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일기♠ 이제 거의 다 왔다. 기다려라!

오늘부터 출근하지 않고 교육정보연구원으로 연수를 받으러 다닌다.

하루 종일 연수를 받고 집에 오니 4시 30분이었다. 평상시보다 퇴근이 이

른 시간이다.

보통 때 는 저녁을 먹고 헬스장에 가는데 오늘은 공복으로 갔다. 점심 먹

은 것도 완전히 소화되어 최적의 상태였다. 달리기 전에 체중계에 오르니

평상시보다 내려가 있었다. 어쩌면 최저 체중을 기록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0km를 달렸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사실 헬스장에서 10km를 쉬지 않고

달리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대부분 5km정도를 달리거나 아니면 걷기와 달

리기를 반복한다. 나는 한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현기증이 났고 배가 고팠

다. 머리가 어지러운 것은 기분 나쁘지만 공복감은 정말 좋았다.

샤워를 마치고 체중계에 올라서니 처음 보는 숫자가 나타났다.

아니 7~8년 전에 늘 보았던 몸무게가 나타났다.

57.05kg!! 운동을 하기 전보다 9kg이 줄었다. 처가에 갈 때 갈비를 사도 10

근 이하로 샀었다. 9kg이면 고기로 쳐도 14근이 넘는 무게이다. 350g만 더

감량하면 20살 때 몸무게가 된다.

이제 거의 다 왔다.

기다려라 56.70kg!!

너는 내 추격거리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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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기♠ 아! 베르테르!!!!

오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다.

33년 전 중학생 때 읽었던 것을 다시 읽었다.

베르테르가 롯테를 처음 만났을 때를 괴테는 다음과 같이 엮고 있다.

[무심코 나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에 닿았을 때, 우리들의 발이 식탁아

래서 맞닿았을 때 아아! 그 감각이 얼마나 나의 혈관속을 굽어치며 흘러내

렸던가! 불에 닿은 것 같이 나는 몸을 뒤로 제쳤으나 한 이상한 힘이 있어

또다시 내 몸을 앞으로 당기는구나!

모든 감각이 희미해진다. 오! 그녀의 천진난만함과 얽매이지 않은 영혼은

그 조그만 친절이 얼마나 나의 마음을 괴롭히는 가를 알지 못한다. 롯테가

자기의 손을 내 손위에 놓고 말에 열중하여 몸을 바짝 갖다대며 그녀의 향

기로운 입김이 내 입술에 닿았을 때 번갯불을 쐬인 것 같이 나는 쓰러지려

고 한다.

그녀는 신성하다. 그녀 앞에서는 모든 욕망이 잠잠해진다. 그녀 곁에 있으

면은 나는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버려 넋이 나간 나의 모든 신경속에서 뒤죽

박죽 되어버리는 것같이 느껴진다. 롯데가 치는 피아노 소리는 천사의 손으

로 울려나오는 듯 그렇게 소박하고 영혼에 찬 선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그녀가 그 악보의 첫소절을 칠 때에 나는 나

의 모든 고통과 혼란과 실없는 생각에서 해방되어 버린다. ]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이 슬픔을 쓴것은 1774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29

년전의 일이다. 윗글을 읽으면서 그 옛날에 괴테가 얼마나 아름다운 글을

쓰는 시인이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괴테는 정말 대단한 시인이다. 그리고

중학생 시절에 읽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읽었다. 내가 중학생이

아닌 고등학생 시절에 이책을 다시 읽었다면 더 큰 느낌을 가졌을 것이며,

내 인생을 더 향기롭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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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기♠ 나는 대중성이 없는 음식은……

나는 대중성이 있는 음식을 주로 먹는다. 대중성이 없는 특별한 음식은

잘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개고기, 오리고기, 추어탕, 등은 이미 많이 보편

화된 음식이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낯설은 음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유별나게 나를 드러내는 일은 서툴기 때문에 음식에

관한 한 먹지 않는 것은 없다. 위의 음식들을 집단에서 회식의 메뉴로 정했

다면 별다르게 표시를 내지 않고 따라가서 함께 먹는다. 다만 내가 먼저 나

서서 개고기나 추어탕을 먹으러 가자고 제의한 적은 한번도 없다. 내 스스

로 그런 음식점을 가본일도 물론 없다.

