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이원호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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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7년 (신라 문무왕7년):  대마도에 백제식 산성인 금전산성 축성

                                                                                                                                             1246년 고려고종33년: 종중상이 백제계 아비루씨를 내쫒고 대마도주가 됨

                                                                                                                                             1389년 고려 창왕2년, 1차 대마도정벌

                                                                                                                                             1396년 조선 태조5년 2차 대마도정벌

                                                                                                                                             1419년 조선 세종1년 3차 대마도정벌

                                                                                                                                             1420년 세종2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

                                                                                                                                             1607년 선조40년 1차 조선 통신사를  대마도에 파견

                                                                                                                                             1764년 영조40년 조선통신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져옴

                                                                                                                                             1811년 순조11년 마지막 조선통신사 파견

                                                                                                                                             1876녀누 일본이 대마도를 나가사키현으로 편입시킴

                                                                                                                                             1906년 의병장 최익현 대마도에서 순국

                                                                                                                                             1931년 고종황제의 딸 덕혜옹주 대마도주 종백작과 혼인

                                                                                                                                             1948년 미군정시기 입법의원 본회의에서 허간용외 62명 대일 강화조약에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복귀 결의안 제출

                                                                                                                                             1948년 이승만대통령 정부수립 직후 대마도 반환촉구 성명

                                                                                                                                             1949년 이승만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 대마도 반환요구(이후 1950년까지 60여회 반환 요구)

 

대마도는 원래 한국땅이다!

이원호씨의 소설 대마도1,2권을 읽었다. 대마도는 과거 1400여년 동안 우리땅이었다.

조선말 국력이 약할 때 정확히 말해 무력을 앞세운 일제가 조선을 억압하여 굴욕적인 강화조약을이 맺은 1876년에 일본은 강제로 대마도를 나가시키현으로 편입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60여회에 걸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였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이유는 독도를 분쟁화하여 대마도의 반환요구를 없애려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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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숲은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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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1학기말로 정년 퇴직하는 교장선생님들을 축하하는 저녁 모임에 참석하여 술을 적당히 마셨다.

모임에서 한잔 할 요량으로 차를 갖고 가지 않았다. 모임장소가 경기도청 옆이면 우리 집에서 도보로 가능한 길이기도 했다.

스스로 불콰하여(ㅎㅎㅎ) 끝나고 걸어오면서 기분이 좋았다. 태워 준다고 권하는 교장이 여럿있었지만 나는 그냥 걸었다.

 

집에 거의 다왔을 즈음 문자가 오길래 보았더니 대리운전회사에서 보내는 스팸문자였다.

문자를 보니 갑자기 심사가 뒤틀려 몇가지 메뉴를 눌러 문자를 지웠다.

문자 하나 지우는데 시간이 길게 걸린다는 생각이 들어 중간에 취소할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아뿔싸! 이미 때는 늦었다. 1300여명의 연락처가  날아갔다. 저장된 전화번호를 모두 삭제한 것이다.

휴대폰 대리점에 연락했지만 방법이 없단다! 정말 낭패다!

큰 아들 아산이가 인터넷으로 들어가 복구해본다고 열심히 하더니 500명 정도는 복구하였다.

복구시점이 언제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복구된 번호가 일관성이 없다. 어떤 번호는 복구되고 어떤 번호는 없어졌다.

정말 낭패다! 전화가 와서 번호가 떠도 누군지 모른다. 그러니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맹기호입니다” 이런 식으로 받는수밖에 없다.

이제 하는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전화를 걸어오기를 기다려 새로 저장하는 수밖에 없다.

 

한편 생각하면……1300명의 번호가 다시 만날 사람도 아니고, 이제는 이쯤해서 정리할 필요도 있겠다.

채근담에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어와도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숲은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고 했던가. 지난 과거는 잊으라는 뜻이다. 번호 잘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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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판을 내자!

나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건축물은 어떤것인가? 이 물음에 집착해왔다.

사실 생각해보면 오래되었다고 제일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 문제에 오랫동안 몰두해왔다.

나는 사회선생이지만 실제로는 일반사회 전공이어서 역사 과목을 가르쳐본 적은 없다.

시험문제에 제일 오래된 목조건축물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 문제에 집착해왔다.

 

우리나라에 삼국시대 목조건축물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신라의 황룡사9층목탑이 몽고침략에 불탄것이 아쉽다. 

고려시대 건축물로 봉정사극락전, 부석사무량수전, 수덕사대웅전 3개 중에서 어떤것이 제일 오래되었는가!  

 

오늘 이 문제에 결판을 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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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대웅전은 1937년~1941년에 해체수리하였는데 이 때 건립과 관련된 묵서가 나왔는데 1308년에 건립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1308년 이렇게 확실한 연대를 절대연도라고 한다. 수덕사 대웅전은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사모하는 고려 때 목조건축물이다.  아름다운 속살이 드러난 옆면의 면분할은 건물의 백미다.

