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레드 호세이니 의 장편소설 [연을 쫓는 아이]를 읽었다. 558쪽의 장편소설이어서 이틀에 걸쳐 읽었다.
하루는 까페 파스쿠치에서 읽었고 어제는 선경도서관에 가서 읽었다.
할레드 호세아니는 아프카니스탄의 카불에서 태어났지만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1980년 미국에 망명했다.
의대졸업 후 캘리포니아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2003년 연을 쫓는 아이를 발표하였다
소설 [연을 쫓은 아이]는 카불에서 성장한 두 소년의 우정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로 5년 간이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기록되었다.
주인공 아미르의 할아버지는 존경받는 판사였다. 할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고아 알리를 집으로 데려왔다.
할아버지는 다른 하인들에게 알리를 가르치되 친절하게 대하라고 명령하였다. 알리는 집안의 하인이 되었다.
그리고 아미르의 아버지 바바와 알리는 친구처럼 자랐다.
바바의 아들인 주인공 아미르와 알리의 아들 하산은 주인과 하인의 관계였지만 친구처럼 형제처럼 자랐다.
아미르의 어머니는 아미르를 낳다가 죽고, 하산의 어머니는 하산을 낳고 일주일도 안되어 유랑극단을 따라 집을 나갔다.
아미르와 하산은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하산은 다른 하인의 운명처럼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하산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런 하산을 위해 아미르는 늘 책을 읽어주었다.
아리르는 용기가 없는 소년이었지만 하산은 주인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불의와 맞서는 성격이었다.
아버지 바바는 용기없는 아미르에 불만을 나타내고 친아들이 하산이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있다고 아미르는 느꼈다.
아버지 바바는 하인 하산의 생일 선물을 꼭 챙겼다.
아미르와 하산은 연날리기 대회에서 우승한다. 마지막 결승에서 떨어진 연을 줒어오는 것이 큰 영광스러운 일인데
하산이 연을 찾아 오는 길에 불량배에게 잡혀 린치를 당하고 남자에게 강간당한다. 아미르는 숨어서 지켜보기만 할 뿐 두려워 나서지 못하고 집으로 도망온다.
이 사건으로 둘은 갈라서게 된다. 아미르는 하인 알리와 하산이 사는 집에 돈을 감추고 이것이 하인들의 소행이라고 판정난 뒤 집을 나간다.
바바는 모든 것을 용서할테니 그냥 같이 살자고 애걸하지만 알리와 하산은 집을 나간다.
알리와 하산은 아미르가 하산이 불량배들에게 항문성교를 당하는 것을 숨어서 보았기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짐작으로 안다.
아마르를 사랑하지만 아마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집을 나가는 것이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후 아미르 집안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어렵게 생활한다.
망명지 미국에서 아미르는 망명 장군의 딸과 사귄다.
아미르는 장군의 딸 소라야를 사랑하지만 소라야는 과거 남자와 동거한 전력이 있어 나서지 못하는데
고백을 들은 아미르는 용기를 내어 과거는 중요하지 않고 현재의 사랑이 중요하다면서 자신도 소라야를 용서하는 용기를 낸다. 둘은 결혼한다.
사업가인 주인공 아미르의 아버지 바바의 동업자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라임칸이 병이 들었다. 그가 미국으로 편지하여 아미르를 보고싶다며 아프카니스판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아미르는 위험한 아프카니스탄에 들어가 라임칸에게 놀라운 말을 듣는다. 하산의 아버지 알리는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여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재혼하였는데 역시 아이를 낳지 못했다.
이혼한 알리의 첫부인은 다른 사람과 재혼하여 딸을 둘이나 낳았다. 결국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는 알리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리가 재혼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하산을 낳은 것이다.
하산의 아버지는 알리가 아니고 바바였다. 결국 아미르와 하산은 아버지가 같은 이복형제였다. 그래서 바바는 하인의 아들 하산에게 생일선물을 사주고 아꼈던 것이다.
리임칸은 하산과 하산의 부인은 탈레반에게 잡혀 총살 당했고 그 아들 소랍을 찾아줄것을 당부한다.
