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1987년 6월 29일 이른바 6.29선언이 발표되었다.
내용의 골자는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는 방법 대신 국민직선제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사실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정권은 7년 내내 정권의 정당성 시비에 시달렸다. 그리고 전두환정권 말 대통령국민직선제 개헌 요구가 한창이던 1987년 4월에 4.13호헌조치라는 것을 발표하여 헌법을 개정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당시 고등학교에 근무하던 필자도 호헌의 정당성에 대하여 주민을 계도하라는 공문이 있었지만 실제로 주민을 계도한 사람도 없었고, 하려고 마음먹은 교사도 없었다. 하여튼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는 계속되었고, 6월 9일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이한열군 사망이 있었다.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이한열 군은 호헌철폐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 했다가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다음날인 6월 10일 여당은 노태우를 대통령후보로 선출했다. 7년 임기의 대통령을 다시 체육관에서 뽑겠다는 것이다. 7년이면 4년짜리 대통령을 두 번하겠다는 것이다. 박대통령 시절에는 4년이었으니까! 전두환은 7년을 했다.
바로 이날(6월10일) 시작된 6월 민주항쟁에는 전국에서 연인원 500여 만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혼란 정국을 수습해야 했던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 후보의 이름으로 ‘6·29민주화선언’이란 승부수를 던졌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을 보장한 대통령 선거법 개정을 내걸었다.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한 것이다.
6월28일 오후 6시쯤
학교에서 퇴근하여 버스에서 내린 나는 수원역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보았다. 6월 내내 수원역에서는 시위가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의 시위 규모는 대단했고, 나는 그 현장을 보고, 이미 이 정권은 정당성을 잃었으며 민의에 굴복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현장을 보고 있던 나는 집에 가서 아들을 데리고 거리로 나섰다. 만 3세였던 아산이를 목에 태우고 시위대를 따라갔다. 가는 길에 주인수건축사무소 소장을 만났다. 주소장은 내가 아끼는 동네의 후학이다. 나 보다 한 살어린 주소장은 어린시절부터 옆집에 살면서 우정을 키운 사이다. (지금도 만나면 나에게 꼭 형님 형님하면서 따른다. 나도 주소장님이라고 부른다.) 아니 형님 어디가십니까? 응, 이 정권은 이미 기울었어, 민주화 역사의 현장을 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가네! 주소장은 어린아이를 목에 태우고 최루탄 냄새가 자욱한 도로를 따라가는 나를 어이없어 했다.
주소장과 헤어지고 나서 수원소방서를 지날 즈음 경찰병력이 최루탄을 쏘면서 시위대를 덥쳤다. 나는 아산이를 감싸안고 잽싸게 아무 집에나 들어갔다. 마침 대문이 열려있는 가정집이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 집에서 한참을 지난 다음에 밖을 살펴보니 추척하던 경찰이 없어진 것 같아서 동네 골목길로 돌아서 집으로 걸어왔다.
6월10일을 민주화항쟁기념일로 정했다 한다.
일제하 3.1 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학생들이 벌였던 6.10만세운동을 이어받은 것이라면 모르되, 1987년 6월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면 나는 이것에 동의할 수 없다.
박정희 독재는 무서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박정희대통령 시대에 교육받은 내가 어떻게 자유의식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초, 중학교를 거치면서 막연하게나마 자유와 평등이 소중한 가치이며, 언론의 자유가 중요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우리나라 헌법의 중요한 두 축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유물론이 어떠한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물질이 아닌 정신이라는 생각을 분명히 갖게되었다.
박정희대통령이 유신헌법 개정안을 발표하던 날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그날 나는 서울역에 있었다. 석간신문을 사서 그 자리에서 개정헙법안의 모든 내용을 읽었다. 유신헌법은 매우 잘못된 법이라는 판단을 했다. 서울역 주변의 사람들이 개정헌법안이 발표된날 신문을 보지 않고, 다른 날과 변함없이 평안히 길을 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하긴 지금도 전철 안에서 조간신문을 읽을 아침 출근시간에 너나 할것없이 스포츠 신문을 들고있는 사람들을 보면 공연히 화가난다.