맞배지중에 겹처마, 정면3칸, 측면3칸, 주포식 건물이다. 지붕이 단순하면서도 웅장하고 경건한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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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극락전이다. 1972년 해체수리 당시 1363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보통 절집을 중수하는데 150년 정도마다 하기때문에 거슬러 올라가면 1363-150=1213년에 건립했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그리하여 아마도 봉정사 극락전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봉정사극락전은 맞배지붕에 주포식,  정면3칸의 아주 단아한 건물인것이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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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이다. 1916년 해체 수리당시 서북쪽 귀공포에서 나온 묵서에서 1376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역시 150년 정도에 한번 중수한다고 했을 때 1376-150=1226년에 건립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부석사무량수전은 팔작지붕, 정면3칸, 측면3칸, 주포식건물이다.

무량수전도 아름답다. 팔작지붕의 스카이라인도 아름답거니와 무량수전의 공포는 베토벤의 음악처럼 장중하고 두터운 느낌을 준다. 유연한 배흘림기둥의 선도 아름답다.

 

봉정사극락전 1213년, 부석사무량수전 1226년 수덕사 대웅전 1308년에 건립되었는데 극락전과 무량수전은 추정치여서 어느 건물이 가장 오래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다만 추정한다면 1. 봉정사극락전>2. 부석사무량수전>3. 수덕사대웅전이다.

이상으로 결판냈다. 이렇게 추정치까지 동원하다보니 수능시험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건축물은 어느것인가? 라는 문제는 절대 안나온다! ㅎㅎㅎ~ 

 

그런데 건립연도가 확실한 절대연도를 놓고 보면 수덕사 대웅전이 1308년으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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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건축에 관하여……

일주일(8.5-8.10)일간 국립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 가서 한국고건축에 관한 연수를 받고 왔다.

충청남도 부여에 있는 대학이었는데 나는 그런 대학이 있는 줄도 몰랐다. 대학원과정까지 개설된 문화공보부 산하 국립대학이었다.

평소에 한옥에 관하여 많은 관심이 있었고 특히 고대 한국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터여서 연수를 신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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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축 박물관에서 보았다.  공포를 나타낸 것으로 익공이 대들보와 함께 연결되어있고 익공의 몸체 아래가 기둥에 들어가 있어서 힘을 안정적으로 받는다.

멀리 새날개가 두개처럼 보이는 이익공이 있다. 실습시간에 공포를 분해 결합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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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덕사 대웅전 건물의 목재결합 구조를 모형으로 제작한 것이다. 우리량으로 불리우는(소가 변을 볼 때의 꼬리곡선)부드러운 부재의 형태가 신비롭다. 모두 3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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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화백이 수덕사에 은거할 때 조각했다는 바위다. 아름다운 추상 무늬가 있어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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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토록 사모하는 수덕사 대웅전에서 사진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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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읍성의 정문이다. 문 위에 명나라 황제의 연호가 있어 눈살이 찌푸려졌다.부쉈으면…좋겠다. 그대로 두어야 역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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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대웅전의 옆면이다. 맞배지붕의 줄기가 시원하다. 옆면의 면분할은 정말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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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들보의 종류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위에 보이는 짧은 대들보는 퇴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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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들보 위 맨 위에 종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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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경내에 이상한 국적불명의 탑이 있었다. 이런것을 보면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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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안에 있는 연수원에서 연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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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의 정문이다. 정확하게는 충청병마절도사가 주재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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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은 혜경궁 홍씨의 변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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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서 43년을 살아온 사람으로써(me),  사도세자의 능이 있고 정조가 천도까지 생각하며 지었던 수원화성 사람으로써 당시 상황을 잘 알필요가 있다.  생각되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우리가 한중록하면 혜경궁홍씨의 슬픈 인생 역정을 여성의 섬세한 필체로 담은 수준높은 궁중문학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않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알게되었다.

 

그동안 정조를 노론이 암살하려 했다는 내용을 많이 들었고, 정조가 신하들에게 은밀한 서찰을 보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정조의 어머니와 어머니 집안이 사도세자 죽임에 관여하고 심지어 정조의 즉위에 반대하고 정조가 왕이 된 후에 자객이 궁에 몰래 들어와 정조를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물론 실록에 있다)을 알고 정말 놀랐다. 이 모두가 권력 때문이었다. 한중록은 저자가 회갑을 맞던 해인 1795년(정조 19)에 친정 조카 홍수영(洪守榮)의 소청으로 이 글을 쓴다 하였고, 그 후 67세, 68세, 71세 등 네 번에 걸쳐 쓴 네 편의 글이 있다. 이 중 회갑 때 쓴 첫째 것이 비교적 한가로운 심정에서 붓을 든 것이고, 나머지 3편은 모두 아들인 정조가 승하한 후 어린 왕 순조에게 보이기 위하여 쓴 것으로, 다분히 정치적 목적이 농후한 작품이라 하겠다. 한중록에 있는 많은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의 내용과 다르다. 이는 자신의 죄를 여러가지 이유로 덮으려 했던 노정객 혜경궁 홍씨의 변명록이다.  

