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일기♠ 아! 신비로운 5월 14일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그 알이 부화되는 날 새끼뻐꾸기에게


진짜 어미의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뻐꾹 뻐꾹 소리 내어 우는데


그 날이 5월 둘째 주말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개 5월 14일경이 된다. 


새끼가 알에서 깨어나는 그 순간에 어미의 소리를 들려주고


기억하게 한 다음 나중에 자라면 데리고 떠난다는 것이다.


 


이상은 같이 근무하는 동료 고성봉선생님에게 들은 말이다.  


고선생님은 인품도 훌륭하거니와


쌓인 내공도 대단한 분이다.


고선생님은 입으로 뻐꾸기 소리를 흉내내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똑같은지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눈을 감고 들으면 뻐꾸기 소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언젠가 고선생님이 입으로 소리를 내는데


 뻐꾸기가 눈앞에 나타난 적도 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




어제 아침 교육원 뜰을 걷고 있는데 뻐꾸기 소리가 들렸다.


날짜를 짚어보니 세상에 5월14일이 아닌가!


그렇다! 부화된 새끼에게 진짜 어미가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구나!


붉은눈이오목눈이 둥지에서 오늘 부화되었구나!


정말 자연은 놀랍다. 고성봉 선생님에게 말하고 나서 서로 감탄하였다.




[ 관련 자료 ]


두견이목 두견이과의 새. 곽공(郭公)이라고도 한다. 전체길이 약 35㎝. 몸 윗면과 가슴은 잿빛이고, 배는 흰 바탕에 검은 가로줄무늬가 있다. 꼬리는 길며, 날개도 가늘고 길다. 날 때는 매종류와 비슷하다. 뻐꾸기라는 이름은 <뻐꾹 뻐꾹>이라 들리는 울음소리에서 유래한다. 겨울철에는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서 월동한다. 한국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은 5월 하순부터 8월 상순이며, 이 시기에 같은 종류인 두견이나 벙어리뻐꾸기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둥지를 만들지 않고, 다른 종류의 새 둥지에 알을 낳는다. 뻐꾸기가 주로 탁란(托卵)하는 곳은 개개비류, 까치류, ·멧새류, ·할미새류 등의 둥지이다. 암컷은 각기 일정 범위의 지역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그러한 새들의 번식상황을 돌아본다. 그리고 알을 품어줄 임시어버이새가 산란을 시작하면 알을 1개 빼내고 자기의 알을 둥지 속에 1개 낳는다. 알은 임시어버이새가 낳은 알과 색깔이나 무늬가 비슷한 경우가 많지만 크기는 조금 크다. 새끼는 보통 임시어버이새의 새끼보다 1∼3일 빨리 부화한다. 부화한 뒤에는 아직 부화하지 않은 임시어버이새의 알을 등에 하나씩 업고 둥지 밖으로 떨어뜨린 후 둥지를 독점하며 임시어버이새로부터 먹이를 받아먹고 자란다. 둥지를 떠날 때쯤 되면, 새끼는 임시어버이새보다 몇 배 크게 자라 먹을 것을 달라고 조르는데, 모충(毛蟲)을 즐겨 먹는다. 둥지를 떠난 뒤에도 1개월 이상 임시어버이새의 도움을 받는다. 머리 꼭대기에 눈에 잘 띄는 흰 반점이 1∼2개 있는 것이 이 새끼의 특징이다.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등지에 분포하며, 한국에도 전역에 걸쳐 번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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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기♠ ” 다음은 어디로 가는 거야?”


홍도 일몰


 



 



홍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오르다.



 



 


홍도 해안 유람선을 타고….



 



흑산도 정상에서


 



홍도 해안의 절경



흑산도 여객 터미널에서……



 


다른 집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여행을 갈 때 나는 여행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아내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하기 때문에


나는 날짜만 정해주면 된다.


그 점이 정말로 편하다. 행복하기까지 하다.


세상에 이처럼 편한 여행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날짜만 정해서 명령을 탁 내리고,


그 날이 되어서 간단히 속옷 넣고 책 몇 권 넣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기만 하면 된다.




2박 3일의 연휴에 홍도와 흑산도를 다녀 왔다.


홍도은 정말 아름다운 섬이었다.


300년 이상 된 동백꽃 자생지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해안의 기암 절벽이 아름다웠다.


섬의 숙박시설은 불편하였지만


해외여행의 물결 속에서 국내 관광지는 거의 쑥대밭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홍도는 활기가 넘쳐있었다.


