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은 혜경궁 홍씨의 변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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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서 43년을 살아온 사람으로써(me),  사도세자의 능이 있고 정조가 천도까지 생각하며 지었던 수원화성 사람으로써 당시 상황을 잘 알필요가 있다.  생각되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우리가 한중록하면 혜경궁홍씨의 슬픈 인생 역정을 여성의 섬세한 필체로 담은 수준높은 궁중문학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않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알게되었다.

 

그동안 정조를 노론이 암살하려 했다는 내용을 많이 들었고, 정조가 신하들에게 은밀한 서찰을 보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정조의 어머니와 어머니 집안이 사도세자 죽임에 관여하고 심지어 정조의 즉위에 반대하고 정조가 왕이 된 후에 자객이 궁에 몰래 들어와 정조를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물론 실록에 있다)을 알고 정말 놀랐다. 이 모두가 권력 때문이었다. 한중록은 저자가 회갑을 맞던 해인 1795년(정조 19)에 친정 조카 홍수영(洪守榮)의 소청으로 이 글을 쓴다 하였고, 그 후 67세, 68세, 71세 등 네 번에 걸쳐 쓴 네 편의 글이 있다. 이 중 회갑 때 쓴 첫째 것이 비교적 한가로운 심정에서 붓을 든 것이고, 나머지 3편은 모두 아들인 정조가 승하한 후 어린 왕 순조에게 보이기 위하여 쓴 것으로, 다분히 정치적 목적이 농후한 작품이라 하겠다. 한중록에 있는 많은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의 내용과 다르다. 이는 자신의 죄를 여러가지 이유로 덮으려 했던 노정객 혜경궁 홍씨의 변명록이다.  

《한중록(閑中錄)은 한가할 한자를 썼다. 많은 사람들은 한중록이 원한에 사무쳐 쓴 책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한가한 날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한중록을 쓸 당시에는 어린 세자빈 이 아니고 임금의 어머니였다.  혜경궁은 80살까지 살고간 노련한 노정객이었다. 그리고 한중록의 여러가지 내용은 조선왕조실록과는 너무나 다른 부분이 많다. 아니 반대로 쓰여져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반대했다는 기록은 없다.  방조한 것이다.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협조한 사람들은 영조, 세자빈의 장인인 홍봉한 등이다. 영조는 탕평책을 썼지만 자신을 왕위에 올리는데 공을 세운 노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아니 노론 편이었고, 홍봉한과 혜경궁홍씨는 노론이었다.

