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미륵반가사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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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국보 제 83 호 ]                           [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국보 제  78호 ]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정확한 제작시기나 제작국가를 알 수 없다.

 오른쪽 다리를 넓적다리 위에 얹은 반가부좌의 자세로 왼손은 오른쪽 다리의 발목을 잡고,

오른손은 팔꿈치를 무릎 위에 붙이고 손가락을 뺨에 살짝 대고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금동불상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2013년  3월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전시협약을 맺어

10월29일부터 내년 2월23일까지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등을 전시하기로 했다.

이 전시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이 계획한 것인데 갑자기 이에 대해 문화재청이 국가지정문화재의 대량 반출은 위험하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문화재청은 특히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국외 전시를 강하게 반대하였다.

회의에 참석한 한 문화재위원은 “반가사유상을 장기간 국외로 반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고 전했다.

변영섭 문화재청장 역시 ‘국보 83호가 너무 자주 나간다’며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고 말했다.

변 청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이 1957~2008년 8차례나 해외로 나갔고 유물 훼손이나 도난 우려가 있다”고 이유를 말했다.

 변 청장은 이 자리에서 대안으로 이 불상보다 크기가 10㎝ 정도 작은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83.2㎝)을 가져가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전시될 유물들이 작아서 문제”라고 난색을 표하자 “큰 유물 전시를 원한다면 석굴암을 떼어 가 전시하라”고 말했다고 변 청장은 밝혔다.

 메트로폴리탄박물관장은 한국에서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을 반출할 수 없다고 하자 미국에서 전시회를 취소하겠다고 하여

결국 국보 83호의 미국 전시 반출은 허용되었다. 다음에 국립박물관에 가면 국보 83호를 다시 자세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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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 1호 목조 미륵반가사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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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 ]                            [일본 국보 1호 목조 미륵반가사유상]

 

두 불상을 비교하면 거의 모양이 같아서 일본 국보 1호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목재의 성분이 일본에서 자라지 않는 한국산 적송임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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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명품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올려본다.

 

2013년 미국 반출 때는 보험가액이 약 500억 원으로 책정되었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통상 보험평가액은 실거래 금액의 10분의 1 정도로 산정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이 반가사유상은 수천억 원을 호가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말이 수천억이지, 그 역사성, 작품성 등을 따진다면 이미 돈으로 가치를 논할 수가 없다.

 

             출토지가 불명확하여 신라작과 백제작으로 보는 견해가 분분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이 상은 출토지가 정확하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따라 신라작과 백제작으로 보는 견해가 분분하다.

                                                              지금까지 국보 83호 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제작지를 근거로 신라작이라는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두 상은 삼면관의 보관 형태, 가슴과 허리의 처리, 무릎 밑의 옷자락과 의자 양 옆으로 드리운 허리띠 장신구 등이 매우 흡사하여  일찍이 양국의 고대 불교조각 교류에 있어 주목을 받아왔다.

            고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은 당시 일본 목조불상 대부분이 녹나무나 비자나무로 제작된 것과 비교하여,

                한국의 경상도 일대에서 많이 자생하고 있는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제작방법에 있어서도

신체의 각 부분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 다음 짜 맞추는 일반적인 방법과 달리 통나무 하나에 상을 그대로 깎아서 조각되어 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 623년조에 신라에서 가져온 불상을 고류지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어 이 불상을 목조반가사유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고류지 상이 국보 83호 상에 비해 정적인 느낌이 강하여 서로 다른 조형감각을 풍긴다는 점도 제기되고 있으며,

   미술사적으로 조화롭고 균형 잡힌 형태와 우아하고 세련된 조각 기술로 미루어 백제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함께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제작지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함께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하겠다.

<아래의 내용은 대한민국의 국보에서 자료를 받아왔다>

 

