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사 2인 분


오늘 아침 어머니와 함께하는 아침 식사이다.

여러가지를 생각하여 아침은 우유를 곁들인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다.

1. 우유 1잔

2. 사과

3. 바나나

4. 호두과자

5. 삶은 고구마

6. 홍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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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10.16.


오늘 아내 임송순의 생일이다.

우선 아내를 낳아주신 장모님께 감사한 마음을 드린다.

장모님 수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임송순의 생일을 축하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어머니가 미역국을 준비하는게 어떠냐고 물으셨다.

물론 잠이 많은  아내는 취침 중이다.

평소 아침에 빵을 먹는 아내여서 내가 아침 먹자고 8:00에 깨우니 당연히 평소처럼 빵을 먹겠다고 한다.

내가 당신 생일이라 어머니가 지금 부엌에서 미역국을 끓이고 있다고 하니 아랫층으로 내려왔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며느리와 아침을 먹는다고 좋아하셨다.

그리고 옛날에는 쌀밥이 귀해서 생일날을 기다렸단다. 평소에 보리밥을 먹다가 생일에 쌀밥을 먹으니 좋았다고 하신다.

나도 매일 잡곡밥을 먹다가 오늘 오랜만에 쌀밥을 먹으니 어쩐지 맛이 있고 기분이 좋다.

미역국도 다른 것을 섞지 않고 깔끔하고 담백하게 끓이셨는데 아주 시원하고 좋았다. 임연수를 튀겨서 함께 먹었다.

행복하고 감사한 아침이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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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

요즈음 집에서 지내다 보니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다.

하루 3끼 중에서 한끼는 어머니와 외식을 하려하는데 매일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내가 밖에서 문인들과 약속이 있는 날이 있고 또 다른 모임도 있는 날이 있어서이다.

그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어머니와 외식을 자주한다.


어제는 매탄동에 있는 음식점에 갔다.

제육볶음, 고등어구이, 미역국, 계란찜이 나왔는데

어머니가 맛있다고 하셨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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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시장

성당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오다가 내가 밴댕이가 먹고 싶어 어머니와 수산시장에 갔다.

나는 밴댕이를 좋아한다. 고추장 발라서 구어먹는 것을 제일 좋아하고 기름두르고 튀기는 것도

조리가 간단하여 좋아한다.  어머니가 아프신 뒤로 이런 나들이는 아주 드물다. 정말 오랜만에 수산시장에 왔다고 말씀하셨다.

갈치 2만원, 냉동 밴댕이 1만원, 자연산 생굴 1만2천원 합계 4만2천원 어치를 샀다.

나는 날 생선을 잘 먹지 않는데 어머니가 생굴을 드시고 싶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드시고 싶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그 말씀이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다.

양식굴이 크고 먹음직 스러웠는데 어머니가 드시겠다고 하니 당연히 자연산을 샀다. 자연산은 알이 작고 더 비쌌다.

갑자기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과거 정정하던 시절 생굴을 동치미에 말아 드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집에 와서 어머니는 생굴 물회로 점심을 드셨고 밴댕이는 1마리만 드셨다.

나는 생굴은 먹지 않고 밴댕이만 10마리 먹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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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서 생굴을 초장에 섞는 물회로 만들어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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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댕이는 내가 요리하였다.

요리래야 기름 두르고 튀기는 것이다.

오랜만에 먹어도 역시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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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ir


퇴직한 뒤 3개월간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내가 원래 이발소 가기를 싫어하고 우리 동네 이발사하고 껄끄러운 관계가 되었다.

어느날 어머니가 동네 이발소 노총각이 몸이 아파서 오랫동안 문을 닫았는데

문을 다시 열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아범도 그집에 가서 머리를 깍아주면 도움이 될것이라고 하셔서

그것도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그집에 가서 의자에 앉으면서

그동안 어디 아프셨다면서요? 하여 내가 일부러 다른 집을 제치고 왔습니다. 라고 말했더니

그런 동정은 필요없습니다! 라면서 동네 사람들이 자기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면서 불쾌한 심경을 나타냈다.

40이 넘은 나이에 혼자 살다보니 무언가 피해의식을 갖게 되었나 보다. 커다란 면도칼을 들고 일하는데 불안감 마저 들었다.


나는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한테 어떤 말을 해보았자 말이 씨가 되어 더 나쁜 감정만 갖게 될것이다.

