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선물

은희경의 장편소설 [새의선물]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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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을 앓던 엄마는 주인공인 딸(진희)가 6살 때 목을 맨다. 사람들은 정신병이었다고 수군댄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고 새장가를 가고…..진희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의 안쓰러운 보호속에서 성장한다.

어린 소녀의 눈으로 본 군상들이 등장한다. 할머니, 외삼촌, 이모, 그리고 한집에 세사는 다른 집 식구들……

그리고 그 군상들의 삶은 모두 소중하다. 주인공은 어려서부터 다른이의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한다.

그것은 주인공의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다른이의 삶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과 사랑을 정립시켜나간다.

말하자면 정체성을 가져나간다는 의미이다.

 

은희경의 소설은 문체가 건조하면서도 유려하다. 그리고 적절한 서정이 있다. 

그리고 읽기에 좋다. 요즈음 외국문학 책을 주로 읽었는데 국내소설을 읽으니 진도가 빨라서 좋다.

 

좋았던 문장을 원문 그대로 옮겨본다.

 

입술을 비죽거리며 방바닥으로 내려앉는 이모는 스무살을 어디로 다 먹었는지 아무리 봐도 어른스러운 모습을 느낄 수가 없다. 저렇게 어린애 상태로 머물러버린것은 어쩌면 어린시절을 고뇌없이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내게 있어서는 태생의 고뇌야말로 성숙의 자양이었다. 고뇌라는 그 자양이 삼촌방의 다락에서 이루어진 독서라는 자양과 합해지면서 비로소 삶에 대한 나의 통찰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랠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없이 생기는 미운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할머니의 사랑 중에 고운 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나라면 이모는 미운정 쪽이다. 이모는 고운정을 갖기는 틀렸기 때문에 할머니에게서 완전한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나 뿐이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에게 미운정을 얻기 위해 할머니에게 함부로 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자신이 없다. 어쩌면 미운정이란 고운 정보다 훨씬 얻기 힘든 무르익은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식은 잿더미를 천천히 헤쳐보니 그 안에 불씨가 하나 있긴 있었다. ‘그거였어!’

 

눈물샘에 금방이라도 넘칠 듯 고여있던 눈물의 폭포 중 한 줄기가 미처 붙잡을 틈도 없이 뺨위로 미끄러져버린다.

나는 더 이상 눈물의 이탈자가 없도록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서 아예 눈물샘을 봉쇄해버린다. 그리고 가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한다.

 

특히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하고 햇볕이 못 견디게 말을 걸어오는 봄날이면 그런 장면은 부쩍 많아졌다.

 

그는 남자들이 자기 몸 가운데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을 지닌 피조물이란 걸 알게 된 다음 빠지게 되는 운명적 비탄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남자들의 성적욕구를 저주하였다. 나는 그런 남자들의 운명에 동정을 느꼈다.

 

사랑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이 스러진 뒤에는 그 자리에 오는 다른 사랑에 의해 완전히 배척당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랑, 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나는 그것을 광진테라 아저씨의 박광진씨를 통해서 알았다.

 

맨날 남편에게 두드려맞고 살다가 집을 나가 친정에서 일안하고 가만이 누워있는데 온몸이 안파픈데가 없고 또 마음은 왜 그리 불안한지…..여자가 어릴 때 자란 집은 제 집이 아니라는 말도 있으니까……

 며칠 후 재성이 아버지가 친정으로 데리러 온날 때리던 남편이 반가웠다. 그리고 저를 보고 사정을 하데요.  애를 생각해서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구요. 그날 밤 둘째를 가졌어요.

 

삶이 다 그렇듯이 기회는 우연히 찾아온다.

 

내가 알기로는 세상을 서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상처받게 마련이다.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 따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서정성 자체가 고통에 대한 면역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사람의 감정이란 언제 변할지 모르며 특히 젊은이를 변심하게 만드는 일은 이 세상에 너무나많다.

그러므로 상대가 나를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은 상대의 사랑을 잃을 때 내가 불행해진다는 것과 같은 뜻임을 깨닫고

그 사랑이 행복하면 행복할 수록 한편 원하고 유일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이 세상에 그런 사랑은 있지도 않다는 것을 이모는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누구의 삶에 서든 기쁨과 슬픔은 거의 같은 양으로 채워지는 것이므로 이처럼 기쁜 일이 있다는 것은 이만큼의 슬픈 일이 있다는 뜻임을 상기하자.

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사랑을 잃을 때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그러니 상처받지 않고 평정속에서 살아가려면 언제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긴장을 잃어서는 안된다.

 

나는 선이나 악 모두가 내 마음 깊이에 똑같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중 어느 한쪽 만을 나의 진실한 모습이라고 주장할 마음은 전혀 없다.

 

나는 남여의 사랑이란 외모라든가 순간적인 분위기에 의해 그러니까 단편적인 이미지에 미혹되어 생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단정한 학생복 차림에 옷깃에는 뱃지를 달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그리워했던! 이것이었어.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 시간. 저 사람의 웃음과 눈빛이 있는 이 풍경.

저사람과 내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하나뿐인 세상을 공유하며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이 순간

 

할머니는 밤에 돌아다니는 계집애들은 사내들한테 익혀놓은 음식이라고 늦게 돌아다니는 우리의 행실을 나무라셨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모든 중요한 일의 결정적인 해결은 꼭 우연이 해준다. 복잡한 계산과 치밀한 논리를 다  동원하고도 아직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을 때

우연은 그 어렵고도 중요한 일을 어이없을 만큼 가볍게 해결해버린다.  

 

 < 작가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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