반가사유상은 반가부좌를 틀고(半跏) 현세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한 상념에 잠긴(思惟) 미륵보살을 표현한 모든 형태의 불교공예품을 가리키는 유물명이다.
우리나라에서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해도 국보 78·83·118호[1], 보물 331·643호 등 여러 점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유명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국보 78호와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둘 다 삼국이 한창 피 터지게 싸우던 시기인 6~7세기 만들어진 유물로,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고대 불교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힌다.
국보 78·83호 두 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여느 문화재와 달리, 단독으로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귀한 취급을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불교 문화재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보러 온다”는 마니아 그룹까지 생겼다.
 박물관 큐레이터가 유물을 설명해주는 ‘큐레이터와의 대화’ 시간에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유물이다.
모 회사원은 “반가사유상을 보고 있으면 영혼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으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본래 2개 모두 한 번에 보여줄 수도 있지만, 문화재의 특성과 관리로 인해 보통 6개월에 한 번씩 로테이션을 도는 것처럼, 한 불상이 6개월 동안 전시되는 동안 나머지 하나는
 수장고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문화재연구소로 옮겨져 연구대상이 되거나, 또는 보존실로 모셔져 특수 약품 사우나처리를 받으러 간다.
해외 문화 교류로 외국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총 9번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특히 2013년 10월 말에는 세계 최대급 박물관으로 꼽히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신라 특별전 전시를 위해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반출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반구대 덕후로 알려진 당시 문화재청장이 반출을 불허하고 레플리카를 미국으로 보내려다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측의 수차례에 걸친 요청으로
문광부가 직접 개입하는 소동 끝에 반출이 이루어진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78호)

 이것이 미륵보살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 고뇌하는 모습, 혹은 출가를 막 결심한 모습을 나타낸 표현이라고 하여 태자(太子)사유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실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이라는 설의 발원지인 일본에는 관음보살 반가사유상도 있다! 현재는 미륵보살이라는 설이 가장 대중적이지만 일부 권위 있는 학자들은 반대 의견을 냈다.
불상 전파에는 크게 두 가지 경로가 있다. 동남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 일본에 전해지는 경로와 티베트 위쪽의 실크로드(사막)를 거쳐 대륙으로 전파되는 경로다.
 전파 경로에 따라 인도 내의 발상지와 종파가 다른데, 여기서 불상의 모습이 여럿으로 갈린다.
가령, 유명한 간다라 지역 불상은 헬레니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리스인 석상의 특징을 많이 가졌다면,
마투라 지역이나 굽타 왕조의 불상에서는 인도인 석상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여러 불상과 미륵 반가상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
옷이나 관, 그리고 손가락의 특징에 따라 불상의 성격을 추측하는데, 문제는 반가사유상이 취하는 자세가 석가모니불이 보리수에서 번뇌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고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사유하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경우 일부 반가사유상은 불상에 태자사유상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전자가 맞다고 공인되며,
일부 반가사유상은 혼란기인 위진남북조 시대에 미륵신앙 유행과 함께 등장하였으므로 미륵불일 개연성이 상당히 높다.
문제는 한반도에서 등장한 반가사유상은 어떤 불교 교리와 함께 등장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에 여러 학설이 분분하지만 공통으로 삼국 시대에 등장한 왕즉불 사상인 호국 불교에서 출현했다고 본다.
전쟁이 이어지던 삼국시대에서 미래에 부처가 혼란한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불 신앙이 유행한 것이다.
왕실에서도 이를 수용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신라는 왕족들의 이름을 석가모니 가족들의 이름과 동일하게 지었다.

왕자의 이름을, 불교에서 성왕으로 묘사되는 전륜성왕에서 따오기도 했다.

특히 신라는 화랑을 미륵불의 화신으로 여겼으며 화랑들이 전투를 했던 영역에서 거대 반가사유상이 발견된다.

경북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보물 제997호)은 하반신만 남아 있지만, 복원 추정 높이 2.5m로 세계에서 가장 큰 반가사유상이며,
옷주름 형태가 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매우 흡사하다. 삼국의 반가사유상이 미륵불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남아 있는 기록과 유행하던 신앙, 혼란한 시대상을 통해 추측건대 한반도에서 기술적, 심미적으로 완성된 형태의 반가사유상이 많이 발견된 것은
미륵불을 통해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염원했던 민중의 바람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디서 만들어졌는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에 얽힌 또 하나의 의문은 바로 고향이 어디인지 확실히 모른다는 것이다.
두 보물은 직접 발굴해 소장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도굴했던 것을 박물관이 거액의 돈을 주고 사 온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학계에서는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게 보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를 100% 확신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
83호에 대해, 일제강점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입수 기록에는 “국보 83호는 1912년 당시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이 일본인 골동품상에게 2,600원(지금 돈으로 약 26억 원)을 주고 구입했다”고 적혀 있다.