그 후로 그 이발소를 가지 않는다. 마장원에 사내가 드나드는 것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가지 않는다.

자연스레 이발소 가는 일을 게을리하고 마침 젊은 날 장발로 지내던 시절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어 3개월간 이발을 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예술가 다운 머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아마도 좋게 덕담을 하는 것이리라.

대놓고 보기 좋지 않으니 자르라고 말하는 사람은 2명이다. 어머니와, 지승환교장 부인이 보기에 좋지 않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보다 숫도 많이 줄어서 그 때의 장발로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나는 이발소 가기도 싫고 하여 그냥 기르고 있다.



내가 29살 제주도에 신혼여행 갔을 때 용두암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장발이 유행하여 장발로 혼인식을 치루었고

그 머리로 신혼여행을 갔다. 전혀 보정하지 않은 얼굴 사진이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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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담그기


금년에 김장을 제대로 해보았다.

어머니와 아내와 함께 절임배추를 사는 과정에서 부터 처음부터 내가 개입하여 김장을 했다.

어머니와 함께 농협하나로마트에 가서

생강, 쪽파, 대파, 청갓, 홍갓, 무우, 까나리액젖을 샀고 집사람과 함께 역시 하나로마트에 가서 절임배추를 샀다.

사실 어떻게 보면 내가 주도적으로 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할 정도로 열심히 김장을 했다.

20포기 40KG을 했으니 잘 하면 향후 1년은 김치를 별도로 만들지 않고도 지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013년 12월 2일부터 7일까지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8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에서

‘김장, 한국의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 in the Republic of Korea)’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대표적인 식문화인 ‘김장문화’가

전 세계인이 함께 보호하고 전승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채소 절임 음식은 다른 문화권에도 많지만

김장처럼 겨울이 다가오기 직전에 전 국민 약속이라도 한 듯

집중적으로 음식을 만들어 저장해두는 풍속은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김장문화에는 단지 음식의 장만뿐만 아니라

공동체 아이덴티티의 나눔이라는 상징적 정서가 숨어 있다.

김치 냉장고도 새로 장만하고 아주 의욕적으로 배추김치를 만들어

6일 동안 저온숙성모드에 넣었다. 맛있어야 될텐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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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갔다


수원문인협회 부회장 신금자씨가 세상을 버렸다.

1959년 생이니 59살이다.

한 남자의 아내이며 남매를 두었다. 얼굴이 희고 이가 빛나는 사람이었다.

중학교 국어교사를 하는 딸을 두었으며 사위가 삼성병원 의사인데 자랑 한 번 하지 않았다. 아들은 아직 미혼이다.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친절했고 식사 후에는 돈을 먼저 내려했다.

축의금 10만원을 대신 내주었는데 몇 번 만나고 나서도 내가 잊고 갚질 않았는데 미안하다고 전화했더니

안줘도 좋다고 말했다. 후에 값았지만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었다.

그렇치만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다. 토론 중에 문학적 이론이 충돌할 때는 물러서지 않았다.

수원문학의 의사 결정에도 자기 목소리를 냈으며 특히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갔으니 수원문협에서 누가 바른 말을 할 것인가?


수원문인협회 박병두 회장이 고향 해남에서 문학상을 받는다고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회원들이 다녀왔는데

나에게도 박회장이 전화해서 함께 가자고 하는 것을 다른 약속이 있어서 나는 가지 않았다.

박회장 시상식을 보고 올라오는 관광버스 안에서신금자 부회장이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며 쓰러졌는데

그대로 절명했다고 옆에서 본 양승본 교장님이 전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정말 슬픈 일이다.  어쩌면 이렇게 일찍 떠나는지 너무나 안타깝다.

신금자씨는 문학적으로도 두터운 책을 여러권 냈다.

“나는꽃이 아니다” 라는 책 에서는 페미니스트 적인 냄새가 풍기고 실제로 내용도 영웅적인 삶을 산 세계사적 여인들의 이야기지만

실상 본인은 페미니스트 적인 내색을 하지 않고 아주 여성적인 사람이었으며 단상에 오르는 것을 매우 어려워했고수줍어 했다.

사진을 찾아보니 매탄고등학교에도 왔었고 내 퇴임식에도 왔었다. 아까운 사람이 너무 일찍 갔다.

내가 관을 들 나이가 지났는데 사람이 없다하여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와 영결식에 참석하고 관을 들었다.

그가 가는 길에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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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배


이근배 시인을 만났다.