내 고향은 차령산맥의 줄기인 충청남도 아산시의 내륙 지방이었다. 내가

어려서부터 먹은 음식은 주로 곡류였다. 바다가 멀었기 때문에, 염장을 한

생선은 먹고 자랐으나, 날 생선은 먹지 않았던 관계로 지금도 생선회를 먹

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왜 생선회를 먹지않느냐고 물으면 나는 그저 빙

그레 웃으며 ‘생명외의 외경’이지요 라고 얼버무린다.

문화는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학습을 통하여 익힌

공통의 생활양식이다. 음식도 문화이기 때문에 선호도는 그가 자라면서 익

힌 생활습관 일 수 밖에 없다. 아버지와 나는 자라난 배경이 다르기 때문

에 음식에 대한 선호가 다르다. 아버지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여러해를 사

신 경험 때문에 지금도 생선회를 좋아하신다. 그리고 옛날 육류가 귀하던

시절에 개고기는 중요한 단백질의 공급원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보신탕

도 아주 좋아하신다. 그런데 나는 그 두가지를 모두 싫어하니, 음식 메뉴

에 관한한 아버지와 다를 수 밖에 없다. 이점이 항상 죄송스럽다.

오늘 아침에 출근하면서 큰 결심을 하고 말씀드렸다. “아버지 오늘 저녁

에 퇴근하고 저하고 함께 보신탕 드시러 가시지요” 아버지는 대단히 좋아하

셨다. 우리 집에서 50m거리에 있는 보신탕집인데 나로서는 평생 처음가보

는 집이다. 나같은 사람만 있으면 벌써 망했을 것인데 우리 동네에는 보신

탕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거의 20년 가까이 보신탕 집을 운영하

고 있으니 말이다.

보신탕 두 그릇을 시켰다. 한그릇에 만원씩 2만원! 아버지는 아주 맛있

게 드셨다. 나는 “껍데기는 주지 말고 살코기만 주셔요” 라고 주문하였다.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음식인데 뭐 못먹을 것이 어디 있으랴! 오늘 아버

지 덕분에 몸보신 했다. 앞으로 자주 모시고 먹으러 가야겠다. 그러나 역

시 보신탕은 나에게는 낯설은 음식이다. 아버지는 국물에 밥까지 말

아서 다 잡수셨지만 나는 고기만 간신히 건져먹었다………..

하지만 어떠랴! 아버지가 좋으시면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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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기♠ 메트릭스 2

저녁에 시내에 볼일이 있다고 나간 둘째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내가 전화를 받으며 묻는다.

” 석영이가 매트릭스 2를 같이 보자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시내에 나온김에 영화를 보려고 하는데 같이 볼 사람이 없어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사내아이들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있어

서 아버지를 경쟁자로 생각하니 아버지 보다는 엄마에게 전화를 한것이

다. 내가 대뜸 아내에게 말했다. ” 환영한다고 말하시오. 그리고 아빠도

함께 간다고 전하시요!!!!

세상에!! 자식이 부모에게 영화를 같이 보자고 한다니 이얼마나 영광스러

운 일인가! 녀석이 대학생이 되어 여자 친구가 생기면 부모에게 영화를 같

이보자고 하겠는가? 작년에는 스키장에 가자고 해도 싫다고 하여 내 화를

돋구던 녀석이아닌가! 이게 웬 떡이냐! 고등학교 1학년 아이가 부모에게

영화를 함께 보자고 하다니! 이렇게 해서 셋이서 함께 매트릭스 2를 보게

되었다.

휴머니즘을 가장한 폭력물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의 연속이었다. 열흘 전에 신문에서 미국의 살인사

건이 매트릭스를 보고난 모방범죄였다는 기사를 보았다.

나는 서정성 깊은 영화를 좋아하는데……

닥터 지바고에서 눈밭을 헤메이여 사랑하는 이를 찾는 오마샤라프가 생각

난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자식과 함께 영화를 본것으로 만족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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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기♠ 民草의 인생—-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맹석재는 1924년 지금으로부터 80년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셨다. 식량수탈로 조선에서 나는 쌀은 모두 일본으로 가져가서 우리 민족이 역사상 가장 못 먹고 못살던 시절이었다. 1924년 6월 4일(음력 5월1일)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면 휴대리 329번지 초가집에서 아버지 맹순섭 어머니 하동정씨 사이에서 8남매의 넷째로 출생하였는데, 동네 30여가구 중 거의 모두가 식량을 걱정하는 집이었고, 두세집 정도만 식량 걱정 없이 살아가는 동네였다.

