나빴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다 낳았다. 음……내가 친구들에게 불편을 끼친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그냥 따라가기로 했다. 생선회의 스끼다시 즉, 보조반찬을 먹으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조개국, 꽁치구이, 도다리찜 이렇게 3가지를 먹었다. 보조반찬 중에서 가리비조개회, 회무침, 아나고회, 멍게회, 개불회, 산낙지회, 키조개회 등은 쳐다보기만 하고 먹지 않았으며, 메인메뉴로 나온 도미회, 광어회도 한첨도 먹지못했다. 회를 뜨고 남은 뼈로 매운탕을 끓여 먹으면 될것이니까 문제없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매운탕이 나왔다. 그런데 주인이 밥을 몇 개 드릴까요? 하고 물으니




친구 왈


7 명인데 회 먹어서 배부르니


4개만 주세요! 우리 거의 다 먹었어요.


세상에! 나는 매운탕 뼈다귀하고 이제 먹기 시작하려는데……


이정도면 폭력이다.




조금 미안한지 끝나고 나오면서


나에게 한마디 묻는다 너 게장은 먹냐?


그래! 나 게장 안먹는다!


어쩔래! 




(혹, 네가 잘 먹는 음식이 무엇이냐? )


이렇게 물어야지! 만약 나라면 당연히 그렇게 했다.




하도 기가 막혀서 40년 동안 참았던 말을 했다.


다음에 단 한번만 나에게 무엇을 잘 먹느냐고 물어달라고……




나는 개고기도 먹고, 민물매운탕도 먹고, 추어탕도 먹고, 오리고기도 잘 먹는다.


내가 무얼 그렇게 편식한다고! 단지 날고기만 안 먹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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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오늘



 


 


<오늘>

 


05:00 기상


05:00-06:20 엑셀의 수학함수 공부


06:20 아내 깨움


06:20-06:40 아침식사(삶은 감자 2개, 사과 껍질 채 1개, 블랙커피 1잔)


06:40-07:20 양치질, 화장실, 조간읽기,


07:20-07:30 수원역에 아내 태워다 주기


07:50-10:05 헬스장(스트레칭, 달리기, 근육운동, 사워)


10:30-11:20 스프레트시트 공부하기


11:20-11:40 크라운 베이커리에서 맛있는 빵샀음 ₩5100


              (일본여행에서 돌아와 오늘 집에 오는 작은 아들을 위함)


11:40-12:00 아래층 위층 이불 모두 햇볕에 널었음(아들에게 보송한 이불의 느낌을 주기 위함)


12:00-13:00 점심(된장찌개, 호박부침, 가지무침, 현미잡곡밥 1공기, 콩자반, 맛조개삶은것 5개, 후식으로 커피 1잔과 수박)


13:00-14:30 홈페이지 일상이야기에 글쓰고, 청와대에 같은 내용의 건의문 올림, 첼로음악들음


14:30-15:30 스프레트 시트 공부하기


15:30-17:00 소설책 읽기


17:00-18:00 집안 청소


18:00-19:00 저녁식사(아버지, 어머니, 아내, 일본여행에서 돌아온 둘째아들, 나)


19:00-19:30 안방에 가서 아버지와 대화하기


19:45-20:20 텔레비전 연속극보기


20:20-10:20 소설책보기


10:20-12;00 자유시간


12:00 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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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길을 가는 필부필녀에게 물어보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통령이 자연인의 신분으로서 헌법재판소에 기본권이 침해당했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에 대한 헌법재판소에 보내는 답변서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며 행정부의 수반인 헌법기관이기 때문에 자연인으로서의 헌법소원을 낼 자격이 없다고 답변하였다. 헌법소원자체가 기각되어야한다고 하였다.

 

운동경기에서 심판의 판정에 불만이 있더라도 계속 불복하면 당연히 퇴장감이다. 설사 오심이었다 해도 일단 경기가 진행되면 번복할 수 없다. 심판의 권위를 부정하면 경기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경기도중 사사건건 심판을 불러 이렇게 해도 되냐고 묻고 경기에 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선수라면 당연히 경기의 룰을 숙지하고 경기에 임해야 한다. 동네축구에서도 마찬가지이며, 국가대표선수인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노대통령의 헌법소원에 대한 선관위 의견서에서도 나와 있듯이 대통령은 사적, 공적 영역을 구분할 수 없는 살아있는 헌법기관이다. 그 행위에 대한 법적 판단은 헌법이 정한 사법기관의 고유권한에 속한다. 경기규칙이 마음에 안 든다고 대통령이 자꾸 심판을 흔들어 대는 것은 법치주의와 권력분립의 정신을 훼손할 소지가 크다. 노대통령의 자중을 거듭 촉구한다. (이상은 오늘 경향신문사설, 동아 e-TV의 내용에서 발췌하고 조금 첨가한 것이다.)