경기문학포럼에서 특강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오셨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이다.

특강 내용은 모국어를 사랑하라는 주제였다. 한글사랑을 포함한 모국어 사랑이었다.

만 77세의 노인인데 목소리에 기백이 넘쳐 흘렀다. 기운이 부러웠다. 그 분의 시를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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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낭패가 있나!

손가락의 V자도 윗 분과 사진에서 마땅하지 않고 거기에 눈까지 감았구나! 이런…..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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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行과 맹씨 집안의 돌림자(항열行列)


오행(五行)이란 동양철학에서 우주 만물의 변화양상을 5가지로 압축해서 설명하는 이론으로

5행이라는 것은 인간 사회의 다섯 개 원소로 생각된 (木)·(火)·(土)·(金)·(水)의 운행변전(運行變轉)을 말한다.

행(行)이라는 것은 운행의 뜻이다.


집안의 항열( 行列 : 여기서는 행을 항으로 읽는다)도 오행과 연관하여 정하였다.

할아버지 항열은 燮, 아버지 항열은 在, 나는 鎬, 아들은 永, 손자는 柱자로 정했는데  그 과정에 오행이 있다.

금, 수, 목, 화, 토로 이어지는데  금생수, 수생목,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를 일컷는다.


맹순燮 : 목생화니 燮자로 하였다. 燮자에 火자가 있다.

맹석在 : 화생토니 在로 하였다. 在자에 土가 있다.

맹기鎬 : 토생금이니  鎬자로 하였다. 鎬자에 金이 있다.

맹인永 : 금생수니 永자로 하였다. 永자에 水가 있다.

맹형 柱: 수생목이니 柱자로 하였다. 柱자에 木이 있다.


세월이 더 많이 가면 제대로 지켜질지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으나

물질문화가 아닌 정신적 요소는 길게 가는 법이다.

특히 맹씨는 본이 하나이니 어디가서 같은 맹씨를 만날 때

돌림자(항열)를 알면 세대를 알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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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선생과 그의 손자 시인 임병무

지난 주 토요일 경기문학포럼 회원들이 가을 산행을 다녀왔다.

시청 앞에서 관광버스에 올랐는데 기다리는 동안 시청 맞은편 공원에 있는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선생의 동상에 묵념을 올렸다.

임면수선생은 수원이 낳은 독립운동가이며 수원삼일중고등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였으며 만주에 세워졌던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낸 분이시다.

그의 손자는 임병무시인인데 몇 년 전부터 알고 지낸다. 나와 동갑이며 시인이기도 하여 서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

임면수선생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조국의 독립에 헌신하신 분이지만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수원시민도 잘 모른다.

나는 임면수선생의 손자 임병무와 자리를 함께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이 분이 독립운동가의 친손임을 알린다.

지난 번 화성문화재 행사에 임병무 시인이 행궁에서 시낭송을 할 때 내가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모여든 청중에게 독립운동가 임면수선생의 친손자라고 소개하였으며 임면수독립운동가가 어떤 일을 하신 분인지 간단하게 청중에게 설명도 했다.

그날 임병무시인이  매우 고마워했다. 얼굴도 할아버지를 쏙 빼 닮았다. 몇 년 전 뇌경색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여 안쓰러웠는데

지금은 많이 회복하여 걸음도 잘 걷고 말도 크게 문제가 없을 정도로 회복하였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잘 사는 그런 세상이 되어야한다. 후손이 마땅한 대우를 받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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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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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무시인이다. 내가 찍어준 사진이다>

임면수(林勉洙)의 본관은 나주, 호는 필동(必東)이다. 1874년 6월 13일 수원군 수원면 매향리에서 아버지 임진엽(林鎭曄)과 어머니 송(宋)씨 사이에 2남으로 태어났다.

 19세 때 전현석(全賢錫)과 결혼했다. 향리에서 전통교육을 받았으나 개항 이후 근대적인 신학문에 관심을 기울였다.

‘황성신문’ 1903년 11월 6일자에 ‘양잠학교’를 졸업한 기록이 있다. 이후 일어공부를 위해 ‘수원화성학교’를 졸업했다.

화성학교 학생들은 일본군에게 협력하는 자세를 보여 군용철도 감부(監部) 통역, 수원자혜병원 통역, 재판소 서기 등 일제 식민통치기구의 말단으로 활용되었지만, 임면수는 달랐다.