아미르는 사지에 들어가는 것이 겁이나고 위험한 일이었지만 하산의 아들을 찾아 미국으로 데려오겠다며 탈에반의 활동지에 가기 위해 길을 떠난다.
아미르는 탈레반 소굴에 들어가 소랍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죽음 직전에 소랍이 새총으로 아버지 하산을 강간한 아세프의 눈을 맞추어 부상을 입힌다. 아세프의 눈은 새총에 맞아 빠졌다.
둘은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기고 천신만고 끝에 아미르는 하산의 아들 소랍을 미국에 데려온다.
소랍은 아버지 하산을 빼어닮았다. 아미르는 소랍에게서 하산을 본다. 그러나 소랍은 미국 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축제의 날 아미르는 연날리기 대회에 출전하고 소랍의 도움으로 우승한다. 그러면서 소랍이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한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옮기지는 않겠다.
아름다운 문장도 중간중간 있었지만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스토리중심의 소설이었다.
등장인물이 많았고 그 인물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한 책이었다. 소설속의 중요한 문장을 옮겨본다.
내가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는 너의 생각은 사실이다. 그 일이 있은 후 하산이 나한테 얘기 했으니까.
아미르 네가 했던 것은 잘못이었다. 하산이 당하고 있는 것을 숨어서 보고만 있고 나서지 못한것은 잘못이었다.
그러나 그 때 너는 어린애였다는 사실을 잊지마라. 너는 당시에 너 자신에 너무 가혹했다.
너는 지금도 그렇더구나. 네가 페사르에 왔을 때 나는 네 눈에서 그걸 확인했다.
하지만 네가 명심해야할것이 하나있다. 양심도 없고 선하지도 않은 사람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실 네 고통이 이번 아프카니스탄에 가는 것으로 끝나기를 바란다.
아미르 네가 어렸을 때 네 아버지가 너한테 얼마나 심하게 대했는지 알고 있다.
나는 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고 그의 사랑을 얼마나 갈구 했는지 알고 있었다. 내 가슴이 찟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아미르 네 아버지는 너와 하산 사이에서 마음이 갈래 갈래 찢긴 사람이었다.
그는 너희 두사람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하산에게는 아버지로써 드러내놓고 사랑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적법한 아들인 너에게 그토록 심하게 했던 것이다.
아미르 너는 그가 물려받은 재산과 죄를 짓고도 무사할 수 있는 특권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는 너를 보면서 자신과 자신의 죄를 보았다. 네 아버지도 너처럼 고통스러워했던 사람이다.
나는 네 아버지가 친구이기 때문에 사랑했다. 동시에 나는 그가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했다.
그것은 선이 진짜 선이 네 아버지의 죄책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네 아버지가 했던 일을 생각해본다. 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고아원을 세우고 어려운 친구들에게 돈을 주었다.
그 모든 것이 속죄하고자 하는 그 나름의 방식이었다.
내 생각에는 그게 진짜 구원이다. 죄책감이 선으로 이어지는 것 말이다.
나는 신이 결국 용서해주리라는 것을 안다. 신은 네 아버지와 너를 용서할 것이다. 너도 네 아버지를 용서해라.
소랍이 말했다.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라해도 다치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어요.
나쁜 사람들도 때로는 착해질수 있다면서요. 하느님은 제가 아세프의 눈에 쇠구슬을 쏜것 때문에 저를 지옥에 보내실까요?
아디다. 물론 아니다. 세상이 너를 다치게 했던 것이다. 아세프는 오래전 내가 네 나이였을 때 나를 해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네 아버지가 새총으로 나를 구해주었다. 네 아버지는 아주 용감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내편을 들어주고 나를 구해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세프가 네 아버지한테 해코지를 했다. 아주 나쁜 식으로 말이야. 그리고 나는 네 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네 아버지를 구해줄 수 없었다. 나는 숨어서 보고만 있었다.
왜 사람들이 아버지를 해치려고 했어요?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비열한 적이 없으신데요.