 


 


(대통령에게 바란다 : 선거에 있어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은 간단한 의미이다. 너무 깊게 생각하신 것은 아닌지? 해석이 명확한 것을 자꾸 따지시니 보기에 딱하다. 길을 가는 필부필녀에게 물어봐도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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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미운 오리 소리

 


 


  내심 실패를 바랬다.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고자 한 평창군민과 강원도민, 한국국민들의 뜨거운 염원


 


과 부푼 기대가 세상을 뒤덮고 있었지만, 유치 실패를 바랬다. 그리고 다행스


 


럽게도 유치 실패가 현실이 되어 내심 기뻤다. 유치단과 평창군민들이 눈물을


 


흘릴 때 나는 쾌재를 불렀다.


 


왜 동계올림픽 유치가 안 되길 바랐냐면,


 


동계올림픽 신규경기장 증설로 산하가 짤려나가고 파괴될 것은 불보듯 하다.


우리나라의 마지막 청정지역인 강원도가 속살을 드러내고 파괴되어가는 모습


 


을 보기 싫기 때문이다. 왜 지도자가 되면 한건 하기 위해 환경을 파괴하는지


 


모르겠다. 도로가 뚤리고 시간거리가 단축되고, 인터넷이 발달했다고 우리가


 


행복해졌는가? 나는 내 어린 시절이 소를 끌고 들판에서 풀을 먹여야 했던 여


 


름날의 지루함만 조금 줄인다면 나머지는 지금보다 행복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도룡룡 서식지 파괴를 막기 위해 40일 이상 단식하며 도로개통을 반대한


 


한 스님의 행동에 공감을 보냈다.


 


나는 오래전부터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에 소속되어 환경운동을 했다.


현재 환경단체활동은 거의 하고 있지 않지만 교단에서 수업을 할 때는 학생들에게 정말 열심히 환경교육을 했다. 나는 환경운동연합 최열씨와 아무런 교분도 없지만 어제 뉴스에서 정치판에 뛰어든 것을 보고 무척 실망하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우려하였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청정지역을 찾아내어 어떻게 보전할것인가 고민하였다. 청정지역을 발견하고 그 곳에 탐사기록을 남겼지만 몇 달 후에 가보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된 것을 보고 학생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오염현장도 찾아가 원인을 탐색하고, 대책을 세우기도 하였지만 나의 환경교육은 주로 오염지역보다는 청정지역을 찾는 일에 비중을 두었다. 특별하게 환경의 중요성을 가르치지 않아도 청정한 지역을 찾아 보여주면 학생들이 자연스레 환경애호가로 변하였다 


 


나에게 돈이 많이 있다면 일정한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여 개발하지 않고 청정한 생태계를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10만평 정도의 임야를 살 수 있으면 가능한일이다.


 


 


< 대부도에 근무하던 시절 학생들과 환경탐사활동을 하고나서 간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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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으시대지마라!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1987년 6월 29일 이른바 6.29선언이 발표되었다.




내용의 골자는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는 방법 대신 국민직선제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사실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정권은 7년 내내 정권의 정당성 시비에 시달렸다. 그리고 전두환정권 말 대통령국민직선제 개헌 요구가 한창이던 1987년 4월에 4.13호헌조치라는 것을 발표하여 헌법을 개정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당시 고등학교에 근무하던 필자도 호헌의 정당성에 대하여 주민을 계도하라는 공문이 있었지만 실제로 주민을 계도한 사람도 없었고, 하려고 마음먹은 교사도 없었다. 하여튼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는 계속되었고, 6월 9일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이한열군 사망이 있었다.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이한열 군은 호헌철폐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 했다가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다음날인 6월 10일 여당은 노태우를 대통령후보로 선출했다. 7년 임기의 대통령을 다시 체육관에서 뽑겠다는 것이다. 7년이면 4년짜리 대통령을 두 번하겠다는 것이다. 박대통령 시절에는 4년이었으니까! 전두환은 7년을 했다.