일어에 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상동청년학원’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수원에 남아 구국운동을, 그리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상동청년학원에서 독립운동가로 자란 임면수

상동청년학원은 1905년 상동교회에서 설립한 중등부과정의 교육기관이다. 구국운동에 헌신할 인재를 양성했다. 투철한 민족정신은 신앙교육과 함께 실시되었다.

한글보급운동, 한국사 강의, 외국어 강의, 군사훈련 및 신문화 수용과 전파, 지도자의 자기 수양(종교 훈련) 등을 가르쳤다. 한글보급운동은 주시경 중심이었다.

주시경은 1907년 7월부터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국어강습회를 열고 국문법을 교수하였다. 또한 매주 일요일 국어의 중요성과 과학성을 가르쳤다.

 

▲ 필동 임면수

‘당시 구한말, 선생은 뜻한 바 있어 수원에서 서울로 상경하였다. 상동감리교회에 설립되어 있는 청년학원에서 영어와 일어, 측량을 공부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상동청년학원은 상동교회의 담임 전덕기 목사가 설립하였다. 당시 이곳은 기독교 중견인물들과 애국자들의 총 집합소였다.

임면수는 서울에 유학하면서 교회와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강연회나 토론회니 정부탄핵 연설장이니 강습회니 빠짐없이 따라다니며 식견을 넓히고 인격 향상에도 노력하였다. 그

리하여 선생은 국가민족의 항로를 계몽하고 선도하는 지침이 오직 교육부터라는 것을 절감하고 행리로 돌아와 신교육을 개척하고자 하였다.’ 허영백이 작성한 묘비의 내용이다.

임면수 생애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상동청년학원의 수업이었다. 감리교 신자였던 그에게 상동청년학원은 큰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인이며 민족주의자였던 이동휘가 그의 민족의식 형성과 활동에 큰 감동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동휘는 경기도 강화에서 사학을 30여 차례나 설립하여 독립교육에 매진한 자다.

임면수, 수원 삼일여학교를 설립하다

1903년 스물아홉에 젊은 동지들과 함께 수원 삼일여학교를 설립하였다. 함께 한 이는 이상의, 최익환, 홍건표, 차유순, 김제구 등이다.

 삼일여학교는 교육내실화를 도모하는 한편 군사훈련에 버금가는 병식체조와 행군으로 상무정신을 고취시켰다. 초기에 수업을 담당하기도 했던 임면수는 교감직을 담당하였다. 이후 교장까지 오른다.

특히 여성교육을 위해 집터와 토지 과수원을 삼일여학교(현 매향여중고) 부지로 희사하였다. 만주 망명길에 오르면서 전 재산을 내 놓은 것.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었다.

‘수원부 내 삼일학교 교장 임면수씨는 본래 덕망과 재능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온 바이어니와 수년전부터 교육계에 전심전력하여 학교를 여러 곳에 설립하고 일일확장 한다 하니

유지인사의 대 모범이 되리라고 물불칭송 한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1월 9일자 <학계헌신>이라는 제목의 기사다.

 

▲ 1907년 삼일학교 졸업장 교감 임면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된 1907년. 서울에서는 안창호 양기탁 이희영 등을 중심으로 ‘신민회’라는 비밀 결사단체가 조직되었다.

신민회는 1909년 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의 멸망이 거의 확실시되자 국내에서의 민족 운동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동녕, 주진수, 안태국, 김구 등이 참석한 가운데 비밀 간부 회의를 개최하고 해외에 독립 기지를 건설할 것과 군관 학교를 설치하기로 한다.

만주 서간도 한 지점에 동지들을 이주시키고, 무관학교를 설립해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의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임면수는 애통한 나머지 비밀히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의 구국운동 결의에 따라 극비리에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1912년 2월 봉천성 환인현 횡도천으로의 망명이었다. 먼저 도착한 이희영 등은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자치기관 ‘경학사’를 만들었고, 농가 두 칸을 빌려 ‘신흥강습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추가가는 독립운동 기지로서 적당하지 못했다. 교통이 편리하여 사람과 말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반면에 통화현 합니하는 동남쪽으로는 고뢰산이 삼십 리 거리에 있고, 북쪽으로는 청하자의 심산유곡이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폐가동의 장산밀림이 펼쳐져 있는 준엄한 곳이었다. 합니하로 이전하기로 하고 신흥강습소 교직원 및 학생들의 노력 봉사가 시작되었다.