네 말이 맞다.아버지는 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세상에는 나쁜 사람들이 있단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 몇몇은 착해지려고 하지 않고 나쁜 상태 그대로 있단다. 그래서 때로는 그들과 맞서야 하는 것이란다.
네가 그 사람한테 새총을 쏜 행동은 사실 오래전에 내가했어야 했다. 너는 그 사람에게 받을 만한 것을 줬다.
아저씨 생각에 아버지가 저한테 실망하셨을 것 같아요?
아니다. 너는 카불에서 내 생명을 구했다. 네 아버지가 너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아저씨 저는 더럽고 죄악으로 가득찼어요. 아세프와 다른 두 사람들이 저한테 그짓을 했어요. 항문강간을 했어요.
소랍! 너는 더럽지 않고 죄악으로 가득하지도 않아.
나는 그의 팔을 만졌다. 그가 다시 팔을 잡았다. 나는 손을 천천히 뻗어 그를 내게로 끌어당겼다.
내가 속삭이며 말했다. 다시는 너를 다치지 않게 하겠다 약속하마!
<선경그룹이 건물을 지어 수원시에 기증한 선경도서관>입구에서 찍음
교장실 책상 위에 약국하는 제자 오연숙과 관내 교감으로 재직하고 있는 송제경이 보내준 꽃바구니가 아름답다.
별로 한 일 도 없는데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40에 철이 나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40 이전에는 열심히 가르쳐 좋은 대학에 합격시키는 것이 훌륭한 선생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지금도 40전에 가르친 아이들을 만나면 부끄럽다. 겁이난다.
학급에서 공부 못하고 뒤쳐지는 학생들을 보듬어 주지 못했다. 지금와서 그점이 후회 된다.
그런데 40이후에는 정말 학생들을 사랑했다. 마흔살 이후에 내가 가르친 제자를 만나면 자신있다! 정말 학생들을 사랑했으니까…….
그나마 내가 40살에 철이난게 천만 다행이다.
그녀(이름:오산이)의 어머니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처음 보았을 때 타인의 애를 배고 있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만큼 한눈에 반했으나
오산이 태어난 이후 부인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오토바이를 타고 집을 나간 후 아버지는 9년만에 다른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 이혼을 강요한다.
산이는 어머니와 함께 쫒겨나고 어머니는 굴비를 구워 아침을 마련해주는 날은 예외없이 새로운 남편을 따라 오산을 두고 떠난다.
여러번 떠났지만 결국 병든 몸으로 돌아와 안락사 시켜 달라며 딸을 찾는다.
산이는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하고 외면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말한 유일한 남자를 죽도록 그리워한다.
그리워한다고 님이 다오면 슬픔이 어디있겠는가! 산이에게 아름답다고 말한 남자는 훗날 만나지만 오산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작가 신경숙은 우리의 주변에는 태고부터 조용히 자신의 부당한 운명을 견디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들을 잊은 후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내 생각에는 불쌍한 사람은 우리의 주변에 있는 소수가 아니라 대다수 인지도 모른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참모습은 고통이라고 했다. 태어난것 자체가 고통이라고 말했다.
이 고해의 바다를 건너면서 불쌍하지 않은 중생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 인생은 모두 고통이다.
소설의 주인공 산이만 고통이 있는것이 아니다. 길에서 만나는 너, 나 그리고 우리 모두 고통 속에서 산다.
그리고 인생의 모든 모습이 꼭 고통만은 아니다. 고통 속에서 가끔, 아주 드물게 행운과 기쁨도 온다.
고통없이 기쁨만 온다면 그 또한 재미없고 의미없는 인생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주인공은 너무 고통이 많다. 그리고 세상에는 실제로 고통만 존재하는 그런 인생도 많다.
작가 박범신은 글은 가난과 패배, 슬픔과 고독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이책의 주인공은 너무 슬프다. 읽고 나니 주인공이 너무 불쌍하다.
좋게 읽은 대목을 원문 그대로 옮겨본다.
나 할말있어, 나 이런 말 하는 사람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번 그놈의 바이올렛 사진 찍으러 화원에 왔을 때 당신을 처음 보고 내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알아?