일제치하에서 식량을 수탈당하고 조선인은 대부분 초근목피로 목숨을 이어가는 생활이었다. 당시 생활은 비가오지 않으면 모를 내지도 못하고 하늘만 쳐다보며 정미기도 없어 모든 것을 손으로 해야만 하는 원시적인 생활이었다. 땔감도 산에 가서 나무를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나에게 조부되는 맹순섭은 어려서 홍역을 앓다가 바람이 들어 해소기침으로 몸이 약하신분 이었고 평생 병객이셨다.

아버지는 열 살 때 외숙인 정운씨의 권유로 아산군 온양읍 모종리로 이사하였고, 1934년 음력2월19일 일 손자들을 먹이기 위해 밥을 굶다시피한 할머니 남평 문씨 사망으로 슬픔이 컸다. 어린나이에 할머니가 묻히시는 것을 보기위해 30리 길을 걸어서 따라갔다. 11세 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의 권유로 온양온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녔다. 13세 때 집안이 살기가 어려워 외숙이 사는 함경남도 원산으로 이사를 가는데 당시 보통학교를 마치고 가라는 외숙의 말에 따라 공부를 할 욕심으로 모종리 남아서 고생을 하던 중 14세 때 아버지와 함께 원산으로 가게 되어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8개월치 수업료를 담임선생님이 대납해주셨는데 값지않고 가서 선생님께 혼날까봐 학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원산으로 갔다.

원산의 어머니는 한복바느질을 하셨고,. 원산에서 이모님댁에서 자전거를 배운 후 이모님댁에서 정종, 음료수, 간장 등을 배달하였다. 그러다가 15세 되는 가을에 외숙모님이 강원도 양양으로 이사를 가서 다른 일을 찾다가, 원산의 원산제제소에서 나이를 속이고 일을 했고 처음으로 제대로 봉급을 받는 직장생활을 하였다. 어머니에게 매달 봉급을 드렸으며, 일은 매우 힘들었어도 공부를 할 욕심으로 밤에 야간학교에 다녔는데 몸이 너무 지쳐 밤에 학교에서 잠을 자는 일이 계속되어 그만두었다.

이 때 집을 나간지 4년 만에 형이 병이 들어 돌아왔는데, 간신히 어머니의 병간호로 형의 병이 낳았으나 다음에 집안의 모든 식구들이 장티프스에 걸려 죽다가 살아났다. 엠병이라고 불리는 무서운 병이었다. 17세 때 삼진철공회사 주물부 견습공으로 취업하였다. 이일이 후일 주물기술자로 평생을 살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철공소는 인기 직종이었고 빽이 있어야 들어가는 곳이었다. 2년 후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의해 쇠는 모두 군수공장으로 가져가고 공장에는 쇠가 없어서 공장이 폐쇄되어 실업자가 됨. 그 후 철광석 광산으로 유명한 함경북도 이원과 철산으로 취직을 위해 찾아갔으나 공장은 컷는데 선철은 모두 일본으로 가져가고 쇠가 없어 공장이 문을 닫고 있어 19세 때 다시 함경남도로 내려와 함흥삼공주물회사에서 2년 동안 매달 12원을 어머니에게 붙여드렸다. 어머니가 너무나 좋아하셨다.

1944년 징병 1기생으로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1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음. 주로 육박전, 돌력전, 폭뢰라고 불리 우는 폭탄을 가지고 미군의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훈련, 총검술, 등의 강제 훈련을 받고 22살에 영장이 나와서 일본군에 강제 입대됨. 다시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2차대전에 일본군으로 참전하였다. 일본군에 입대하는 날 집 앞에 커다란 대나무를 세우고 출전군인 무운장구라는 글을 써서 세워줌. 일본육군제153부대 육군보병기관총부대에 편입되었고 나중에 목포근처의 비행장 옆 해변의 부대로 배치되었음. 동남아 전선에 배치되었던 동료들은 대부분 전사하였으나 다행히 국내에 배치되어 목숨을 건졌다. 목포부대는 미군탱크가 상륙하면 방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항복하였고 아직도 해산하지 않고 무장을한채로 한국 민간인의 습격에 대비하고 있는 일본군을 8월 18일 탈출하여 집에 왔다. 나라를 찾은 광복의 기쁨은 일생에 최고의 기쁜 일로 기억하고 있다.