78호는 일본인 골동품상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에게 바쳤던 것을 총독이 조선총독부 박물관(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출토된 지역이 어디인지 매우 논란이 많았다. 옛 백제 지역(충청도 지역)의 사람들과 옛 신라 지역(경상도 지역)의 사람들은 서로 자기네 것이라고 다투고 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불상을 처음 발굴한 인간들이 일본의 도굴꾼들이기 때문이다. 도굴꾼들의 우두머리인 가지야마 요시히데는 이 불상이 어디서 출토됐는지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1912년에 83호 불상을 사들인 이왕가 박물관의 일본인 관장은 “경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린 세키노 타다시는 1933년 발표한 논문에서 경주시 남쪽 오릉 부근 폐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학자인 이네다 하루미즈는 1915년 발표한 논문에서 1910년 충청도 벽촌에서 발굴되었다고 주장하는 등, 불상의 출토지에 대한 진술이 엇갈린다.

현재 학계에서는 78호 및 83호 모두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는데, 특히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은 신라 제작이 매우 유력하다.

신라 제작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몇 가지 있는데, 우선 일본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본 고류지의 창건자가 신라 계통 도래인 성씨인 하타씨를 쓰는 하타노미야츠코 카와카츠(秦造 何勝)이며, 《일본서기》에 623년 신라에서 온 귀한 불상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또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재질이 한반도에서만 자라는 적송 소나무인데, 적송 소나무는 특히 경상도 지역에 많이 자란다.
정밀 분석 결과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소나무가 경북 봉화군에서 자라는 소나무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때문에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는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어 일본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고 있으며, 일본 사학계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과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가진 83호 금동반가사유상 역시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데 크게 무게가 실리고 있다.

삼국 모두 반가사유상을 제작하긴 했지만 신라에서 특히 유행해 많이 제작되었다는 점도 가능성을 높여준다. 완전한 형태는 아니라도 일부분만 남은 반가사유상 유물은 많다. 대부분 신라에서 만든 것이다. 삼국 중 신라에서 불교 열풍이 유독 강하게 불었고, 특히 미륵 사상이 신라에서 크게 유행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신라 제작설을 간접적으로 지지해주고 있다. 결정적으로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 세 개의 반원을 이어붙인 모양의 보관(삼산관, 三山冠)은 신라에서 제작된 반가사유상에서만 고유하게 발견되는 형태이다. 또 1966년 경북 봉화 북지리에서 발견된 석조반가사유상(보물 997호)과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 옷주름이 매우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2018년 4월 강원도 영월에 있는 신라 절터인 흥녕선원지에서 신라에서 제작된 금동반가사유상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국내에서 출처가 명확히 밝혀진 유일한 금동반가사유상이다. 흥녕선원지 금동반가사유상은 신라 반가사유상 고유의 특징인 ‘삼산관’을 쓰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을 축소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 83호의 신라 제작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유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신라특별전에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전시되었다는 점은 83호의 신라 제작설을 정론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한 고증으로 유명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측이 국립중앙박물관과 문체부에 수차례 요청한 끝에 83호의 전시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백제 제작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특유의 미소와 형태가 백제 양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서산마애삼존불로 상징되는 ‘백제의 미소’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미소의 양식은 거리가 있다는 반론이 있다.

오히려 신라 불상의 미소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백제의 미소’보다는 차라리 ‘신라의 미소’와 유사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사유상'(보물 997호)에서 볼 수 있듯이 백제 양식보다는 신라 양식과 거의 똑같다.
사실 자료 부족으로 많은 부분을 추론에 의존하고 있는 고대사 연구의 특성상 이 정도 근거면 충분히 교과서에 정론으로 실리고도 남는다.
하지만 지역 학계의 이기주의로 인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에 대한 논쟁의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 점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국립중앙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금동반가사유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라거나 유력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일부 문서에는 83호가 신라에서 제작되었다고 명시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현재 중고교 교과서에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아예 교과서에 싣지 않은 경우도 많다.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유산인 금동반가사유상이 우리나라 교과서에서조차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공무원 수험서에는 확실한 제작지를 알 수 없다고 서술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국역사교사모임’이 저술한 『처음 읽는 일본사』에서는 일본 고류지 반가사유상의 소나무가 경북 봉화군의 것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백제의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공영방송인 EBS의 대표 국사 강사 최태성도 금동반가사유상이 백제에서 제작되었다고 가르쳤다. 다만 최태성은 최신 강의에서는 삼국시대에 제작되었다고 정정하여 가르치고 있다.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