겨울을 제외하고는 봄, 여름, 가을의


3계절 동안 언제나 관광객이 넘친다고 하였다.


더욱 마음에 드는 것은 특별한 바가지 요금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배안에서 1000원짜리 과자를 2000원에 파는 것을 빼놓고는


커피를 비롯한 모든 음료는 1000원이었다.


이에 비하여 흑산도는 홍도보다 큰 섬이었지만


거의 볼것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홍도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170호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다.


언젠가 한 번은 꼭 가야할 섬이었다.


 




여행 계획은 아내가 다 짰다.


홍도에 가서도 아내를 쫏아 다니면서 늘 묻는다.


“여보 다음은 어디로 가는 거야? 유람선은 언제 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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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기♠ 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돌계단을 올라서 배치한 쌍사자석등은 전체적인 조화와 날렵한 균형으로 보아 첫눈에 국보급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작품이었다.


 


 



본당 정면으로 오르는 돌계단이다. 비록 무너졌지만 조각의 형태로 보아 불국사의 정운교, 백운교를 조각한 솜씨에 비견될 만한 솜씨이다.


 


 



 


주춧돌만 남은 본당이다. 주춧돌도 그냥 아무 돌을 놓은 것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조각을 한 것이 범상한 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본당 기단부에 여러마리의 사자가 돋을 새김되어있었다. 1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자가 움직이는 듯 한 대단한 솜씨이다.


 


 


 



 


감은사 탑에서 더 발전된 형대로 가는 과정의 탑임을 알수 있다.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가 신라 시대의 수준급 탑이다.


2중 기단에 3층의 지붕돌을 올렸는데 처마선의 경쾌함이 잘 나타나 있다. 



 


 


 



 


탑의 한 층 아래 마당에 있는 전체적인 절터의 맨 아래에 있는 구조물인데 이것은 그냥 석축이 아니고 아마도


이 위에 나무 구조물이 있었을 것이다. 쌓은 솜씨가 범상하지 않아 셔터를 눌렀다.
 


 



본당의 옆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사진의 순서가 바뀌었다. 3번째로 올려야하는데…..하여튼 솜씨가 대단하다.



 


 





 위에 언급하여 더 설명하지 않겠다.


 



 


본 당 뒤쪽의 석축이다. 산비탈을 까서 절터를 만들면 자연스럽게 


본당 뒤 쪽에 이런 석축을 쌓게 된다.


뒤 쪽의 석축도 이렇게 정교하게 쌓은것을 보면 이 절은 보통 절이 아니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즉 경남 합천 황매산 자락에 있는


통일신라 고찰 영암사지에 들렸다.


 


한마디로 감동적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쌍사자석등과 3층석탑은 국보급임을 알 수 있었다.


진정한 한국 고대문화를 보려면 영암사지를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영암사지는 복원된 흔적없이 그대로 둔 것이 나를 감동시켰다.


우리가 앙코르와트에 가서 감동을 받는 것은 인공을 가미시키지 않고


무너진 상태를 그대로 보는 즐거움인데


바로 여기에서 나는 그런 감동을 느꼈다.


 


세미나를 마치고 들린 황매산을 하산 하다가 우연히 들린 것인데 큰 감동을 받았다.


석등과 탑은 보물이었으나 법주사 석등이 없었다면 당연히 국보로 지정되었을 것이다.


바빠서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것이 안타깝다.


 


어떤 연유에서 인지


목조로 된 부분은 철처히 파괴 되고


돌로 만든 부분은 보존된 것이다.


다음에 꼭 다시 한번 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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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일기♠ 황매산 여정

 


 


부산 세미나 참석 후 올라오는 길에 철쭉이 유명한 황매산에 들렸다.


 


 



 


황매산 정상이 아름다웠다.


 


 



 


황매산 8부지점의 바위에서



 


황매산 정상의 모산재 해발 86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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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기♠ 아! 제접국-말문이 막혔다


 



부산시 교육원은 금정산 중턱에 위치했는데


면적이 19만평이라는데 놀랐다.


아침 식사도 아주 훌륭하였다.




갈비찜


김치


취나물


오징어젓갈


갈치튀김


야쿠르트


밥


제첩국




제첩국에는 새끼손톱1/5크기의 제첩이 수없이 많이 들어있었다.


국물 한 방울도 남길 수 없었다. 세상에! 이 먹을거리가 식탁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었을까 생각하니 그저 말문이 막혔다.


감사한 마음으로 아침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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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일기♠ 실례를 무릅쓰고 사진을 찍다


 


 



 


 


지난 2박3일간 전국 교육청산하 교육연수원


교수 요원들이 모여 연찬회를 가졌다.


