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음절
맹기호
한 시간 정도 수영을 하고 나서 수영장에 딸린 목욕탕 더운물에 들어가 앉았다가 나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지러웠다. 어지러운 가운데 서너 걸음 걸은 것이 다였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내 생각에 30분 정도 잠을 자고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정신을 잃은 채 1분 정도 목욕탕 바닥에 누워있었다고 한다. 깨어 보니 엉덩이가 아팠다. 선 자세에서 밑동에 톱질을 끝낸 고목처럼 머리부터 넘어진 것이다. 마침 옆에 있던 사람이 넘어지는 내 머리를 받았기에 엉덩이가 지면에 먼저 닿았다.
여름날 운동장에서 교장선생님의 훈화가 길어지면 여기저기 쓰러지는 학생들이 있는데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고 오히려 왜 쓰러질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런 내가 쓰러진 것이다. 집에 와서 말했더니 온 식구가 난리다. 식구래야 어머니와 집사람인데 큰 병원에 가보라는 것이다. 사실 나도 무척 놀랐다. 의식을 잃은 경험은 생전 처음이었고 내가 의식이 없는 죽음의 세계에 다녀왔다는 신비한 생각까지 들었다.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사실 나는 정신을 잃는 것을 동경해왔다. 8시간 숙면을 하고 나면 몸이 얼마나 개운한가. 그런데 잠을 잔다고 하는 것은 의식이 없는 죽음의 상태다.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기 위해 마취제 주사를 맞고 하나둘 세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만다. 그 순간은 정말 마약처럼 달콤하다. 매번 열까지 세겠다고 맹세해보지만 셋 이상은 어렵다. 내시경 검사가 끝나고 회복실에서의 잠자는 동안의 달콤함은 무엇에 비기랴! 모든 예술이 음악적 상태를 동경할 때 빛을 내며 정점을 찍는 것이라면 나는 숙면으로, 마취로, 목욕탕에 넘어져 의식을 잃었을 때 정점을 찍는다. 아마도 내 마지막도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못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대학병원에 가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고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의사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며 하루에 커피 몇 잔을 마시냐고 물었다. 커피믹스 다섯 잔 마신다고 했더니 원인이 커피라는 것이다. 커피는 이뇨작용을 활발하게 하는데 커피를 마시고 물을 마시지 않으니 없는 물까지 체내에서 짜내어 배출하게 되고 수분 부족으로 정신을 잃은 것이라 하였다. 나는 심각한데 의사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싱글거리면서 커피를 끊고 물을 많이 먹으면 저절로 낫는다고 하였다. 발견한 것이 있다면 혈압이 조금 높다고 약을 처방해주었다. 그리하여 팔자에도 없는 대학병원에 몇 년째 다니고 있다.
병원에 가려면 여러 가지 챙길 것이 많다. 우선 진료 카드를 챙겨야 하고, 병원비를 내기 위해 신용카드는 당연히 가져가야 한다. 혹시 모르니 신분증도 가져가야 한다. 언젠가 무슨 증명서를 떼려는데 내 진료카드를 보여줘도 신분증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해서 집에 다시 갔다 온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병원 로비에서 볼 시집(詩集)을 한 권 챙겨간다. 대학병원이라는 곳이 환자가 많다 보니 아무리 예약 시간을 정하고 간다고 해도 30분 이상 기다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또 안경을 쓰고 가지만 책을 읽기 위해 돋보기를 별도로 가져가야 한다. 책을 읽으며 메모할 연필 한 자루, 약간의 현금, 자동차 열쇠, 빈집에 돌아올 대문 열쇠를 챙기고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챙긴다. 모두 열한 가지다. 여성과 달리 남자들은 손가방이 없다. 모든 것을 주머니에 넣고 가야 한다. 겨울에는 옷에 주머니가 여러 개 있지만, 여름에는 바지 주머니가 전부다. 어찌된 일인지 와이셔츠 주머니는 언제부턴가 허락도 없이 슬쩍 없어졌다.