고향인 휴대리에 돌아와 보니 해방을 맞이하여 동네사람들이 농악을 하고 술을 먹고 놀고 있었고 뿌리칠 수 없어 어울렸다. 이때 사고가 생겼다.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는 청년과 격투를 벌이다가 그 청년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죽은 것으로 알고 그 길로 어머님이 사는 원산으로 향했다. 원산에 가서 정착을 하고 여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장사를 하였으며 24세되는 해에 조그만 내 집을 사게됨. 함경남도 원산시 영정150번지 대지 40평, 방2개, 부엌, 판자로 된 울타리, 나뭇감을 두는 헛간도 잇는 집이었음. 함경남도 도청에서 3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집이다. 평생 처음 내집을 사서 너무나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다가 담배를 제조하는 공장을 차렸으나 담배는 지금이나 당시나 개인제조는 불법이었음. 세 사람의 권총든 형사에게 연행되어 1주일동안 감옥생활을 하다가 이모부의 보증으로 풀려났는데 이 날이 해방에 이어 두 번째로 일생에 기쁜 날이며 이 날 다시는 법을 어기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였음. 후에 벌금형을 선고받음

1950년 6월 25일 아침 동사무소에서 남이 북을 침공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원산시내를 빠져나와 시골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매일 남쪽으로 진군하던 인민군이 후퇴하고 유엔군이 북진한다는 소식이 들렸고, 어느 날 동사무소에서 나오라고 하여 가보니 인민군에 자원입대원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하였다. 조국을 위해 충성을 할 기회를 줄것이니 자원입대하라고 하면서 강제로 입대를 시키는 것이었는데 인민군에 입대하면 남쪽에 있는 동생들과 서로 죽이는 싸움을 하게 될것이어서 결국 강제 입대장을 탈출하여 빠져나옴.

산속으로 피난과 도망생활을 계속하던 중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남하하는 국군과 미군이 50년 12월 5일 원산과 흥남에서 배를 태워준다고 하여 원산항에 갔다가 배를 타지 못하고 걸어서 남으로 먼저피난을 온 것이 가족들과 영원히 헤어지는 계기가 되었음. 이렇게 강원도 양양으로 피난을 왔으나 가족들을 다시 데리려 원산을 향해 출발했다가 국군정보원들에게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간신히 풀려나 다시 양양으로 내려 옴 양양에서 국군 HID부대원에게 잡혀 북에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요원으로 근무하게 되어 결국 육군정보원으로 6.25에 참전하게 되었다. 6.25전쟁 중 정보 수집을 위해 민간인 복장으로 북한군 점령지역에 투입되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부대장에게 사정하여 제대특명을 받고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에 돌아와 농사를 지음, 동생인 문재와 범재가 제2국민병에 끌려갔기 때문에 농사일에 서툰사람으로 고생을 하였음. 동생들은 제2국민병에서 거의 죽은 몸으로 돌아옴. 회복 후 문재, 범재동생은 다시 국군에 입대하여 6.25에 참전하였다. 농사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으로 너무나 일이 힘들었다. 그리고 이때 하루걸이라는 병에 걸려 죽다가 살아났다. 신창의 누님집까지 새끼틀을 등에 지고 걸어가서 일을 하기도 하는 등 열심히 일을 했으나 점쟁이의 말대로 돈을 모두 날렸다.

1955년 공재성의 2녀 공정숙과 결혼 후 쌀 한가마 값을 가지고 무작정 서울로 와서 경성주물회사에 취직을 하였음. 거처할 곳이 없어 서로 따로 살음. 경성주물에서 한달 봉급을 받고 헤어져 살던 아내와 서울 이태원에 방한 칸을 세들어 살림을 차린 이날의 행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통장이 자꾸 찾아와 노무대에 가야한다고 하여 또다시 군대에 갈 수는 없어 피신을 위해 다시 고향에 내려왔다. 이때 내려오지 않을 수 있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다. 고향에 내려와 이웃 할머니가 사는 집을 같이 쓰기로 하고 천안 수도주물회사에 취직하였음. 당시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직원100명이 넘는 큰 회사였다. 공장 일을 열심히 했고, 내 땅을 사기 시작했으며 아내도 생전 해보지 않던 농사일을 열심히 했음. 밭에 김도 매고, 도리깨질, 보리를 투드리는 일 등 힘겨웠다. 그런데 동사무소에서 또 군에 가라는 소집영장을 보낸다고 하여 군대라면 신물이 나게 고생을 한터이라 집을 떠나 천안회사기숙사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1954년 4월 14일 11시 경에 아버님이 운명하셨다. 안사람과 제수씨가 임종을 지켰다. 못자리 물이 마를 텐데 왜 여기 있느냐 나는 죽지 않는다. 빨리 나가 일보라고 말씀하셨는데 돌아가셨다.