《한중록(閑中錄)은 한가할 한자를 썼다. 많은 사람들은 한중록이 원한에 사무쳐 쓴 책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한가한 날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한중록을 쓸 당시에는 어린 세자빈 이 아니고 임금의 어머니였다.  혜경궁은 80살까지 살고간 노련한 노정객이었다. 그리고 한중록의 여러가지 내용은 조선왕조실록과는 너무나 다른 부분이 많다. 아니 반대로 쓰여져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반대했다는 기록은 없다.  방조한 것이다.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협조한 사람들은 영조, 세자빈의 장인인 홍봉한 등이다. 영조는 탕평책을 썼지만 자신을 왕위에 올리는데 공을 세운 노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아니 노론 편이었고, 홍봉한과 혜경궁홍씨는 노론이었다.

사도세자가 왜 소론편에 섰는지 그 단초가 명확하지 않다. 하여튼 사도세자를 기른 유모가 소론편이었다고 하는데 충분하지 않다. 세자가 15세부터 대리청정을 하는데 영조가 소론을 탄압하는 옥사를 일으킨다. 이 때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니 세자가 여기에 반대하면서 소론편이라고 알려진다. 그리하여 영조가 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하고 세자는 목을 매게 해달라고 간청하는데 이 때 세자의 장인 홍봉한이 뒤주를 가져다 놓는다. 영조는 뒤주를 보고 세자를 집어넣으라 명령한다. 뒤주뒤에 작은 구멍이 있어 처음에는 물과 음식을 넣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구멍마져 노론세력들이 영조에게 밀고하여 영조가 노하며 구멍을 맊아 버린다. 결론을 말하면 사도세자는 당파싸움에 희생된것이다. 파당이 사도세자를 죽인것이다.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과 세자빈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왕이 되는 것보다 노론과 풍산홍씨 집안의 영화가 우선이었다.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이고 나서 사도세자의 아들이 세손으로 결정되고 후일 영조가 병환이 깊었을 때 영조의 아들 즉 정조가 즉위하면 자신들이 죽임을 당할 것을 걱정해 정조의 즉위를 방해하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운다. 여기에 다행이 임금 영조가 동조하지 않았다. 아들은 죽였지만 손자를 죽일수는 없었고 영민한 손자는 영조가 죽기전까지 반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또 노론은 정조가 왕이 된 후에도 3번이나 정조를 암살하려하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풍산홍씨 집안의 평양감사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 대궐에 자객을 존현각 지붕위로 침투시켜 정조를 살해하려 했으나 호위 무사에게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절치부심으로 한을 삭혀온 정조는 왕이 되자 외가 즉 혜경궁홍씨 집안을 주살낸것을 보면 알수 있다.  장인 홍봉한의 동생이며 좌의정인 홍인환에게 정조의 즉위를 방해한 죄목으로 사약을 내린다. 홍인한과 결탁하여 세손 정조를 제거하려했던 자신의 고모인 화완옹주를 귀양보내고 서녀로 강등시켰다. 영조가 60이 넘은 나이에 동침하여 아기를 가진 숙의문씨의 배가 불러왔을 때 노론은 숙의문씨와 결탁했고 세손은 궁지에 몰렸었다. 다행히 숙의문씨가 딸을 낳은 바람에 일은 실패했다. 노론과 노론의 핵심 홍씨 집안은 멀쩡한 세손을 제거할 계획을 끊임 없이 세웠던 것이다. 역시 숙의 문씨도 작호를 박탈해 사저로 내쫒았다. 할아버지 영조의 후궁이었기에 목숨만은 살려주고 천지를 모르고 까불었던 문씨의 오라비 문성국은 목을 자르고 어미는 제주도로 보내 여종으로 삼았다. 훗날 대신들이 끊임없이 주청하여 숙의문씨에게도 사약을 내린다. 노론이면서 조선 제일의 명문가였던 풍산홍씨 가문이 그 가문의 외손자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끊없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죽임을 당하였다는 사실은 혜경궁의 친정이 사도세자의 죽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외할아버지 홍봉한만은 죽임을 면하였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면 어머니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정조의 딜레마였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왜 아들을 죽였는가? 이것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사실 사도세자는 효자였고, 글도 뛰어났으며 할아버지 효종처럼 무예를 즐기는 호탕한 사내였다. 아무리 당파싸움이 치열하다고 하지만 당파를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썼다는 영조가 왜 당파때문에 아들을 죽였는가? 영조의 성격이 괴팍하기는 했다. 재위 53년 동안 끄덕하면 양위하겠다고 나섰다. 양위하겠다고 단식을 하기도 했으니….그러다가 세자와 신하들이 엎드려 이마를  돌에 찍고 피를 철철흘리면 못이기는척 거두어들였다. 사도세자가 5살 때 왕위를 내놓겠다고 생떼를 쓰기도 했으니…… 1739년 1월 영조는 갑자기 다섯살짜리 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비망기를 내렸고, 1740년 5월 돌아간 숙종의 영정 앞 마당에 앉아 비를 맞으며 흙탕물을 뒤집어 쓰고 눈물을  쏟으며 여섯살의 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83살까지 살았고 31살에 왕이 되었으며 52년간이나 왕위에 있던 그는 백성을 생각하는 인정많은 왕이었지만 성격은 정말 괴팍한 왕이었다. 왕이 그만두겠다고 나서면 세자와 신하는 눈물로 용서를 빌며 그저 죽여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도리밖에 없지않은가! 영조가 여러번에 걸쳐 대리청정이나 양위소동을 벌인것은(결국 죽어서 양위했는데도 불구하고) 경종을 독살했다는 콤풀렉스에서 벗어나려했던 것이다. 영조자신은 결코 왕위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했다. 그것으로 경종 독살설을 지우려 했던 것이다.