당신 내 카메라 바라보느라 눈 내리깔고 있을 때, 이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눈썹도 있구나, 내내 생각했지, 그런 내 마음 몰랐지요?
그녀는 얼굴만 붉히고 어물어물 아무말도 못했다. 작별인사를 할 때 그 남자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팔에 내려놓는다.
이 여름 밤 순간적으로 그녀의 팔위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그녀는 울뻔 했다.
그 날 이후 산이는 그 남자가 연락해오길 기다리다 지친다. 하여 그의 명함을 들고 그가 근무하는 사무실 근처를 늘 어슬렁거리지만 만나지 못한다.
많은 아픔의 시간이 지난 후 전화를 걸어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나오라고 하지만 오산이씨 라구요?
죄송하지만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세상에! 이름은 물론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다.
왜 쓸데없이 그런 말은 해가지고….듣기좋으라고 말하나…… 태어나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그 남자가 처음이었다.
우리 주변에는 부당한 운명을 타고 나서 어렵게 견디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주장은 소리도 높게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잊혀진다……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을 앓던 엄마는 주인공인 딸(진희)가 6살 때 목을 맨다. 사람들은 정신병이었다고 수군댄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고 새장가를 가고…..진희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의 안쓰러운 보호속에서 성장한다.
어린 소녀의 눈으로 본 군상들이 등장한다. 할머니, 외삼촌, 이모, 그리고 한집에 세사는 다른 집 식구들……
그리고 그 군상들의 삶은 모두 소중하다. 주인공은 어려서부터 다른이의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한다.
그것은 주인공의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다른이의 삶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과 사랑을 정립시켜나간다.
말하자면 정체성을 가져나간다는 의미이다.
은희경의 소설은 문체가 건조하면서도 유려하다. 그리고 적절한 서정이 있다.
그리고 읽기에 좋다. 요즈음 외국문학 책을 주로 읽었는데 국내소설을 읽으니 진도가 빨라서 좋다.
좋았던 문장을 원문 그대로 옮겨본다.
입술을 비죽거리며 방바닥으로 내려앉는 이모는 스무살을 어디로 다 먹었는지 아무리 봐도 어른스러운 모습을 느낄 수가 없다. 저렇게 어린애 상태로 머물러버린것은 어쩌면 어린시절을 고뇌없이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내게 있어서는 태생의 고뇌야말로 성숙의 자양이었다. 고뇌라는 그 자양이 삼촌방의 다락에서 이루어진 독서라는 자양과 합해지면서 비로소 삶에 대한 나의 통찰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랠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없이 생기는 미운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할머니의 사랑 중에 고운 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나라면 이모는 미운정 쪽이다. 이모는 고운정을 갖기는 틀렸기 때문에 할머니에게서 완전한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나 뿐이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에게 미운정을 얻기 위해 할머니에게 함부로 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자신이 없다. 어쩌면 미운정이란 고운 정보다 훨씬 얻기 힘든 무르익은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식은 잿더미를 천천히 헤쳐보니 그 안에 불씨가 하나 있긴 있었다. ‘그거였어!’
눈물샘에 금방이라도 넘칠 듯 고여있던 눈물의 폭포 중 한 줄기가 미처 붙잡을 틈도 없이 뺨위로 미끄러져버린다.
나는 더 이상 눈물의 이탈자가 없도록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서 아예 눈물샘을 봉쇄해버린다. 그리고 가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한다.
특히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하고 햇볕이 못 견디게 말을 걸어오는 봄날이면 그런 장면은 부쩍 많아졌다.
그는 남자들이 자기 몸 가운데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을 지닌 피조물이란 걸 알게 된 다음 빠지게 되는 운명적 비탄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남자들의 성적욕구를 저주하였다. 나는 그런 남자들의 운명에 동정을 느꼈다.
사랑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이 스러진 뒤에는 그 자리에 오는 다른 사랑에 의해 완전히 배척당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랑, 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나는 그것을 광진테라 아저씨의 박광진씨를 통해서 알았다.