대학병원에 차를 몰고 가면 주차부터 문제다. 병원 앞 도로에서부터 좌회전 신호 3번을 기다렸다가 간신히 병원 정문에 들어설 수 있다. 지하로 내려가 만차 상태인 1층, 2층을 지나 지하 3층에 겨우 자리를 잡고 하차한다. 우한 코로나가 창궐한 이후 병원은 자못 경비가 삼엄하다. 지하 3층 출입구에는 여러 명의 안내원이 진을 치고 있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질문지를 작성해야 한다. 우선 전화번호를 적어야 하고 해외에 다녀온 적이 있느냐? 해외에 다녀온 사람과 접촉한 적이 있느냐? 무슨 일로 병원에 왔느냐? 환자냐? 아니면 보호자냐? 어떤 과에 진료를 받으러 왔느냐? 등 묻는 것도 많다. 그걸 작성하고 나면 체온을 측정하고 이상 없으면 병원출입허가증을 내준다. 언제부터 허가를 맡고 병원에 드나들었는가! 출입허가증이라니! 보는 순간 마음이 불편하다. 병원이 무슨 DMZ라도 되는가! 허가증을 받아들고 통과한 뒤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 해당 과에 갔다.
접수대에 진료카드를 내고 왔다고 말했더니 출입허가증을 달라고 한다. 이런!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출입허가증이 없다. 받을 때부터 마음이 불편하였는데 어디서 흘렸나? 진료카드, 핸드폰, 신용카드, 시집, 연필, 돋보기, 자동차 열쇠, 현금, 핸드폰은 있는데 통과하면서 받은 출입허가증이 없다.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보고 시집을 넘겨봐도 없다. 바지 옆 주머니 2개, 뒷주머니 2개에 들어있는 11가지 물건을 탁자에 다 내놓고 뒤져봐도 출입허가증이 없다. 병원 들어올 때 체온 측정하고 이상 없어 발급한 출입허가증을 진료과에서는 왜 또 보여달라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나는 병원에 올 때마다, 은행에 다녀올 때마다 물건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병원에 와서 진료카드를 잃어버려 재발급 받은 경험이 여러 번이고 은행에서 신분증이나 도장을 두고 오는 경우도 많았다. 도대체 나는 왜 맨날 이 모양인가? 머릿속이 하얘진다. 병원 직원은 완강하다. 물러설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11가지 물건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고, 손에는 시집을 들고 지하 3층 주자장의 병원 출입구까지 내려가 다시 절차를 밟으니 출입구 직원이 나를 알아보고 잠시 전 출입허가증 받으신 분 아니냐고 묻는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진료과에 오니 직원이 찾았느냐? 다시 발급받은 것이냐? 묻는다.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병원에 여유를 갖고 미리 왔지만 벌써 다음 진료가 나라고 호명한다. 혈압을 재려고 하니 그러잖아도 줄이 긴데 어떤 사람이 내 앞을 빠른 속도로 스치면서 혈압기 줄을 보탠다. 진료과 직원이 보기 딱했는지 책상에서 전자혈압계를 꺼내더니 선체로 혈압을 재준다. 대학병원에서 이런 식으로 혈압을 재보기는 처음이다. 간신히 내 차례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겨울날 한 켠으로 쓸어놓은 눈이 영하의 햇살에 마지못해 반짝이듯 내 마음이 아주 조금 녹는다. 내내 들고 다닌 시집은 제목 두 음절만 읽었다.
맹기호
詩人, 수필가, 서양화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미술협회 회원
국제PEN한국본부 회원,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장, 수원일요화가회장
문학과 비평 작가회 명예회장, 매탄고등학교장 역임
시집 『그리워서 그립다』, 『4인수필집 틈과 여백 사이』
홍조근정훈장 수상, 경기문학인 대상 수상, 백봉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