 

각설하고

장희빈을 죽음으로 몰고간 노론에게 장희빈의 아들 경종의 즉위는 큰 부담이었다. 노론은 세자가 가슴속에 증오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희빈을 지지했던 소론과 남인이 즉위한 세자를 부추긴다면 조정에 피바람이 불것은 불문가지였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했으나 노론에게는 다행으로 경종은 심신이 약했다. 어린 나이에 목도한 생모의 비참한 죽음은 그의 심신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세자 시절 경종은 아버지와 노론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 것으로 처세했다. 노론은 경종이 몸이 약하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왕의 동생 연잉군(훗날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하는 대책을 내놓았다. 경종이 즉위한지 1년만에 경종의 나이 33세의 청춘이니 얼마든지 생산이 가능한 나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노론은 노론편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해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른바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은 그 자체가 역모였다. 그 상소도 반대당인 소론이 퇴근하고 난 저녁시간에 올렸다. 노론의 반격에 심약한 경종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을 것을 윤허하였다.

  

영조는 두가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어머니가 천한 출신이라는 것과 경종을 독살했다는 독살설에 대한 콤플렉스였다. 실제로 영조는 의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종이 임종직전에 게장과 감을 먹였다. 경종은 그것을 먹고 그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는 궁녀의 수발을 드는 무수리였다. 그런 최씨가 노론의 지지를 받게 된것은 아주 사소한 이유 즉 최씨가 서인가의 여인인 인현왕후 궁 소속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또 장희빈은 새로이 숙종의 총애를 받게된 최씨를 핍박하였고 이 때문에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는 자연스럽게 노론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노론이 자신들의 권력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것을 밀어부쳤으니 영조는 노론에게 신세를 진것이다.  조선의 종법과 상속은 형제상속이 아니었다. 종손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양자를 들여 후사를 잇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야 종통의 제례를 올릴수 있는 것이었다. 이 경우 종통은 종손의 동생이 아닌 새로 들인 양자에 있었다. 노론은 이것을 무시하고 노론과 사이가 좋은 경종의 여섯살 아래 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밀고, 임금을 시켜주겠다는 노론의 밀사  서덕수와 김복택을 연잉군에게 보냈으며 연잉군은 이 제의를 뿌리치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에 소론이 눈물을 흘리며 반발했고 후일 연잉군에게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을 주청한 노론의 4영수를 탄핵하였다. 왕세제책봉과 대리청정과정에서 경종을 협박했다는 이유로 노론의 우두머리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은 사형을 당했다. 이것이 임인년에 발생했다고 하여 임인옥사라고 한다. 임인옥사로 영조는 노론에게 갚기 어려운 발목을 잡히게된다. 그래서 영조는 탕평책이라고는 하지만 노론을 중시하는 탕평책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론을 탄압하고 숙청하고 사형시키는 과정에서 소론을 옹호하고 나선 사도세자와 갈등을 빚었다. 이것이 아들을 죽이게 된 연유이다. 아! 비운이 사도세자……권력이 뭐길래 영조는 자식을 죽이고 혜경궁은 남편을 죽이는가! 홍봉한은 사위를 죽이는가! 또 홍봉한을 필두로 하는 홍봉한은 외손자의 왕위 등극을 방해하고 외손자가 왕이 된 뒤에도 3번이나 정조를 죽일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노론이 승부수를 띄운 유명한 사건이 나경언의 고변이라는 것이 있다. 

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홍계희, 김상로, 윤급 등의 노론 중진은 노론 윤급의 종으로 알려진 나경언을 내세워 15세부터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사도세자를 역모로 모함하였다. 

나경언이 고변하던 영조38년(1762년 5월22일) 영조실록을 살펴보면

나경언이 글을 올려 사도세자가 영조를 독살할 모의를 한다고 형조참의 이해중이 영의정 홍봉한에게 달려가 고하고 임금이 놀라 이해중의 입시를 명하고 영조가 글을 읽었다. 나경원의 고변서는 영조와 홍봉한 홍계희만 읽고 그자리에서 불태워버렸다. 여기서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장인이고 이해중은 혜경궁 홍씨의 외삼촌이다. 그런데 양반도 아닌 일개 중인 서민의 고변이 있을 때 이해중과 홍봉한의 행동에 강한 의구심이 간다. 세자에 대한 고변은 진위파악이 최우선인데도 불구하고 형조참의 이해중은 직속상관인 형조참판이나 형조판서에게 보고하지 않고 매형인 영의정 홍봉한을 먼저찾았다. 홍봉한은 즉시 영종에게 보고했다 분명히 사전에 어떤 교감이 있었던 것이다. 결정적인 의구심을 들게하는것은 이 때는 세자가 대리청정한지 1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연히 세자에게 먼저 보고하는것이 순서였다. 하지만 이들은 세자를 제쳐놓고 직접 영조에게 보고했다. 결국 사도세자를 위험에 빠트린것은 홍봉한과 이해중이었다.