나는 어려서부터 정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나보다. 고등학교 시절 교련교육을 받았는데, 수업이 끝날 때 멸공구호를 주먹을 들고 합창한다.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 4가지 구호 중에서 마지막 이룩하자 유신과업은 입밖으로 소리내지 않았다. 군에 입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1학년 때 동아일보 광고탄압사태가 일어났다. 동아일보 광고란이 공란으로 발간되었다. 나는 자발적으로 모금운동을 하러 다녔다. 기업은 무명으로 광고내용 없이 광고란에 네모칸만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때 위험을 무릅쓰고 실명광고을 내는 기업이 있었다. 부광약품이다. 나는 지금도 그 회사 사장이 누군지 모르지만 용기있는 기업인이다. 나는 지금도 부광약품에서 생산하는 물건을 산다. 블랜닥스 치약으로 유명하다.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해서는 개인적으로 자유에 대한 갈망이 포화상태에 있었다. 당시는 박정희 독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때였다. 유신헌법으로 집권연장하더니 그 유신헌법으로 두번째 체육관선거를 통해 당선되었을 때였다. 그 때 새벽에 혼자 대학에 가서 벽에 글을 붙였는데 내용은 대체로 국민에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가 라는 것이었고, 유신정권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있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내가 부르는대로 당시 여고에 다니던 여동생이 썼다. 정말 나는 영원한 자유인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음성적인 반정부 학생운동이 어떠한 벌을 받았는지 생각해보면 나의 행동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나 혼자 한 일이었으며 이것은 인간의 천부인권인 자유에의 열망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나에게 가르쳐 준것은 바로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시대의 교육이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생각해보니 반공교육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자유와 민주주의의, 인권의 가치를 교육하게되었던것 같다.
장황하게 나열하다 보니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말하는것 같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수 있겠다. 나는 그런 뜻이 아니고 그저 한 젊은이로서, 민초로서, 가만히 침묵할 수는 없었다는 의미다. 무슨 일을 했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박정희 독재는 정말 무서웠다.
그 때는 감히 시위할 생각을 못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끌려가는 세상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는 박정희독재에 비하면 구우일모, 창해일속, 조족지혈이었다. 박정희독재에 항거하려면 목숨을 걸어야했다. 박정희독재에 맞서서 싸운 사람들이 진짜 민주화 인사들이라고 감히 나는 단언한다. 누구일까? 김영삼, 김대중, 함석헌, 이런 정도의 사람들이다.(이 사람들의 노선에 대하여 나 개인적으로 다 동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중에 내 생각과 다른 사람도 있다.) 나머지는 민주화 투쟁인사 대열에 넣고 싶지 않다. 전두환 군사정권하에서는 개나 소나 다 데모하고 시위했다.
6.10 민주항쟁기념일이라고?
볼썽사납다.
일하고 나서 했다고 나대거라!
한일도 없으면서 나서기는……
민주화투쟁을 했다고 말하려면 적어도 자유와 민주주의에 목숨을 걸었어야지,
어린 아들 목마 태우고 시위대에 참가했던 맹기호는 감히 민주화투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었던 사람이다.
박정희독재에는 무서워서 말 한마디 못했으면서 박정희 죽고나니까 갑자기 민주투사가 이곳 저곳에서 막 나오는데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나는 박정희의 경제개발 공을 인정한다. 오죽 백성의 배고품을 해결하고 싶었으면 “잘살아보세” 노래를 대통령이 직접 작사 작곡 했을까! 우리 역사상 어느 지도자가 백성이 굶는것을 이토록 진정으로 가슴아파한 사람이 있었는가? 새마을노래도 직접 작사작곡했는데 그 가사를 생각하면 기가막히다. 새벽종이 울리는 소리들 듣고 새로운 마음으로 아름답게 우리마을을 가꾸자는 것이다.
그러나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억눌린 자유가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는 내가 피부로 절절하게 느꼈다. 박정희는 공이 큰 만큼 과실도 크다. 그 시대의 논리로 봐도 국민이 감내하기에는 버거운 사람이었다.
오늘 내가 조금 흥분한 것 같다.
그러나 1987년 6월에 투쟁했다는 사람들,
특히 386세대 어쩌구 하며 으시대는 사람들은 조심하고 겸손할지어다.
노찾사 노래를 들으면 코웃음이 난다. 그런 노래부른 시절은 저항도 아니었다. 놀이였지!
그대들은 별로 한일 없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이런 말 들어보기나했는가?
(1980년 봄에 내가 직접 함석헌옹의 집을 찾아가서 1:1로 정치담화를 나눈적이 있다. 당시 내나이 20대 중반의 젊은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