 

일본 국보인 고류지(廣隆寺(광륭사), 코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1960년, 한 여대생이 우연히 작품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사고를 내는 바람에 연구자들이 복원하려고 그 재질을 연구해보니 적송 소나무였다.
이 적송 소나무는 일본에서는 거의 자라지 않고 한반도에서만 자라는데, 특히 경상북도 지역에 많다. 조사 결과 이 목조반가사유상에 쓰인 적송의 원산지가 경북 봉화군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목조 반가사유상은 재질, 양식, 형태 모두 삼국시대의 목조 불상과 비슷해, 신라에서 제작되어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신의 물방울에서도 거론된 바 있었다.

불상 전체가 소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일부 부분에는 일본에서만 자라는 녹나무를 쓴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전해진 재료를 가지고 일본에서 만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쇼토쿠 태자가 신라에서 받아온 귀한 불상을 모셔 절을 지을 것을 명하고,

이 명을 받는 사람이 신라계로 추정되는 도래인인 하타씨(秦氏) 일족의 하타노미야츠코 카와카츠(秦造 河勝)였기 때문에 신라에서 온 불상이라는 설이 더 강력하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 약 100여 년 전쯤 고친 얼굴 부분이 달라졌다. 미묘한 차이라고 볼 수 있지만,

결국 그 미묘함이 한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만드는 것이므로, 이는 일본의 이 상을 평할 때 반드시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점이다.

또한, 한국의 반가사유상과 매우 비슷하지만 다른 부분도 관찰된다.

덧붙여 우리나라에는 언론 기사 등을 통해 종종 일본의 국보 1호라고 소개되는데, 정확히는 ‘미술품 조각 부문의 제1호’다.

여기에서 말하는 1호라는 것은 일본의 유무형 문화재를 관리하는 문화청에서 매긴 내부 관리용 지정 번호일 뿐이며 1호라고 해서 특별히 중요하다거나 대표성, 상징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달리 숫자에 민감해서 국보 XX호의 숫자를 마치 문화재의 중요도로 착각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에서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으로 유력시되는 목조 불상이
일본의 국보, 그것도 1호라고 하면 이보다 더 좋은 민족 자긍심 고취 소재는 없을 것이다.

국내 언론이나 정보 매체 등에서 일본의 목조반가사유상 얘기를 할 때 ‘국보 1호’라는 것을 유달리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재 관리 방법은 일제강점기를 거친 탓에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국보 1호 숭례문과 같이 번호를 매기는 것 또한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국보의 명칭을 대외적으로 표시할 때 번호를 붙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내부 관리를 위한 번호라서 국보 명칭에 XX호 등의 숫자를 붙일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청 직원을 제외한 보통의 일본인들 중 국보가 몇 호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내부 관리를 위한 지정 번호를 국보의 명칭과 함께 필히 표시하고 있어서 국민들에게 ‘국보 1호=우리나라에서 제일 소중한 문화재’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실정이다.
고류지에는 이 반가사유상 외에 국보로 지정된 반가사유상이 하나 더 있다. 구분을 위해서 위의 반가사유상은 보관미륵,
뒤의 반가사유상은 보계(상투)가 높이 틀어져 있어 보관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보계 미륵이라고 부른다.
덧붙여 역시 한일간 역사 논쟁 유물 중 하나인 칠지도는 ‘미술품 고고(考古)자료 부문의 제15호’다.

흑역사

아사가와 하쿠교의 논문을 보면,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처음 서울로 올라왔을 때 불상 표면에 두껍게 호분이 발라졌고 그 위에 면상을 먹으로 그렸는데, 꼬불꼬불한 수염에 처진 눈꼬리, 빨갛게 칠한 입술로,
그야말로 더럽혀진 흰 벽과 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이왕가박물관 관장 스에마츠 구마히코는 불상을 더운 물로 닦아내고 젖은 거적으로 싸서 겨우 원래 모습을 찾아냈다고 한다.
다만 불상에 호분을 바르고 그 위에 먹과 물감으로 이목구비를 그리는 것은 다른 불상 등에도 행해지는 불상을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한 보존 기법 중 하나이긴 하다. 허나 위에 쓰여 있듯이

 ‘더럽혀진 흰 벽과 같은 모습’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지저분하게 수염 등의 이목구비가 그려졌다고 하는 걸 보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자들이 정말 막 해버린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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