바로 이날(6월10일) 시작된 6월 민주항쟁에는 전국에서 연인원 500여 만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혼란 정국을 수습해야 했던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 후보의 이름으로 ‘6·29민주화선언’이란 승부수를 던졌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을 보장한 대통령 선거법 개정을 내걸었다.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한 것이다.




6월28일 오후 6시쯤


학교에서 퇴근하여 버스에서 내린 나는 수원역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보았다. 6월 내내 수원역에서는 시위가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의 시위 규모는 대단했고, 나는 그 현장을 보고, 이미 이 정권은 정당성을 잃었으며 민의에 굴복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현장을 보고 있던 나는 집에 가서 아들을 데리고 거리로 나섰다. 만 3세였던 아산이를 목에 태우고 시위대를 따라갔다. 가는 길에 주인수건축사무소 소장을 만났다. 주소장은 내가 아끼는 동네의 후학이다. 나 보다 한 살어린 주소장은 어린시절부터 옆집에 살면서 우정을 키운 사이다. (지금도 만나면 나에게 꼭 형님 형님하면서 따른다. 나도 주소장님이라고 부른다.) 아니 형님 어디가십니까? 응, 이 정권은 이미 기울었어, 민주화 역사의 현장을 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가네! 주소장은 어린아이를 목에 태우고 최루탄 냄새가 자욱한 도로를 따라가는 나를 어이없어 했다.




주소장과 헤어지고 나서 수원소방서를 지날 즈음 경찰병력이 최루탄을 쏘면서 시위대를 덥쳤다. 나는 아산이를 감싸안고 잽싸게 아무 집에나 들어갔다. 마침 대문이 열려있는 가정집이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 집에서 한참을 지난 다음에 밖을 살펴보니 추척하던 경찰이 없어진 것 같아서 동네 골목길로 돌아서 집으로 걸어왔다.




6월10일을 민주화항쟁기념일로 정했다 한다.


일제하 3.1 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학생들이 벌였던 6.10만세운동을 이어받은 것이라면 모르되, 1987년 6월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면 나는 이것에 동의할 수 없다.




박정희 독재는 무서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박정희대통령 시대에 교육받은 내가 어떻게 자유의식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초, 중학교를 거치면서 막연하게나마 자유와 평등이 소중한 가치이며, 언론의 자유가 중요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우리나라 헌법의 중요한 두 축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유물론이 어떠한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물질이 아닌 정신이라는 생각을 분명히 갖게되었다.


 


박정희대통령이 유신헌법 개정안을 발표하던 날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그날 나는 서울역에 있었다. 석간신문을 사서 그 자리에서 개정헙법안의 모든 내용을 읽었다. 유신헌법은 매우 잘못된 법이라는 판단을 했다. 서울역 주변의 사람들이 개정헌법안이 발표된날 신문을 보지 않고, 다른 날과 변함없이 평안히 길을 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하긴 지금도 전철 안에서 조간신문을 읽을 아침 출근시간에 너나 할것없이 스포츠 신문을 들고있는 사람들을 보면 공연히 화가난다.


 


나는 어려서부터 정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나보다.   고등학교 시절 교련교육을 받았는데, 수업이 끝날 때 멸공구호를 주먹을 들고 합창한다.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 4가지 구호 중에서 마지막 이룩하자 유신과업은 입밖으로 소리내지 않았다. 군에 입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1학년 때 동아일보 광고탄압사태가 일어났다. 동아일보 광고란이 공란으로 발간되었다. 나는 자발적으로 모금운동을 하러 다녔다. 기업은 무명으로 광고내용 없이 광고란에 네모칸만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때 위험을 무릅쓰고 실명광고을 내는 기업이 있었다. 부광약품이다. 나는 지금도 그 회사 사장이 누군지 모르지만 용기있는 기업인이다. 나는 지금도 부광약품에서 생산하는 물건을 산다. 블랜닥스 치약으로 유명하다.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해서는 개인적으로 자유에 대한 갈망이 포화상태에 있었다. 당시는 박정희 독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때였다. 유신헌법으로 집권연장하더니 그 유신헌법으로 두번째 체육관선거를 통해 당선되었을 때였다. 그 때 새벽에 혼자 대학에 가서 벽에 글을 붙였는데 내용은 대체로 국민에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가 라는 것이었고, 유신정권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있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내가 부르는대로 당시 여고에 다니던 여동생이 썼다. 정말 나는 영원한 자유인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음성적인 반정부 학생운동이 어떠한 벌을 받았는지 생각해보면 나의 행동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나 혼자 한 일이었으며 이것은 인간의 천부인권인 자유에의 열망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나에게 가르쳐 준것은 바로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시대의 교육이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생각해보니 반공교육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자유와 민주주의의, 인권의 가치를 교육하게되었던것 같다.