1955년 3월 17일 장남 기호를 낳았다.

회사는 부지런히 다녔다. 한달에 70일을 일 한적도 있다. 수도주물회사를 10년 이상 다니고 기술을 인정받아 공장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던 중 1967년 회사가 무리한 투자로 망하게 되어 퇴사하였음. 3년 동안, 해보지 않은 농사 일을 하느라 너무 고생을 많이 하였음.

그러던 중 1970년 1월 18일 당시 45세의 나이로 경기도 수원으로 이사를 와서 동신지업사를 창업하였다.. 모든 식구가 열심히 살았고 장남 맹기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을 포기하였으며, 집에서 부모와 함께 장사를 하였다. 주호는 천안의 천안여중을 다니기 위해 천안에 남겨놓고 왔고, 막내 수호는 세류초등학교 5학년으로 전학시키고 자식들 중에 처음으로 우유를 먹이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자식 중에 수호가 제일 키가 큰 것은 아마도 그때 먹인 서울우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평생의 병력을 잠깐 소개하면

5살 때 홍역을 앓고 옴에 걸림

15살에 장티프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김

46살에 충수염의 치료시기를 놓쳐 복막염으로 발전하여 시민외과에서 수술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김

55세에 이화대학교 병원에서 전립선 비대로 수술을 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함

1993년 건물계단에서 낙상하여 갈비3대 부러지고 척추가 골절되어 성빈센트 병원에서 수술하였음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다옴

1993년 사고 후유증으로 비장에 염증이 생겨 성빈센트 병원 전정수 교수의 집도로 비장을제거하는 수술을 받음 .현재 물론 비장이 없음.

1996년 오토바이사고로 코뼈 골절되고 하반부에 찰과상으로 입원함

2002년 오토바이를 타고가던 중 전방에서 나오는 차량과 충돌하여 손을 다쳐 2개월동안 치료함.

우여곡절 끝에 장남 기호는 1971년에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고, 주호는 수원여고에 입학하였음.

50세 때부터 60까지밖에 살 수 없는 몸이라고 생각했으나, 현재 80세로 고향 마을에 생존한 남자로서는 최고령이며 집안전체에서도 작년에 작고한 종형 맹철재씨의 83세에 이어 수명 2위를 기록하고 있으나, 요즈음 들어 건강이 많이 약해 지셨고 스스로도 몸을 돌보지 않는 등 건강에 태만하고 있으며 특히 잦은 음주로 매우 걱정된다. 그런 연유로 나는 나의 아버지 맹석재에게 술을 따라주는 사람을 싫어한다.

아버지는 평생을 나를 위해 살아오셨다.

오늘 아침 안방문을 열고 출근하겠다고 인사를 드렸더니

자식이 출근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던지 ” 너 참 예쁘구나” 라고 말씀하셨다……

너무 고생을 많이 한 분이라 부디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한다. 한 90세까지만 사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요즈음 아버지께서 스스로 당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셔서 걱정이 된다. 거의 강권하다시피하여 서호노인복지회관의 수영강습에 등록시켜드렸는데 의외로 4개월째 잘 나가신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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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기♠ 평화

<고요한 평화>

토요일에 자원봉사 워크샵이 늦게까지 이어졌다.

봉사는 조용히 혼자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모여서 토론회를 갖자고 한다.

그리고 무얼 자꾸 먹자고 하고,

금방 밥 먹었는데 또 간식 주고,

먹는데 정말 질렸다.

워크샵에 웬 축사하는 내빈들은 그렇게 많은지……웃긴다.

집에 늦게 오고, 그리고

헬스장에 가서 런닝머신 5km를 달렸다.