영조의 행동도 이상했다. 영조가 나경원을 친국할 때 나경원은 아주 구체적인 세자의 잘못을 적은 고변서를 옷솔기에서 다시 내놓았다. 내용은 세자가 영조를 독살하려한다는 것이었는데

이 때 친국장에 들어오는 나경원의 몸을 수색하지도 않은 죄를 물어야한다고 의금부도사 금오랑의 처벌을 주장한 판의금 한익모를 영조는 처벌을 명하였다.  당연한 지적이었는데도 영조는 이상하게 한익모를 처벌하였다. 

한익모의 말대로 이해중과 홍봉한은 기초적인 몸수색도 없이 나경언을 친국장에 들여왔다. 나경언이 칼을 품고 들어왔을 수도 있는 순간이었는데도 영조의 행동은 이상했다.  판의금부사 한익모 등이 나경언이 흉악한 말을 지어내어 임금을 속이고 세자를 핍박하게 만들었으니 엄하게 다스리라고 간하자 한익모를 파직시켰고 사서 임성이 이런 흉악한 말을 일개 중인의 스스로 한것이 아니고 배후가 있을 것이니 배후를 조사하자는 사서 임성의 요청에도 영조는 화를 벌컥 냈다. 대사간 이ㅣ심원이 한익모를 두둔하자 그도 파직시켰다.  영조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보다는 나경언의 고변을 사실로 받다들이는데 급급하였다. 고변의 핵심은 사도세자가 정변을 일으키려한다는 것이었다. 대신도 양반도 아닌 일개 남의 집 청지기 나경언이 세자를 상대로 논박할 수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영조는 애써 무시했다. 남의집 청지기기 세자를 상대로 싸움을 걸 정도라면 상당한 배후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영조는 무시한 것이다. 배후의 불순한 의도는 의심하지 않고 오직 세자의 변란만 의심했다.  

 

혜경궁 홍씨가 남편이 뒤주에 들어가던 운명의 그날 영조38년 윤5월13일 한중록에 실린 기록을 보자

영조께서 사도세자를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더라 사도세자는 피하지않고 내가 학질을 앓고 있으니 세손(정조)의 휘항(방한모)를 가져오라 하시더라. 내가 그 방한모는 작으니 당신 방한모를 쓰시라고 하여 가져다 드렸더니 뜻밖에 하시는 말씀이 자네가 참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세손 방한모를 내게 안씌우려는 그 심술을 내가 알겠네 하셨다. 한중록의 이 기술에서 알수 있는 것은 사도세자와 혜경궁은 영조의 부름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뜻한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자를 부르자 혜경궁은 세손에게가서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지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말했다. 이는 혜경궁이 사도세자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세자가 세손의 휘황을 요청한것은 그가 정신병자여서가 아니라 세손이 휘황을 써서 아버지에게 정신병과 학질을 앓는 중환자로 보이려고 했던 것인데 혜경궁은 그것마저 가로맊은 것이다. 세자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간 나경언 사건을 확대한 인물이 바로 혜경궁의 친정아버지 영의정 홍봉한과 혜경궁의 외삼촌 이해중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혜경궁도 알고 있었고 말리지않 았으며 오히려 세손의 방한모도 쓰지 못하게 했다.

 

세자는 궁지에 몰리자 마지막으로 효장세빈의 오빠 조재호를 불렀다. 이와 관련하여  한중록에 자세히 나온다.

세자는 처소에 지하실을 파고 세칸을 짓더니 지하실에 무기와 말을 감추었다. 세자는 위기를 느끼고 자신을 압박하는 노론을 제거할 결심을 했던 것이다. 군사정변을 일으켜 영조와 노론을 모두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영조가 명을 다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조는 7순을 앞둔 노환에 시달리는 노인이었다. 병환에 시달리는 영조가 죽고 세자가 즉위하면 사도세자가 소론, 남인등과 손을 잡고 노론에 칼을 들이댈것이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세자를 제거할 노론의 마지막 승부수가 나경언의 고변이었던 셈이다. 세자는 영조가 죽기를 기다렸고 노론도 영조가 죽으면 세자를 죽이려 계획하고 있었다. 이를 대비해 사도세자는 땅속에 집을 짓고 무기를 감추어 놓고 소론 영수 조재호와 관계를 맺는 자구책을 마련했던 것이다. 세자는 궁지에서 조재호를 불렀다. 조재호는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에 올랐으나 노론이 독주하는 조정에 불만을 갖고 사직하였다. 춘천에 은거하면서 노론에 포위된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세력을 모았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세자를 보호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한다. 노론이 중심이 된 나경언의 고변이 있고 세자가 무릎을 꿇고 대명한지 이틀 후인 5월24일 영조는 홍화문에 나가 시장 상인들을 불러 세자가 꾸어간 돈을 갚아주었다고 영조실록에 나온다. 이 돈이 세자가 유희, 또는 측근 인사들에게 상을 주느라 쓴 돈이라고 실록에 나오지만 실은 세자의 군사비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조재호는 춘천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사도세자는 세자 거처의 지하실에 무기고를 마련한 것이다. 결국 이 자구책이 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이유가 되었다.  