 


장황하게 나열하다 보니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말하는것 같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수 있겠다. 나는 그런 뜻이 아니고 그저 한 젊은이로서, 민초로서, 가만히 침묵할 수는 없었다는 의미다. 무슨 일을 했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박정희 독재는 정말 무서웠다.


그 때는 감히 시위할 생각을 못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끌려가는 세상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는 박정희독재에 비하면 구우일모, 창해일속, 조족지혈이었다. 박정희독재에 항거하려면 목숨을 걸어야했다. 박정희독재에 맞서서 싸운 사람들이 진짜 민주화 인사들이라고 감히 나는 단언한다. 누구일까? 김영삼, 김대중, 함석헌, 이런 정도의 사람들이다.(이 사람들의 노선에 대하여 나 개인적으로 다 동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중에 내 생각과 다른 사람도 있다.) 나머지는 민주화 투쟁인사 대열에 넣고 싶지 않다. 전두환 군사정권하에서는 개나 소나 다 데모하고 시위했다.




6.10 민주항쟁기념일이라고?


볼썽사납다. 


일하고 나서 했다고 나대거라!


한일도 없으면서 나서기는……


 


 


민주화투쟁을 했다고 말하려면 적어도 자유와 민주주의에 목숨을 걸었어야지,


어린 아들 목마 태우고 시위대에 참가했던 맹기호는 감히 민주화투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었던 사람이다.  




박정희독재에는 무서워서 말 한마디 못했으면서 박정희 죽고나니까 갑자기 민주투사가 이곳 저곳에서 막 나오는데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나는 박정희의 경제개발 공을 인정한다. 오죽 백성의 배고품을 해결하고 싶었으면 “잘살아보세” 노래를 대통령이 직접 작사 작곡 했을까! 우리 역사상 어느 지도자가 백성이 굶는것을 이토록 진정으로 가슴아파한 사람이 있었는가?  새마을노래도 직접 작사작곡했는데 그 가사를 생각하면 기가막히다. 새벽종이 울리는 소리들 듣고 새로운 마음으로 아름답게 우리마을을 가꾸자는 것이다.


 


그러나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억눌린 자유가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는 내가 피부로 절절하게 느꼈다. 박정희는 공이 큰 만큼 과실도 크다. 그 시대의 논리로 봐도 국민이 감내하기에는 버거운 사람이었다.






오늘 내가 조금 흥분한 것 같다.


그러나 1987년 6월에 투쟁했다는 사람들,


특히 386세대 어쩌구 하며 으시대는 사람들은 조심하고 겸손할지어다.


노찾사 노래를 들으면 코웃음이 난다. 그런 노래부른 시절은 저항도 아니었다. 놀이였지!


그대들은 별로 한일 없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이런 말 들어보기나했는가?


 


 (1980년 봄에 내가 직접 함석헌옹의 집을 찾아가서 1:1로 정치담화를 나눈적이 있다. 당시 내나이 20대 중반의 젊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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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이 노래가 너무 좋다


 


SG워너비 의 노래 ‘살다가’


 


요즈음 젊은이가 이런 노래도 부르나?


사실은 몇년 전에 나온 노래인데


내가 무심했었나? 아니면 느낌의 폭이 오그라들었나……


세상에! 요즈음에 이런 노래가 있다니……


이 노래가 너무 좋다!


계속 들었더니 이들의 아름다운 서정에 눈물이 난다……


 


「SG Wanna BE – 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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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금연 6주년의 이익



금연나라 라고 불리우는 싸이트가 있다. 내가 자주 들어갔던 곳인데


몇년동안 잊고 있다가 오늘 들어가보았더니 옛날 생각이 난다.


그리고 금연에 새롬게 도전하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남겻다 여기에 복사해 올린다.