세미나도 열고, 모여서 주제를 정하고 토론하면서


조직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모임이다.




금년에는 부산시 교육청에서 주최하여


멀리 부산까지 차를 몰고 가서 참석하였다.


세미나 중간 중간에 문화 행사가 있었는데




그 중 무형문화재 동래학춤이 압권이었다.


그림을 보면 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기품 있고 아름다웠다.




실례를 무릅쓰고 공연 중에 사진을 찍었다.


조명이 어두워서 사진이 흐리지만 정말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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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기♠ Suwon railroad station


 



 



1970. 1. 18일 오전 11시 였다.


내가 처음 수원으로 이사 온 날이다.


지금도 그 날이 생각난다. 무덤덤하게 유리창이 많이 달린 단층 건물이었다.




그런데 수원에 첫발을 디딘 순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고


반대로 고향을 떠나던 날의 기억이 더욱 선명하다.


떠나기 전날 밤 나는 혼자 동네를 여러 바퀴 돌았다.


떠나는 날 아침에 동네 아주머니 몇 분이 눈물을 흘리며


잘가라 전송하던 것이 생각난다.




오늘 둘째가 집에 왔다가 기숙사로 돌아가는 날이다.


하루 종일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산책도 할 겸 아내가 슬리퍼를 산다고 하여


아들이 수원역에 나가는 길에 동행하였다.


함께 걷다가 아들은 수원역의 많은 인파 속으로 묻혀갔다.




이제 수원역은 옛 모습이 아니다.


애경백화점 아래층을 수원역사로 쓰고 있다.


왠일인지 요즈음은 역에 근무복을 입은 철도청 직원도 보이지 않는다.


열차 출발 시간 되었다고 안내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가고 방송멘트만 나오는가?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이 양복차림으로 바꾸었나보다?




수원역 귀퉁이에 조그만 관광안내소가 있는데


한옥지붕으로 지어서 옛날 수원역의 향수가 느껴지는 곳이다.


여기가 내가 유일하게 수원역에서 마음을 두는 장소이다.


사실 휴직할 때 가끔 혼자서 여기 나와 서성이곤 하였다.


 


생각해보면 내 정신의 고향은


자연,


그 자연에 속한 인간관계,


그 자연에 뿌리를 둔 깊은 서정이다.


 


거기서 한 장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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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기♠ 손님


 


 



 





 


아직도 이 나이에 휴일에  관공서를 지킨다는 것이


조금 어울리지 않는듯 하다.


그러나 어쩌랴 사실이 그런것을……


오늘은 일요일 일직이다.


하루종일 찾아오는 이 없는 적막한 공간에 홀로 있는 것이 싫어


아내를 꼬드껴서 교육원에 왔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셔서 나와 아내가 먹을 점심 도시락을 마련하셨다.


 


그런데 지난 주일 약국하는 제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요일에 점심 같이 하자고……


내가 일요일 일직이라 했더니


강화에 놀러온단다. 세상에! 더없이 감사한 일이다.


 



교육원 현관과 뜰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3장 모두 잘 나왔다.


아내와 오연숙 약사 부부와 셋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나도 함께 찍으려 했는데 밧테리가 완전 방전되어 찍지 못했다.


 


오연숙은 아주 특별한 제자이다.


학생 때는 2등도 한 번 한적이 없다.


항상 전교 수석이었다.


특히 그의 성격이 빛났다. 


의지가 강했고( 자기 주장이 뚜렸하고)


언제나 친구를 배려하여 동료들의 신망이 높았다.  


몸도 날래고 운동도 아주 잘했는데


요즈음 조금 야윈 듯하여 걱정된다.  


 


일선 학교를 떠난 지도 여러 해……


이제 찾아오는 제자도 거의 없다.


 


강화에서 제일 좋은 횟집에가서


살아있는 싱싱한 우럭으로 매운탕을 먹엇다


아주 맛이 좋았다.


 


옛날 제자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정말 감격스러운 일이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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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일기♠ 토종


 


토종민들레 : 꽃받침이 위로 향하고 있다.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 구경할 수 있다.


 


 



토종민들레 : 역시 꽃받침이 위로 향하고 있다. 이것이 제일 보기 힘들다.


 


 



 


서양민들레 : 귀화종이다. 꽃받침이 아래로 향하고 있다. 제일 흔하게 보인다.