 

아! 팔아프다! 타자 더 못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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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된 우리집 마당 새로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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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았다!

큰아이가 2월말에 귀국한 이래 집안에 분란이 생겼다.

큰아들의 눈에 보기에 우리집 환경이 너무 지저분하다는 것이다. 하긴 건축한지 43년된 집이니….43년 동안 이사가지 않고 여기서 살았다.

나도 평소에 그런 생각을 했으나 90세가 되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어서 간섭하지 못했다.

하나 아들은 달랐다.  영국런던과 뉴욕맨하탄의 빌딩숲에서 근무하다 온 아들의 눈에

우리집 마당에 얼기설기 지어놓은 개집과 마당의 구조물 등은 팔레스타인 난민촌으로 보였다.

 

아버지는 1924년 생으로 기미독립 운동이후 일제의 무단통치하에서 어린 시기를 보내셨고  6.25 북한의 남침전쟁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신 분이다.

말해무엇하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2차대전에 일본군으로 참전하셨고 6.25 북한의 남침전쟁 때는 군에갈 나이가 지났는데도 전쟁터에서 국군에 강제 입대되어 

 6.25북한남침전쟁에 국군으로 참전한 용사이시다.

그 할아버지는 소일거리로 마당에 농사를 지으신다. 이게 손자의 눈에 못마땅하게 보인것이다.

 

할아버지의  터전을 놓고 손자와 할아버지가 대결하였다.

내가 중간에서 중재하느라 애를 썼지만 아들이 물러서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서로 감정을 많이 다쳤다.

나는 두사람간을 조율하면서 집 수리공사를 진행하였고

결과는 어느정도 아름다운 집으로 바뀌었다.

사실 아들의 잘못은 없다. 즉 손자의 잘못은 없다. 손자가 집을 부신것도 아니고 손자가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집이 날라가게 된것도 아니다.

손자는 그저 집을 아름답게 꾸미자고 한것인데 말씀드리는 방식이 우격다짐이었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그러나 집은 아주 아름다워졌다. 동네 사람 모두가 예쁘다고 난리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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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큰 아들의 주장으로 마당을 크게 수리하였다.

할아버지가 농사짓는 부분과 통로 및 차고를 분리하는 흰색 펜스를 설치하였다.

흰색으로 페인트를 칠하고 보니 보기에 아주 깔끔하였다. 마당에 칸나와 백합을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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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아파트로 바꿔치기 하여 돈을 벌었어야지 너무 주택에 오래 살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다. 43년동안 이 집에서 살았으니 내 인생의 모든 추억이 이 집에 서려있다.

나는 이 집에서 결혼을 했고,  제주도로 신혼여행 다녀와서 부모님께 인사를 올린 집도 여기며

아내가 산기가 있어 병원으로 달려갈  때도 이 집에서 였다. 큰 아들이 말벌에 쏘였다고 학교에 울면서 전화한것도 이 집이며

 두 아들이 넘어지고 무릎이 깨져가면서 자전거를 배운 것도 이 집 곡목에서 였다.

나는 이 집을 사랑하며 이 집의 골목도 사랑한다.

아파트가 뭐 대수냐?  별거냐? 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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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사가 수구꼴통이라고?

그동안 보려고 해도 왠일인지 손에 잡지 못했던 삼국유사를 읽었다.

읽으면서 왜 사람들이 삼국유사를 꼭 읽으라고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서양에 그리스로마 신화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삼국유사가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우리문화의 중요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존감을 가질 수 있었다.

원전은 한문이어서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고 [불국정토의 입장에서 본 삼국유사도 읽기 어려웠다.

하여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를 읽었는데 360쪽의 해설을 곁들인 장편이었다. 해설까지 있어 읽기 좋았다.

다만 일부에서 저자의 편협한 해설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신라 박제상에 대한 부분이다.

신라 눌지왕 10년(426년)에 왕이 잔치를 베풀고 있던 중 눈물을 흘리며 신하들에게 왜놈들에게 볼모로 끌려간 아우 미해와 고구려에 끌려간 아우 보해를 구해오라고 하였다.

이에 만고충신 박제상이 나선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들어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보해를 구해온다. 눌지왕은 보해를 보자 일본에 끌려간 미해 생각에 더욱 슬피운다.

이를 보고 박제상은 두 번 절하고 집에도 들리지 않고 길을 떠나 율포바닷가에 이르렀다. 제상의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으나 박제상을 실은 배는 떠났다.

일본에 가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미해를 탈출시킨다.

미해가 함께 가자고 했으나 같이 떠난다면 왜놈들이 알고 쫒아올 것입니다. 신은 이곳에 남아 추격을 막겠습니다. 미해가 어찌 나혼자만 간단말이요 라고 말하자

박제상은 신이 공의 목숨을 구하여 눌지대왕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미해가 완전히 탈출한 뒤 왜왕에게 잡혀간 박제상에게 왜왕이 네가 왜국의 신하가 된다면 녹을 후히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박제상은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 지언정 왜국의 벼슬은 받지 않을 것이요!