향림 초원에 수만 평의 연병장과 수십 간의 내무실 내부 공사가 전부 생도들 손으로 이루어졌다. 1913년 5월 낙성식을 갖고, ‘신흥중학’으로 개칭하며 새 면모를 갖추었다.

혁명투사의 아내 전현석은 독립의 어머니로 불렸다. 하루 다서 여섯 차례씩 밥을 짓고, 각인각색의 보따리와 총기를 맡으며 챙겨주어야 하는 고역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장남 우상(宇相)도 만주에서 20세에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1919년 국내에 잠입하여 김세환 등과 군자금을 마련하고 만주로의 귀행 길에 동상을 입어 사망했다. 자식을 가슴에 묻었다.

비밀결사대원 임필동으로 활동했던 임면수

만주지역 활동에서 임면수에 대한 기록은 거의 임필동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불령단관계잡건 재만주부 1914년 12월 28일 <불령자처분> 자료의 별첨 자료 <서간도재주 불령선인조사>에 보면 총 54명 중 임필동이 있다.

 54명 대부분은 통화현에 거주하는 신흥학교 관련 학자 및 교사들이고, 객주업에 종사하는 인물이 4명이다. 그 중 유일하게 ‘객주로서 유지자’라고 표현되고 있는 이가 바로 임필동이다.

 

▲ 1990년 임면수 선생 현충원에 안장되다

독립운동가로서 여관업에 종사하였음은 일본 측 정보기록에도 나타나고 있다. ‘일찍이 통화현 동관대가(東關大街) 거주의 여관영업자,

경기도 수원부생 임필동(林必東)은 이러한 종류의 무리’라고 결사대 주 대원으로 지목하고 있다.

불량단관계잡건 재만주부 1916년 9월 9일자 재안동영사가 일본외무대신에게 보낸 <재만조선인비밀결사취조의 건에 대한 회답>에도 ‘당지(통화현)의 배일자 중 유력자인 결사대원 임필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당시 통화현 지역의 유력 항일운동가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910년대 중반, 만주 통화현 합니하에 설립된 민족학교 ‘양성중학교’ 교장이 되었다. 양성중학교는 합니하 남구 사차에 위치하고 있었다.

합니하의 경우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어 민족교육의 산실로서 항일운동의 요람이었다. 양성중학교는 ‘제2의 신흥무관학교’라고 할 수 있었다. 수원 삼일학교 교장 경험이 주효했다.

3.1운동이후 만주지역에는 수많은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일본군은 1920년 간도로 출병하여 만주지역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임면수도 해룡현 북산성자에서 체포되어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 지역의 일본경찰관 및 친일 조선인 등을 암살하고, 아편 밀수입 이익을 상해임시정부에 송금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이에 철령으로 압송되어 가던 중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1921년 2월, 길림시내에 잠입하여 활동 중 결국 밀정의 고발로 길림영사관에 체포되었다.

3년간의 추방령과 더불어 평양감옥에 압송되었다. 고문으로 전신이 마비된 후에야 석방되어 고향 수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거처할 방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1923년 삼일학교 아담스기념관 건축에 감독으로 참여했다. 삼일학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었다. 그러나 고문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30년 11월 29일 5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수원 세류동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독립운동가 임면수, 역사에 남길 기념사업회 발족

근대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임면수 선생. 세류동 공동묘지에서 삼일상고 동산으로 이장하여 안장하고 기념비를 제작한 것이 1964년이다.

1980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의 추서는 모두 독립운동에 대한 것이었다. 2009년 대전 국립묘지(현충원)로 이장하여 안장하기까지 80여 년 세월이 흘렀다.

수원에 살고 있는 손자 임병무씨는 기념 유품 모두를 수원시 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수원 출신으로서 만주에서 활동한 인물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임면수의 독립운동에 주목한다. 광복70주년,

분단 70년이 되는 2015년.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선생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통일을 꿈꾸며, 조국과 이웃을 생각하고, 후손에게 가치 있는 유산을 남기고자 범시민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후원금, 자원봉사, 재능기부로 참여할 수 있다. *

https://blog.naver.com/ims150815

 

근대 100년 동안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 필동 임면수 (1874년 6월 13일 ~ 1930년 11월 29일) 선생이시다. 2015년 수원의 8월이 펄펄 끓어오를 전망이다.

* 자료출처 :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 (Tel. 031-241-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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