사도세자가 왜 소론편에 섰는지 그 단초가 명확하지 않다. 하여튼 사도세자를 기른 유모가 소론편이었다고 하는데 충분하지 않다. 세자가 15세부터 대리청정을 하는데 영조가 소론을 탄압하는 옥사를 일으킨다. 이 때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니 세자가 여기에 반대하면서 소론편이라고 알려진다. 그리하여 영조가 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하고 세자는 목을 매게 해달라고 간청하는데 이 때 세자의 장인 홍봉한이 뒤주를 가져다 놓는다. 영조는 뒤주를 보고 세자를 집어넣으라 명령한다. 뒤주뒤에 작은 구멍이 있어 처음에는 물과 음식을 넣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구멍마져 노론세력들이 영조에게 밀고하여 영조가 노하며 구멍을 맊아 버린다. 결론을 말하면 사도세자는 당파싸움에 희생된것이다. 파당이 사도세자를 죽인것이다.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과 세자빈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왕이 되는 것보다 노론과 풍산홍씨 집안의 영화가 우선이었다.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이고 나서 사도세자의 아들이 세손으로 결정되고 후일 영조가 병환이 깊었을 때 영조의 아들 즉 정조가 즉위하면 자신들이 죽임을 당할 것을 걱정해 정조의 즉위를 방해하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운다. 여기에 다행이 임금 영조가 동조하지 않았다. 아들은 죽였지만 손자를 죽일수는 없었고 영민한 손자는 영조가 죽기전까지 반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또 노론은 정조가 왕이 된 후에도 3번이나 정조를 암살하려하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풍산홍씨 집안의 평양감사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 대궐에 자객을 존현각 지붕위로 침투시켜 정조를 살해하려 했으나 호위 무사에게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절치부심으로 한을 삭혀온 정조는 왕이 되자 외가 즉 혜경궁홍씨 집안을 주살낸것을 보면 알수 있다.  장인 홍봉한의 동생이며 좌의정인 홍인환에게 정조의 즉위를 방해한 죄목으로 사약을 내린다. 홍인한과 결탁하여 세손 정조를 제거하려했던 자신의 고모인 화완옹주를 귀양보내고 서녀로 강등시켰다. 영조가 60이 넘은 나이에 동침하여 아기를 가진 숙의문씨의 배가 불러왔을 때 노론은 숙의문씨와 결탁했고 세손은 궁지에 몰렸었다. 다행히 숙의문씨가 딸을 낳은 바람에 일은 실패했다. 노론과 노론의 핵심 홍씨 집안은 멀쩡한 세손을 제거할 계획을 끊임 없이 세웠던 것이다. 역시 숙의 문씨도 작호를 박탈해 사저로 내쫒았다. 할아버지 영조의 후궁이었기에 목숨만은 살려주고 천지를 모르고 까불었던 문씨의 오라비 문성국은 목을 자르고 어미는 제주도로 보내 여종으로 삼았다. 훗날 대신들이 끊임없이 주청하여 숙의문씨에게도 사약을 내린다. 노론이면서 조선 제일의 명문가였던 풍산홍씨 가문이 그 가문의 외손자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끊없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죽임을 당하였다는 사실은 혜경궁의 친정이 사도세자의 죽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외할아버지 홍봉한만은 죽임을 면하였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면 어머니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정조의 딜레마였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왜 아들을 죽였는가? 이것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사실 사도세자는 효자였고, 글도 뛰어났으며 할아버지 효종처럼 무예를 즐기는 호탕한 사내였다. 아무리 당파싸움이 치열하다고 하지만 당파를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썼다는 영조가 왜 당파때문에 아들을 죽였는가? 영조의 성격이 괴팍하기는 했다. 재위 53년 동안 끄덕하면 양위하겠다고 나섰다. 양위하겠다고 단식을 하기도 했으니….그러다가 세자와 신하들이 엎드려 이마를  돌에 찍고 피를 철철흘리면 못이기는척 거두어들였다. 사도세자가 5살 때 왕위를 내놓겠다고 생떼를 쓰기도 했으니…… 1739년 1월 영조는 갑자기 다섯살짜리 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비망기를 내렸고, 1740년 5월 돌아간 숙종의 영정 앞 마당에 앉아 비를 맞으며 흙탕물을 뒤집어 쓰고 눈물을  쏟으며 여섯살의 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83살까지 살았고 31살에 왕이 되었으며 52년간이나 왕위에 있던 그는 백성을 생각하는 인정많은 왕이었지만 성격은 정말 괴팍한 왕이었다. 왕이 그만두겠다고 나서면 세자와 신하는 눈물로 용서를 빌며 그저 죽여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도리밖에 없지않은가! 영조가 여러번에 걸쳐 대리청정이나 양위소동을 벌인것은(결국 죽어서 양위했는데도 불구하고) 경종을 독살했다는 콤풀렉스에서 벗어나려했던 것이다. 영조자신은 결코 왕위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했다. 그것으로 경종 독살설을 지우려 했던 것이다.

 

각설하고

장희빈을 죽음으로 몰고간 노론에게 장희빈의 아들 경종의 즉위는 큰 부담이었다. 노론은 세자가 가슴속에 증오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희빈을 지지했던 소론과 남인이 즉위한 세자를 부추긴다면 조정에 피바람이 불것은 불문가지였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했으나 노론에게는 다행으로 경종은 심신이 약했다. 어린 나이에 목도한 생모의 비참한 죽음은 그의 심신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세자 시절 경종은 아버지와 노론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 것으로 처세했다. 노론은 경종이 몸이 약하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왕의 동생 연잉군(훗날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하는 대책을 내놓았다. 경종이 즉위한지 1년만에 경종의 나이 33세의 청춘이니 얼마든지 생산이 가능한 나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노론은 노론편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해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른바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은 그 자체가 역모였다. 그 상소도 반대당인 소론이 퇴근하고 난 저녁시간에 올렸다. 노론의 반격에 심약한 경종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을 것을 윤허하였다.