 


20일만 있으면 금연 6주년이되는 사람입니다.
금연 6주년의 이익!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겠습니다.


고백하자면 금연 3주년 되는날 아내가 사무실로 3주년 축하 축전을 보냈더라구요 그날 저도 기뻐서 식구들을 데리고 회식을 했습니다. 회식하는 자리에서 식당주인에게 담배한개피를 달라고 했어요 기념으로 피워본다고!아내와 아이들이 말렸지만 저는 불을 붙였고…..세상에!처음 두모금 정도는 머리가 핑돌더니 그 다음부터는 아무렇지도 않고,그렇게 맛잇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식구들 몰래 1년을 피우는데 죽을뻔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금연을 시작하여 지금 6주년이 된것입니다. 두번을 합하면 9주년이군요! 



 


1. 소화제를 끊었습니다.



 


늘 속이 더부룩하고 쓰리고 트림이 나와서 평생소화제를 먹었고, 활명수 무척 먹었어요. 주머니에 훼스탈하고 활명수 항상 넣고 다녔구요.여행을 갈라치면 가방에 소화제 천지였어요.  베스타제, 위청수, 베아제도 있지요 저는 언젠가는 위암에 걸려 죽을것이라는 두려움이 항상있었어요. 위 내시경 여러번 햇습니다. 의사선생님이 담배를 끊으면 소화는 저절로 될것이라고했는데(담배를 피면 위가 망가진다는 것은 이미 스타디가 끝난이론이라고 말했어요 의사의 말을 그대로  적었습니다. 연구가 이미 끝난 이론이라는 말이지요) 정말이지 금연 이후 저는 소화제 한번도 먹지않았어요



 


바나나, 고구마, 과자, 수제비, 칼국수, 커피, 떡, 빵 등은 먹기만 하면 생목이올라오고, 체했는데 지금은 얼마든지 먹습니다. 그리고 술도 잘먹어요 ㅎㅎㅎ 절제합니다. 소주반병이상 먹지않아요



 


2. 이가 튼튼해집니다.



 


풍치에 시달렸어요 가을바람만 불어도 이가 시리기시작했지요 충치는 정말로 고질병입니다. 그런데 금연이후 풍치가 저절로 낫어요. 정말로 신기합니다. 이가 강력해졌어요!



 


3. 피부가 젊어집니다.



 


얼굴색이 희게 변하고 뽀얗게 됩니다.
검은얼굴이 환해지니 모두 젊어졌다고 말합니다.



 


 


4. 입냄새가 없어졌습니다.



 


어느날 사무실에서 처녀직원이 제 앞을 지나다가 손으로 코를 막는것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하필 제가 담배 피운 직후에 가까이서 지나치게되었지요. 왜 금방담배피운 입냄새 있잖아요? 그후 담배피우고 나서 껌을 씹기도 하고, 은단을 먹기도 했는데요 아가씨들이 또 은단냄새를 싫어합니다. 내앞에서 코막은 그 사건 잊혀지지 않아요. 지금은 어떠냐구요 제 입에서 절대 냄새나지 않아요!



 


5. 금연 이후 자녀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합니다.



 


두 아들은 아빠가 힘들게 담배끝는 모습을 보더니 절대로 담배 피우지 않겠다고 합니다. 말이 필요없어요. 금연을 보여주는것이 제일 좋은 금연 교육입니다.

이제 저는 담배의 욕망에서 벗어낫습니다.
그러나 제가 죽을병에 걸려서 한달밖에 살지 못한다면
담배를 다시 피울겁니다. 제 기억에 담배는 정말 맛있거든요.
그러나 지금은 절대 피우지 않습니다. 금연은 이익이 훨씬 크구요.
그리고 꼭 피우고 싶은 마음은 이제 없어졌거든요.
만약 지금 담배 한대를 피운다면? 금연 6주년도 믿을 수 없습니다. 무너집니다. 그래서 절대 피우지 않습니다.

마지막 한마디!
저는 하루 하루를 모아서 6년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제일 힘든것은 금연 첫날이었습니다.
하루를 참기가 그렇게 힘들더라구요 그런데 그 하루을 참으니 할수 있을것 같았어요…….



  다음에 생각나면 또 올릴게요…..  모두 힘내셔요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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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아침에

오늘 그가 찾아왔다.

아침 7시 55분

그가 왔다……

여러 날 만에 날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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