맨날 남편에게 두드려맞고 살다가 집을 나가 친정에서 일안하고 가만이 누워있는데 온몸이 안파픈데가 없고 또 마음은 왜 그리 불안한지…..여자가 어릴 때 자란 집은 제 집이 아니라는 말도 있으니까……
며칠 후 재성이 아버지가 친정으로 데리러 온날 때리던 남편이 반가웠다. 그리고 저를 보고 사정을 하데요. 애를 생각해서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구요. 그날 밤 둘째를 가졌어요.
삶이 다 그렇듯이 기회는 우연히 찾아온다.
내가 알기로는 세상을 서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상처받게 마련이다.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 따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서정성 자체가 고통에 대한 면역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사람의 감정이란 언제 변할지 모르며 특히 젊은이를 변심하게 만드는 일은 이 세상에 너무나많다.
그러므로 상대가 나를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은 상대의 사랑을 잃을 때 내가 불행해진다는 것과 같은 뜻임을 깨닫고
그 사랑이 행복하면 행복할 수록 한편 원하고 유일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이 세상에 그런 사랑은 있지도 않다는 것을 이모는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누구의 삶에 서든 기쁨과 슬픔은 거의 같은 양으로 채워지는 것이므로 이처럼 기쁜 일이 있다는 것은 이만큼의 슬픈 일이 있다는 뜻임을 상기하자.
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사랑을 잃을 때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그러니 상처받지 않고 평정속에서 살아가려면 언제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긴장을 잃어서는 안된다.
나는 선이나 악 모두가 내 마음 깊이에 똑같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중 어느 한쪽 만을 나의 진실한 모습이라고 주장할 마음은 전혀 없다.
나는 남여의 사랑이란 외모라든가 순간적인 분위기에 의해 그러니까 단편적인 이미지에 미혹되어 생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단정한 학생복 차림에 옷깃에는 뱃지를 달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그리워했던! 이것이었어.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 시간. 저 사람의 웃음과 눈빛이 있는 이 풍경.
저사람과 내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하나뿐인 세상을 공유하며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이 순간
할머니는 밤에 돌아다니는 계집애들은 사내들한테 익혀놓은 음식이라고 늦게 돌아다니는 우리의 행실을 나무라셨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모든 중요한 일의 결정적인 해결은 꼭 우연이 해준다. 복잡한 계산과 치밀한 논리를 다 동원하고도 아직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을 때
우연은 그 어렵고도 중요한 일을 어이없을 만큼 가볍게 해결해버린다.
< 작가 은희경>
< 아산이가 생일선물로 사온 T셔츠>
<벌써 여러해 째 사용해오고 있는 어버니날 카네이션! 조화는 재활용이 가능해 좋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콜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기 이전부터 이미 죄인이었다고 생각했다. 라스콜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동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리적 억압 때문이다.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무더운 날씨, 어머니와 여동생마저 돌보지 못하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가 분명 그를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을까? 아니다. 더 중요한 동기가 따로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가 나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을 자신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게끔 학비로 사용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와 같이 <비범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법률을 위반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솔로몬과 마호메트, 그리고 나폴레옹을 예로 들어 자기를 정당화했다. 이들이 그랬듯이 새로운 사회와 법률을 위해서는 낡은 것들을 파괴해야만 하는데,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그것이 당연히 허용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는 한 점 죄의식조차 없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는 자만이었다. 그렇다면 이 죄와 그 벌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는가? 있다. 의외로 간단하다. 자만이 원인이면 겸손이 해법이다. 날 세운 이성이 원인이면 바보 같은 신앙이 해법이다. 타인 희생이 원인이면 자기 희생이 해법이다. 창녀 소냐가 그 일을 맡았다. 그녀는 비참하게 살아가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며 자기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인간이다.