왜왕이 노하여 박제상의 발바닥 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서 그 위를 걷게 하였다.

왜왕이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의 신하인가? 나는 계림의 신하요! 왜왕이 쇠를 달구어 그 위에 박제상을 세워놓고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의 신하인가? 나는 계림의 신하요! 왜왕이 박제상을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불에 태워죽였다.

 

이대목에서 저자 김봉주는 박제상을 다음과 같이 폄하하고 있다. 박제상이 두 왕자를 탈출시킨 이후 신라와 왜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엄밀히 보면 박제상은 전쟁을 막는데 공헌한것도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는데 공헌한 것도 아니며 단순히 왕 개인에게 혈육을 찾아준것에 불과하다.

사회전체에 공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박제상은 신라이후 어느 왕조에서나 충신으로 강조되었지만 사실 그는 지배자의 입맛에만 맞는 사람이다.

전제왕조의 입장에서는 가장 내세우고싶은 사람이겠지만 피지배자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왕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국가 전체적으로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왔다면 그를 위인으로 부르고 존경하는 것은 망설여진다.

 

저자의 이런 대목이 나를 실망시켰다. 과연 이것이 글쟁이가 할 말인지 의심스럽다. 역사적 안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당장의 백성 안위만 중요한가? 민족의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 저런 정신이 있었기에 군왕에 대한 충성이 이어졌고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를 지키려는 민초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힘을 보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의병들이 증명하고 있다. 대저 나라를 잃은 백성이 얼마나 핍박을 받았는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보면 당잘 알수 있다.

그리고 임금 개인을 위한 충성이지 백성들에게는 고생만 시켰다고 하는데

1500년 전의 사실을 지금의 윤리적 잣대로 재서 해석하는 것이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의 책임있는 글발인지 묻고 싶다.

아주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박제상을 파견했으니 이는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말하지 그랬나?

 

박제상은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만고의 충신이다. 신라에 박제상이 있다면 조선 병자호란 때의 김상헌이 있다.

김상헌은 심양에 끌려가 청태종이 수시로 감옥에서 불러내 나의 신하가 되면 풀어주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고 꼬였지만

그 때마다 김상헌은 더러운 소리 듣기 싫다. 어서 빨리 내목을 쳐라라고 결기를 보였다.

지금생각해도 보석처럼 빛나는 나라사랑의 정신이다. 이와 같은 결기가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정신적 지주로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당장은 백성을 힘들게 하는 것 같지만 그런 정신을 보고 만백성이 애국의 불씨를 피우는 것이다.

당시에는 성리학적 전통으로 임금에 대한 충성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국가와 민족을 빛내는 정신으로 보아야한다.

역사에서 비굴함만 가지고 살아남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강인함과 비굴함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민족의 물결과 역사는 도도히 흘러가는 것이다.

 

인터넷에 보니 다음과 같은 잡글이 있다.

3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 정말 답도 없고 세계정세 뒤떨어진 무뇌충들…….이런 주전파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고통을 당했는가!

병자호란으로 삼학사는 청나라로 끌려가게되고 청나라황제 홍타이지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주전의 대의를 끝까지 밝히다가 모두 선양성 서문 밖에서 처형당하였다.

민중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고집하던 수구꼴통들이다.

이게 말인가? 글인가?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의 저자 김봉주가 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삼국유사(三國遺事:1281)에서 유사(遺事)란 남겨진 이야기라는 뜻으로

삼국시대에 일어났던 일 중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남은 사실들을 적은 책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 기록되지 않은 일이란 1145년 고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삼국시대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서 빠진 일들을 말한다.

김부식은 유교적사대주의와 신라정통론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기록에서 누락시켰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스님은 중국에서 나라가 생겨날 때는 여러 가지 신비한 일들이 발생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삼국 시조의 신비로운 탄생과정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며 기록하였다.

유교적 합리주의에 근거해 삼국의 신령하고도 기이한 이야기를 모두 믿지못할 것으로 보고 역사에서 제외한 김부식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중국과 다를것이 무엇이냐는 저 당당한 일연스님의 이야기는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갖고 있던 자주적 역사관을 뚜렷이 보여준다.

신라는 23대 법흥왕이 처음 연호를 만들어 사용하고 진흥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까지 모두 독자적인 연호를 정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진덕여왕 4년인 650년 여름에 왕이 태평송이란 노래를 지어 당나라 황제에게 올리고 이때부터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김부식은 천자의 나라에 속한 작은 나라는 사사로이 연호를 지어쓸 수 없는 것이다.

신라는 한뜻으로 중국을 섬기고 조공을 계속하면서도 법흥왕이 스스로 연호를 썼으니 의심스럽다.

그 뒤에서 그릇된 대로 여러해가 지났으며 태종의 꾸지람을 듯고서도 오히려 주저하다가

이제 당나라의 연호를 받들어 행하니 비록 부득이하게 시작하였으나 허물을 고쳤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제5 진덕왕

 

이런 점에서 보면 삼국유사는 단순히 삼국사기에 누락된 내용을 보충하는 것을 넘어

삼국사기의 사대주의적 역사관에 이의를 제기하고 우리 역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그 결과 삼국사기의 중국 중심주의와는 구별되는 자주의식이 분명한 책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오늘날 삼국사기는 보물이고 삼국유사는 국보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삼국사기는 기원전57년 신라의 건국을 첫머리에 두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단군조선부터 시작한다. 여기서도 일연스님의 자주적 태도를 볼 수 있다.