  

영조는 두가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어머니가 천한 출신이라는 것과 경종을 독살했다는 독살설에 대한 콤플렉스였다. 실제로 영조는 의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종이 임종직전에 게장과 감을 먹였다. 경종은 그것을 먹고 그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는 궁녀의 수발을 드는 무수리였다. 그런 최씨가 노론의 지지를 받게 된것은 아주 사소한 이유 즉 최씨가 서인가의 여인인 인현왕후 궁 소속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또 장희빈은 새로이 숙종의 총애를 받게된 최씨를 핍박하였고 이 때문에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는 자연스럽게 노론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노론이 자신들의 권력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것을 밀어부쳤으니 영조는 노론에게 신세를 진것이다.  조선의 종법과 상속은 형제상속이 아니었다. 종손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양자를 들여 후사를 잇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야 종통의 제례를 올릴수 있는 것이었다. 이 경우 종통은 종손의 동생이 아닌 새로 들인 양자에 있었다. 노론은 이것을 무시하고 노론과 사이가 좋은 경종의 여섯살 아래 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밀고, 임금을 시켜주겠다는 노론의 밀사  서덕수와 김복택을 연잉군에게 보냈으며 연잉군은 이 제의를 뿌리치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에 소론이 눈물을 흘리며 반발했고 후일 연잉군에게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을 주청한 노론의 4영수를 탄핵하였다. 왕세제책봉과 대리청정과정에서 경종을 협박했다는 이유로 노론의 우두머리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은 사형을 당했다. 이것이 임인년에 발생했다고 하여 임인옥사라고 한다. 임인옥사로 영조는 노론에게 갚기 어려운 발목을 잡히게된다. 그래서 영조는 탕평책이라고는 하지만 노론을 중시하는 탕평책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론을 탄압하고 숙청하고 사형시키는 과정에서 소론을 옹호하고 나선 사도세자와 갈등을 빚었다. 이것이 아들을 죽이게 된 연유이다. 아! 비운이 사도세자……권력이 뭐길래 영조는 자식을 죽이고 혜경궁은 남편을 죽이는가! 홍봉한은 사위를 죽이는가! 또 홍봉한을 필두로 하는 홍봉한은 외손자의 왕위 등극을 방해하고 외손자가 왕이 된 뒤에도 3번이나 정조를 죽일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노론이 승부수를 띄운 유명한 사건이 나경언의 고변이라는 것이 있다. 

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홍계희, 김상로, 윤급 등의 노론 중진은 노론 윤급의 종으로 알려진 나경언을 내세워 15세부터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사도세자를 역모로 모함하였다. 

나경언이 고변하던 영조38년(1762년 5월22일) 영조실록을 살펴보면

나경언이 글을 올려 사도세자가 영조를 독살할 모의를 한다고 형조참의 이해중이 영의정 홍봉한에게 달려가 고하고 임금이 놀라 이해중의 입시를 명하고 영조가 글을 읽었다. 나경원의 고변서는 영조와 홍봉한 홍계희만 읽고 그자리에서 불태워버렸다. 여기서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장인이고 이해중은 혜경궁 홍씨의 외삼촌이다. 그런데 양반도 아닌 일개 중인 서민의 고변이 있을 때 이해중과 홍봉한의 행동에 강한 의구심이 간다. 세자에 대한 고변은 진위파악이 최우선인데도 불구하고 형조참의 이해중은 직속상관인 형조참판이나 형조판서에게 보고하지 않고 매형인 영의정 홍봉한을 먼저찾았다. 홍봉한은 즉시 영종에게 보고했다 분명히 사전에 어떤 교감이 있었던 것이다. 결정적인 의구심을 들게하는것은 이 때는 세자가 대리청정한지 1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연히 세자에게 먼저 보고하는것이 순서였다. 하지만 이들은 세자를 제쳐놓고 직접 영조에게 보고했다. 결국 사도세자를 위험에 빠트린것은 홍봉한과 이해중이었다.

영조의 행동도 이상했다. 영조가 나경원을 친국할 때 나경원은 아주 구체적인 세자의 잘못을 적은 고변서를 옷솔기에서 다시 내놓았다. 내용은 세자가 영조를 독살하려한다는 것이었는데

이 때 친국장에 들어오는 나경원의 몸을 수색하지도 않은 죄를 물어야한다고 의금부도사 금오랑의 처벌을 주장한 판의금 한익모를 영조는 처벌을 명하였다.  당연한 지적이었는데도 영조는 이상하게 한익모를 처벌하였다. 