 



 


복습 : 왼쪽은 꽃받침이 위쪽으로 향한 토종민들레, 오른쪽은 꽃받침이 아래쪽으로 향한 서양민들레


 


* 1. 토종과 외래종은 색깔로 구분한는 것이 아니고 꽃받침으로 구분된다는 주장이 있고


  2. 흰색깔의 민들레는 모두 토종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흰꽃도 꽃받침이 아래를 향한것을 본 기억이 있는것 같다.


   흰색 민들레는 모두 토종이라는 주장은 왠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내가 직접 조사해보고 올리겠다.


   내 생각에는 꽃받침의 방향이 위쪽이냐 아래쪽이냐에 따라 구분하는것이 맞는것 같다. 역시 더 관찰해볼일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민들레를 보면 토종인가 국산인가


구분하려는 버릇이 있다.


 


특히 흰색의 민들레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아마도 내것을 사랑하고 아끼려는


국수적인 면도 있는것 같고


시골에 고향을 둔 나로서 두고온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외래종에 비하여 번식력이 약한 약자를 보호하려는


측은지심에 다름 아닐 것이다.


 


 



4, 5월에 햇살 아래 날리던 민들레 씨앗. 요즈음은 여름과 가을에도 흔히 볼 수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피는 외래종이 늘었기 때문이다. 우리 땅 민들레의 90%는 외래종인 서양 민들레 이다. 토종 민들레는 이른 봄에만 꽃이 피고 여름이 되면 꽃을 피우지 않는다. 그런데 서양 민들레는 일 년 내내 성장하면서 연달아 꽃을 피우고 씨앗이 만들어진다.


토종 민들레는 자가불화합성을 가지고 있어 자기의 꽃가루가 암술에 묻어도 씨앗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서양민들레는 자가불화합성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꽃가루도 씨앗을 만들 수가 있다. 그 때문에 토종민들레는 자기 근처에 몇 그루의 토종민들레가 없으면 씨앗이 만들어지지 않지만 서양민들레는 한 그루가 외톨박이로 떨어진 곳에 나 있어도 씨앗을 만들 수가 있다. 서양 민들레는 이상과 같이 토종민들레 보다 번식하기 쉬운 성질을 많이 지니고 있다. 토종 민들레는 씨앗이 싹을 트고 나서부터 꽃이 피기까지는 수년이 걸리는데, 서양민들레는 그 해 안에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만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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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일기♠ 아! 문수산성


 



 




 




 


보통 공직사회에서는 체육의날 행사가 있다.


하루 날을 잡아서 체육 관련 행사를 갖는 것이다.


어느 곳으로 갈것인지 교육원 직원들이 설문조사를 했는데


서울의 북한산을 가자는 의견도  있었다.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정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여 강화도 앞의 육지에 있는 문수산성으로 정했다.


 


불평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대형 버스를 대절했는데


겨우 10km 떨어진 문수산성을 가면 어떻하느냐 면서 불평을 하였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문수산성은 병인양요의 격전지이며,


문수산성 밑에 있는 갑곶나루는


정묘호란 때는 인조를 비롯한 왕실 전체가, 


병자호란 때는 세자빈, 세손, 봉림대군, 인평대군이 피난을  왔을 때 건넜던 다리이며,


그 이전 고려의 39년 항몽시절에


몽고군이 주둔하면서 강화도의 고려군과 대치했던 장소가 아마도 문수산일 것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이런 때 일부러 문수산성을 가보지 않으면 개인적으로 가기 어려운 곳이라고 주장하였다.


요즈음 인터넷에서 가장 가고싶은 관광지를 검색하면 강화도가 전국 10여개 지역 중에서 5위안에 든다.


그러나 강화에 사는 일반직 직원들은 멀리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여러 사람을 설득한 끝에


문수산성으로 가게되었다.


 


참으로 웃기는 것은 


11시에 출발한 버스가 문수산성을 지나


1시간이나 더 멀리 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문수산으로 돌아와


산성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목적지가 너무 가까이 있으니


목적지를 지나 먼 곳에 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가까운 목적지로 돌아온 격이 되었다.   



산성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었다.


돌을 쌓은 솜씨가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첫 사진은 정상에서 찍은 사진인데


뒷쪽은 한강이며 강 건너가 북한 땅이다.


맑은 날씨여서 북한 땅이 잘 보였다.


 


듣던 대로 땔감으로 쓰기 위해 산의 나무를 베어내어


모든 산은 붉은 민둥산으로 나무가 없어서 썰렁하였다.