고려 충렬왕 13년(1287)에 이승휴(1224∼1300)가 쓴 역사시(歷史詩)에도 단군신화가 나와있지만

단군신화를 처음 언급한 책이 바로 삼국유사이다.

이런 점에서 삼국유사는 얼마나 소중하고 다행스러운 기록인지 알 수 있다.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단군신화는 없었다.

 

 

 

<참고자료>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7년(1281)경에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사서(史書)이며 목판본이다. 국보 306호로 지정되어있다.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과는 별도로 왕력(王歷)·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서술하였다.

흥법편은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내용, 탑상편은 탑과 불상에 관한 내용, 의해편은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한 내용,

신주편은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神異僧)들에 대한 내용, 감통편은 신앙의 영이감응(靈異感應)에 관한 내용,

피은편은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효선편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등을 각각 수록하였다.

 

삼국유사는 한국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보고로 평가되고 있다.

그 특징을 보면 첫째, 역사·불교·설화 등에 관한 서적과 문집류, 고기(古記)·사지(寺誌)·비갈(碑喝) 등

지금은 전하지 않는 문헌들이 많이 인용되었기에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둘째, 차자표기(借字表記)로 된 자료인 향가, 서기체(誓記體)의 기록, 이두로 된 비문류, 전적에 전하는 지명 및 인명의 표기 등은 한국고대어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되며

14수의 향가는 우리나라 고대문학연구의 값진 자료이다. 세째, 한국고대미술의 주류인 불교미술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이다.

기사는 탑·불상·사원건축 등에 그리고 역사고고학의 대상이 되는 유물·유적, 특히 불교의 유물·유적을 조사·연구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문헌으로 꼽힌다.

네째, 풍류도(風流道)를 수행하던 화랑과 낭도들에 관한 자료를 상당히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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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일연이 쓴 삼국유사 국보306호 이다. 원전은 위와같이 한문으로 쓰여져 내가 읽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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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교수가 쓴 불국정토을 이루었던 삼국유사를 샀는데 역시 읽기 어려웠다. 아니 재미가 없었다. 

하여 학교 도서실에서 해설을 곁들인 고등학교 교사 김봉주가 쓴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를 읽었다. 

김봉주선생님은 나름대로 좋은 책을 썼다. 하나 몇군데는 내가 찬성하기 어려운 해설을 덧붙여 놓아 동의하기 어려웠고

학생들의 나라사랑의 건전한 가치관 정립에 해가 되는 내용이 있었다. 

  

수원역로터리에 있는 커피숍 파스쿠치에서 읽었다. ^-^

까페라테를 시켰는데 칼로리가 많아보였다. 다음에는 먹던대로 아메리카노를 시켜야겠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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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제목

주일 예배 시간에 기도제목을 작성하였다.

대부분 주변 사람을 위한 기도이며 나 자신의 신앙(self belief)을 위한 기도를 마지막으로 정하였다.

나중에 주보를 보고 목사님이 편찮으신 것을 알았다. 김정기 담임목사님을 위한 기도를 추가하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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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도전의식을 길러요!

  

      

 

 

사랑하는 상촌중학교 학생여러분!
기말고사 끝나고 방학을 앞둔 시점에 교내예능경연대회를 열었습니다.
음악, 미술, 무용 등의 분야에서 열리며
음악도 여러 분야로 세분화하였습니다.
국악과 양악으로 나누고, 기악도 피아노, 관악, 현악 등으로 나누어 경연하게 됩니다. 작곡분야도 개설하였습니다!
 
교과서의 문화는 고급이며 클래식한 문화입니다.
그러나 학교 밖의 현실은 다릅니다. 교문을 나서면 학교에서 배운 고급문화는 없고
즐비하게 늘어선 상가에서는 교과서 문화와는 다른  거리문화가 펼쳐있고
가정의 거실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문화는 방송사마다 비슷비슷한 프로그램이
비슷한 사람들에 의해 저급하게 펼쳐집니다. 상업주의에 물든 방송은 문화적 자존심도 버렸습니다.
 
학교는 이제 고급문화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학교에서는 그럴수록 고급문화를 배워야합니다.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음악, 미술, 체육 등의 모든 문화는 인문적 교양이며
학교 교육의 궁극적 목표인 인격의 완성이 이같은 광범위한 인문적 교양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상촌중학교 무대에 오르는 연주와 공연 그리고 미술실기대회 등은 모두 클래식한 고급문화입니다.
경연대회에 수상한 우수 작품은 모두 복도에 게시하여 감상하게 될 것입니다.  ^-^
 
학교복도에 세계적인 명화를 게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학생들은 자신은 그림을 그리면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 완벽한 작품한 세계적인 작품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학교 복도에는 교내 미술대회 수상작을 게시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수상한 작품을 보고 많은 학생들이 나도 열심히 하면 저만큼 할 수 있고 그래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를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불타는 도전 의식을 키우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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