30분 밖에 운동할 시간이 없어,

남자 30대 코스에 자동설정을 해놓고 달리다가

성에 차지 않아 20대 코스로 바꾸어 달렸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운동을 끝내고 집에 오니

늙으신 어머니가 반긴다.

토요일 오후

집안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아내는 연락도 없이 늦는다.

특별하게 할 일도 없고 ……

부산일요화가회홈을 보았다. 재미있늘 글을 읽었다.

샤워를 마치고, 누웠다.

평화롭다.

고요하다.

모든 생각을 비웠다.

허브차 한 잔 마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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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기♠ 나는 쓸데없이 말이 많다.

외할아버지는 살아생전에 나와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친손자에 비하면 나는 찬밥이었는데. 외손자 중에서는 내가 비교적 사랑을 많이 받은 편이었다.

그 분은 나에게 여러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중국의 여러가지 고사와 삼국지 이야기,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함,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등의 사육신 이야기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무덤과 사육신의 무덤은 보고 싶다고 하여

직접 모시고 간적이 있다. 국립묘지와 노량진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여러가지 시조를 읖조리셨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시조 중에는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것도 있었고

사설시조같은 것도 있었다.

외조부는 90세 까지 사셨는데 할머니가 60에 돌아가셔서 30년을 아들집에서 혼자 사셨다. 내가 외갓집에 가면 함께 자자고 약조를 받아내시곤 하셨다. 외종 형제들과 함께 잘까봐 걱정하셨다. 너무나 적적하셨던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외갓집에 갔더니 외조부 방에 수필집이 한 권 있었다.겨울철 따뜻한 양지쪽의 툇마루에 앉아 한나절에 읽었다.

“눈속에서 꽃피는 나무”라는 책이었는데 유달영씨가 쓴 수필집이었다.

그 때는 유달영씨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 책속에 나오는 글귀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말은 짧은 것이 좋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더욱 좋다.

글도 역시 그러하다.

말을 많이 하고 후회하지 않는 적이 별로 없으며,

글을 많이쓰고 후회하지 않는 일이 벌로 없다.

말이 없이도 통할 수 있고,

글이 없이도 읽을 수 있는 것이 참이다.”

나는 쓸데없이 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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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기♠ 의자

[의자가 너무 비싸다고 사지 않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

아산아 !

아빠다

의자는 샀니?

정말 모르겠니?

인간에게 의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빠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네가 어릴 때부터 편안한 의자에 앉히기 위해

아빠가 의자를 제일 좋은것으로 사러 다닌 것을 알텐데……

네가 앉을 의자 하나를 사기 위해

30가지 종류의 의자에 직접 앉아 보았다.

네가 그 곳에서 이사 갈 때 마다 의자를 버리는 경우가 생겨도 좋다.

만일 아직도 의자를 사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사라!

네가 앉아 보고 허리와 등받이가 아주 편한것으로 말이다.

가능하면 아빠가 너에게 사주었던 “하이팩의자”

무엇인지 알지?

등받이를 나무의 탄력으로 받쳐주는 의자 말이다.

당장사라!

의자가 나쁘면 쉽게 피곤하고, 나중에 디스크에 걸리고

그러면 억만금을 주고도 못고친다

네 할머니 허리아프지! 너의 두 종조부는 허리수술을 했지!

기억하느냐? 아빠가 아침에 눈을 뜨면 곧 일어나지 않고 이불위에서

요가 하는 것을…….

아빠는 20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마다 요가를 한다.

아빠가 너에게 요가를 가르친 것은 너의 평생 허리 건강을 위해서 였다.

허리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란다.

빨리 의자사고, 평생 요가를 게을리하지 말아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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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기♠ 부산 스케치 여행-종근형을 만나다.

[종근 형을 만나다!]

아내와 함께 부산에서 열리는 전국일요화가 스케치 대회에 참석하였다.

나의 평소 주말 스케치에 아내는 교회에 빠질 수 없어서 함께 가지 않지만,

멀리 가는 스케치 여행은 놀이 삼아 함께 동행해주는데 고마울 따름이다.

숙소인 부산의 글로리콘도호텔에 도착하니 로비에 종근 형이 나와있었다.

1년 전에도 구례의 산수유 축제에서 종근형을 바람처럼 만났었다.

종근형은 고개 숙인 후리후리한 키를 구석에 구부려 세우고 있었다.