죄라고? 무슨 죄? 갑가지 그가 어떤 느닷없는 광분에 휩싸이며 소리쳤다. 저 추잡하고 해로운 이를 가난한 자들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아무에게도 필요없는 전당포 노파를 죽였으니 마흔가지 죄악은 용서받을 텐데, 그것이 죄라고? 나는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 죄를 씻을 생각도 없어
라스콜니코프에 대한 판결은 그가 죄지은 범행을 고려할 때 예상보다 가벼웠다. 왜냐하면 범인이 변명하려 들지도 않았고 오히려 자기 죄를 더 무겁게 하려는 바람마져 내보인 덕분이었다. 범행을 저지르기 직전까지 범인이 병적이고 참혹한 상태였다는 사실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범행을 저지르는 동안 지적능력이 온전하지 못한점이 참작되었고, 대학재학 시절 마지막 남은 생활비를 털어 어느 가난한 폐병쟁이 학우를 도와주고 반년에 걸쳐 그를 거의 부양하다시피 했고 그학우가 사망하자 홀로 남겨진 고인의 늙고 병든 아버지를 돌봐주고 입원시키고 사망하자 장례도 치루어 주었다는 것이다. 또 대학 때 하숙집 아주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라스콜니코프가 불길에 휩싸인 어느 아파트에서 어린아이 2명을 구해주고 그 와중에 화상을 입었노라고증언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철저히 조사되었고 많은 증인을 통하여 입증되었다. 또 범인이 자수한 사실까지 모두 죄를 경감시키는데 영향을 끼쳐 겨우 8년에 불과한 제2급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라스콜니코프가 노파를 죽인것은 오만한 자기중심주의와 자폐적인 선민의식의 산물이었다는 것, 그는 소냐를 앞에 두고 그는 광적인 어조로 고백한다. ‘는 그냥 죽였어’ ‘나 자신을 위해 나 하나만을 위해 죽인거야’ 나는 그 때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이에 불과한지 아니면 인간인지를 알아야만 했어
라스콜니코프는 우연히 가난한 실직 관리 마르멜라도프를 알게되고 그가 죽었을 때 주머니에 있는 돈을 전부 장례비로 내놓는다. 이 때 마르멜라도프의 딸 소냐를 알게된다. 소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창녀였지만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성녀같은 인물이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가 착하고 순수한 젊은이라른 것을 한눈에 알게된다. 죄와벌 전체를 흐르고 있는 어둠은 사회의 가난이다. 예나 지금이나. 너무 가난하면 사실 정의, 진리, 예술, 도덕을 찾을 시간도 공간도 없다. 150년 전의 러시아 사회의 죽음과도 같은 가난이 소설 전체에 어둡게 깔려있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에게 자신의 살인을 털어놓고 소냐는 살인으로 손을 더럽힌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대지에 엎드려 입맞추고 그 대지에 속죄하라고 권한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수하고 시베리아의 감옥으로 끌려간다. 소냐는 시베리아의 유형지까지 따라가 라스콜니코프를 자주 면회하고 편지를 쓴다. 어느날 감옥 밖에서 호송병의 감시하에 작업을 하고 있는데 소냐가 살그머니 와서 다가와 앉았다. 호송병은 마침 등을 돌린 상태였다.
여러날에 걸쳐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원문대로 옮긴다.
그는 울면서 소냐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순간 그녀는 경악한 나머지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질려버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벌벌 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바로 그 순간 모든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은 무한한 행복으로 빛났다. 그녀가 깨달은 사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은 사실이란 그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 무한히 사랑한다는것, 마침내 이 순간이 도래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둘다 창백하고 여위였다. 하지만 병색이 완연한 이 창백한 얼굴에서 이미 새로워진 미래의 아침놀이(?), 새로운 삶을 향한 완전한 부활의 아침놀이 빛나고 있었다. 사랑이 그들을 부활시켰고, 한 사람의 마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무한한 생명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기다리며 참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7년이라는 세월이 남아있었다.(라스콜리코프 징역8년에서 1년경과) 그 때까지 참을 수 없는 고뇌가 무한한 행복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그는 부활했고 그는 그것을 알고 또 자신의 새로워진 온 존재로 흠뻑 느끼고 있었다. 두사람은 7년을 7일처럼 바라볼 준비가 돼 있었다.