녹음이 우거진 남한의 산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신식 소총을 쏘고, 군함에서는 대포로 함포사격을 하며 공격해오는 프랑스군 앞에


조선군은 제대로 공격도 해보지 못하고  도망가는 바람에 순식간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이어 문수산성도 점령당했던 일을 상기하고


서양세력의 침입 앞에 무기력했던 조상들을 생각하면서 회한에 젖었다.


 


양헌수 장군의 지략으로 프랑스를 격퇴하기는 했지만


결국 10년이 지난 1876년에 일본에 무기력하게 강화도조약으로 굴복하고 말았다.


 


 


 


 


< 관련자료 >


김포에서 강화도로 가다 보면 강화대교를 건너기 바로 전에 오른쪽으로 높은 산이 보인다. 바로 김포반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해발 376m의 문수산(文殊山)이다. 이 산에 사적 제139호로 지정된 문수산성이 있다. 문수산 정상에 올라가 보면 동북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가고 서쪽으로는 강화도와 김포 사이를 갈라 놓는 염하가 흐르고 있다. 염하 건너편으로 강화도 갑곶돈에서 월곶돈에 이르는 강화도 동쪽 해안이 눈 아래 들어온다. 문수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이 강들은 조선 시대에 서해안을 따라 올라온 배가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들어가는 유일한 뱃길이었다.




이 뱃길을 감제하고 강화도 수비를 보강하기 위해 숙종 20년(1694) 문수산에 산성을 쌓았다. 문수산이 전략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병자호란(1636) 이후다.




정묘호란(1627) 때에는 인조를 비롯한 조정이 강화도에 들어가 후금에 항전하면서 협상을 주도해 후금군의 철수를 이끌어냈지만 병자호란 때에는 청군의 도하작전 성공으로 강화도가 쉽게 함락됐다. 당시 청군이 수전(水戰)에 익숙한 중국 군사를 대동하고 왔을 뿐만 아니라 강화도 대안인 문수산 일대를 장악하고 수십 일 동안 강화도의 정세를 관망하며 주변에서 조선인들의 선박을 징발하고 민가를 헐어 수백 척의 뗏목을 만들어 일시에 염하를 도하했기 때문이다. 문수산이 강화도 공략의 거점으로 이용됐던 것이다.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의 군비에 대한 청의 감시가 느슨해지자 조정에서는 강화도를 보강하면서 문수산에 산성을 축조할 계획을 세우게 됐다. 강화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수산을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축성 공사는 숙종 19년(1693) 말부터 시작, 이듬해 9월에 끝났다. 대략 10개월 정도 소요된 셈이다.




문수산성은 강화대교가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염하를 따라 평지로 이어지다 문수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북쪽 능선을 따라 올라가 다시 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도록 쌓아졌다. 이 산성은 둘레가 6201m, 내부 면적이 6만4000평에 이르는 비교적 큰 규모다.


육군박물관은 1998년 문수산성에 대한 현지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산성은 모두 돌로 쌓여졌는데 현재 염하와 연해 있는 평지 부분은 모두 파괴돼 성벽이 남아 있지 않지만 문수산 능선에는 성벽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성벽으로 볼 때 외벽은 35m의 높이로 수직 벽면을 이루고 있으며 성벽 상단부의 두께는 2m 정도로 비교적 견고하게 축조됐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곳의 문루(門樓)와 남·북·동 세 곳의 아문(亞門)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문과 북문을 복원해 놓았을 뿐 모두 훼손돼 위치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문수산 정상에는 지휘소인 장대(將臺)가 있었는데 현재는 지름 20㎝ 내외의 원형 주춧돌만 남아 있다.




이 문수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1866년의 병인양요 때였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갑곶진에 상륙해 강화성을 점령하자 조정에서는 문수산성에 50여 명의 군사를 배치, 프랑스군의 내륙 침략에 대비케 했다. 이 무렵 로즈 제독은 조선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70여 명의 정찰대를 문수산성 쪽으로 보냈다. 이를 주시하고 있던 조선군의 기습 사격으로 프랑스군에서 전사상자 5명이 발생했다. 프랑스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우세한 화력을 이용, 남문으로 돌진했다. 남문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조선군은 화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동쪽의 능선을 따라 통진 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을 점령하자 남문을 비롯한 부속 건물과 민가 30여 호를 모조리 소각하고 조선군의 후미를 추격하다 짙은 안개로 추격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되돌아갔다.




전투는 조선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문수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부각됐다. 원래는 내륙으로부터 강화도가 침공받을 경우를 대비해 문수산성을 쌓았던 것이지만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문수산성이 강화도 쪽에서 내륙으로 침공하는 적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인식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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