주인이면서도 그는 마치 객처럼 수줍고 겸손해 했다.

그리고 내가 반가운 만큼 그도 반가워 했다.

우리는 별로 말하지 않았다.

맥주를 몇 잔 서로 권했고 따뜻하게 손을 잡기도 했으며

다음 날 다시 만나 커피를 한잔 같이 마셨다.

말은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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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기♠ 나의 특별한 제자……

나의 특별한 제자 오연숙!!

시골의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의 일이니 20년도 더 넘은 일이다.

오연숙, 그녀는 정말 특별한 제자이다.

그녀가 고등학교 2학년 때(18살 쯤 되었을까?) 담임을 맡았고, 고3도 역시 내가 맡았다.

내가 27살 때이니 젊은 나이었고, 학생들을 정말 열심히 가르쳤다. 오연숙은 전교 1등이었고, 친구들의 신망도 두터웠다. 전 과목에 걸쳐 골고루 공부를 잘했고, 항상 표정이 밝았다. 몸에는 건강미가 넘쳐흘렀다. 지금도 기억한다. 교내체육대회 때 우레탄이 아닌 흙으로 된 운동장에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농구를 하던 모습을……억척같이 공을 빼앗아 골인시키던 장면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내 머리에 남아있다.

물론 예의도 바르고 행동이 반듯한 학생이었다.

송제선, 이정희, 이런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었는데 그 들도 모두 훌륭한 학생들이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가지 않으려는 것을 내가 억지로 설득하여 약학대학에 진학시겼는데 공부를 열심히 하여 여러 번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다녔다. 지금은 수원시 연무동에서 약국을 하고 있는데 친정부모와 시부모를 잘 모시고 여러 동생들을 거두고 있다. 참으로 대견스러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성격이 멋있었다. 항상 밝은 얼굴이었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굽히지 않았다. 선생님에게도 굴하지 않고 덤비기도 하였다. 물론 나에게 덤빈 것은 아니고, 역사 선생님이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너무 억울해서 신체마비증세까지 와서 숙직실에 뉘고, 여학생인지라 내가 손을 대지 못하고 친구들로 하여금 몸을 주무르게 하였다. 몸이 점점 굳어가서 너무나 놀랬다. 급히 의사를 왕진시켰는데 놀랍게도 의사는 “히스테리” 라고 하였다. 쉽게 말하면 제 성질을 못 이겨 넘어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성질이 고약하다고 말 할 수도 있으나, 나는 지금까지 그 날의 기억을 아주 멋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 그에게 잔다크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대쪽 같은 성미가 잔다크나 유관순을 연상시킨 것이다. 대학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인가? 빨간색 투피스 한 벌을 사주었는데 입혀놓고 보니 날렵한 모습이 마치 건강한 야생마를 보는 듯 아름다웠다. 그 모습도 분명히 기억한다.

4년전인가? 내가 아프다고 전화를 했더니 즉시 신랑과 함께 학교로 달려왔다. 교무실에서 나에게 약을 먹이고 신랑이 내 머리통에 정성스럽게 침을 놓았는데 너무 감사하여 눈물이 났다……

지금 아마도 40살쯤 되었을 것이다.

항상 나의 건강을 걱정하고, 우리 집 식구들의 건강을 모두 챙기며 보약도 여러 번 받아먹었다. 매년 스승의 날에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식사대접을 하는데, 얻어먹는 것이 한 두 번도 아니고 염치가 없다. 올해도 어김없이 신랑이 전화를 하여, 돌아오는 토요일에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물론 우리 부부와 연숙이 부부 이렇게 4명이 항상 만난다. 어떤 때는 가뭄에 콩나 듯 내가 음식값을 내보기도 하지만 음식값보다 훨씬 큰 선물을 또 주니 내가 밥값을 낸다는 명분도 없다. 부담스럽기도 하여, 한 동안은 연락을 끊고 만나지 않은 적도 있었는데 같은 수원시에 살면서 원수진 것도 아닌데 벽을 쌓고 살수도 없고, 갑자기 내가 아프면 밤늦게 전화를 걸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약을 갖고 달려오고……또 한참을 안보면 그들 부부를 보고싶기도 하여 결국 서로 연락을 하게된다. 오연숙 그는 정말 특별한 제자이다.

그녀가 더욱 행복하고 건강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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