한익모의 말대로 이해중과 홍봉한은 기초적인 몸수색도 없이 나경언을 친국장에 들여왔다. 나경언이 칼을 품고 들어왔을 수도 있는 순간이었는데도 영조의 행동은 이상했다.  판의금부사 한익모 등이 나경언이 흉악한 말을 지어내어 임금을 속이고 세자를 핍박하게 만들었으니 엄하게 다스리라고 간하자 한익모를 파직시켰고 사서 임성이 이런 흉악한 말을 일개 중인의 스스로 한것이 아니고 배후가 있을 것이니 배후를 조사하자는 사서 임성의 요청에도 영조는 화를 벌컥 냈다. 대사간 이ㅣ심원이 한익모를 두둔하자 그도 파직시켰다.  영조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보다는 나경언의 고변을 사실로 받다들이는데 급급하였다. 고변의 핵심은 사도세자가 정변을 일으키려한다는 것이었다. 대신도 양반도 아닌 일개 남의 집 청지기 나경언이 세자를 상대로 논박할 수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영조는 애써 무시했다. 남의집 청지기기 세자를 상대로 싸움을 걸 정도라면 상당한 배후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영조는 무시한 것이다. 배후의 불순한 의도는 의심하지 않고 오직 세자의 변란만 의심했다.  

 

혜경궁 홍씨가 남편이 뒤주에 들어가던 운명의 그날 영조38년 윤5월13일 한중록에 실린 기록을 보자

영조께서 사도세자를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더라 사도세자는 피하지않고 내가 학질을 앓고 있으니 세손(정조)의 휘항(방한모)를 가져오라 하시더라. 내가 그 방한모는 작으니 당신 방한모를 쓰시라고 하여 가져다 드렸더니 뜻밖에 하시는 말씀이 자네가 참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세손 방한모를 내게 안씌우려는 그 심술을 내가 알겠네 하셨다. 한중록의 이 기술에서 알수 있는 것은 사도세자와 혜경궁은 영조의 부름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뜻한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자를 부르자 혜경궁은 세손에게가서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지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말했다. 이는 혜경궁이 사도세자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세자가 세손의 휘황을 요청한것은 그가 정신병자여서가 아니라 세손이 휘황을 써서 아버지에게 정신병과 학질을 앓는 중환자로 보이려고 했던 것인데 혜경궁은 그것마저 가로맊은 것이다. 세자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간 나경언 사건을 확대한 인물이 바로 혜경궁의 친정아버지 영의정 홍봉한과 혜경궁의 외삼촌 이해중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혜경궁도 알고 있었고 말리지않 았으며 오히려 세손의 방한모도 쓰지 못하게 했다.

 

세자는 궁지에 몰리자 마지막으로 효장세빈의 오빠 조재호를 불렀다. 이와 관련하여  한중록에 자세히 나온다.

세자는 처소에 지하실을 파고 세칸을 짓더니 지하실에 무기와 말을 감추었다. 세자는 위기를 느끼고 자신을 압박하는 노론을 제거할 결심을 했던 것이다. 군사정변을 일으켜 영조와 노론을 모두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영조가 명을 다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조는 7순을 앞둔 노환에 시달리는 노인이었다. 병환에 시달리는 영조가 죽고 세자가 즉위하면 사도세자가 소론, 남인등과 손을 잡고 노론에 칼을 들이댈것이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세자를 제거할 노론의 마지막 승부수가 나경언의 고변이었던 셈이다. 세자는 영조가 죽기를 기다렸고 노론도 영조가 죽으면 세자를 죽이려 계획하고 있었다. 이를 대비해 사도세자는 땅속에 집을 짓고 무기를 감추어 놓고 소론 영수 조재호와 관계를 맺는 자구책을 마련했던 것이다. 세자는 궁지에서 조재호를 불렀다. 조재호는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에 올랐으나 노론이 독주하는 조정에 불만을 갖고 사직하였다. 춘천에 은거하면서 노론에 포위된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세력을 모았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세자를 보호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한다. 노론이 중심이 된 나경언의 고변이 있고 세자가 무릎을 꿇고 대명한지 이틀 후인 5월24일 영조는 홍화문에 나가 시장 상인들을 불러 세자가 꾸어간 돈을 갚아주었다고 영조실록에 나온다. 이 돈이 세자가 유희, 또는 측근 인사들에게 상을 주느라 쓴 돈이라고 실록에 나오지만 실은 세자의 군사비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조재호는 춘천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사도세자는 세자 거처의 지하실에 무기고를 마련한 것이다. 결국 이 자구책이 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이유가 되었다.  

 

아! 팔아프다! 타자 더 못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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